04. 신약설교마당(135)

108.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solomong 2025. 11. 3. 10:18

108.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본문: 딤후 4:9-22)

 

1). 서론: 영국의 18C, 말 낭만시인 Shelly는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If winter comes how be the spring far away.)라고 낭만적인 시구를 읊조린 그 뜻은 겨울이 오는 것은 봄소식을 전해 주러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겨울은 계절적인 봄이 아니라, 인생의 봄으로써, 그 절망과 좌절의 겨울 끝자락에서 반드시 희망과 용기의 봄이 도래한다는 확신을 불어 넣어 주는 뜻이 담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제자 디모데에게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것은 겨울이 지나면, 계절적인 고난과 실의 속에 낭패와 절망을 뜻하는 절박한 정황이 담긴 메시지였습니다. 제자와 해후상봉 할 수 있는 오직 한 <기회>가 겨울이 가기 전이라는 것입니다. 겨울 같은 고달픈 인생살이도 때로는 희망과 행복한 인생의 봄을 맞기도 하지만, 딱 한 번뿐인 인생의 기회를 포착하여 선용치 못하면 영원히 오지 않는 사례가 바로 바울과 디모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 사유를 본문을 통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마지막 보고 싶은 얼굴-바울은 딤후 4장에 들어와서, 장엄한 신앙고백과 내세를 바라보는 영광의 소망에서, 본문에서는 급전직하하여 현실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어서 속히 네게로 오라”고 방문을 재촉하는 이유는 그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죽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를 보고 싶었으며, 옥중생활과 숭고한 생애의 마감일지라도 엄습해 오는 孤獨을 잠시나마 메우고 싶었고, 제자 디모데에게 최후의 축복을 하면서 서신으로서는 다하지 못한 말을 부탁하고 싶어서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②. 3 제자의 떠남-바울의 최후 재판의 결과가 사형선고로 거의 떨어지자, 평소 Paul을 따르던 사람들은 다 자기 고향으로,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세상사의 권력이나, 금력의 힘이 있다고 하는 곳에는 문전성시(門前成市)하다가, 그것이 무력해지면 흩어지는 것이 인간사입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AD. 64-65. 이때는 AD. 66~67. ) '달마디아'로 갔다고 표현했고(10절), ‘두기고’는 "내가(바울)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내었노라"(12. 절)라고 했습니다.

 

다 같이, [그레스게와 디도]도 바울이 일직이 전도했던 곳으로 보내어 그곳 교인들의 신앙을 다지는 공적 임무로 파송했다는 설이 있고, 두기고 역시 그의 고향인 에베소로 바울이 목회하러 보냈다는 설이 뒤 밭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0 절의[그레스게와 디도]도, "내가....보내었노라.”라고 표현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데라'와 싸잡아, "...는...로”라는 표현을 했고, ‘두기고’는 "내가...보내었노라.”라는 표현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두기고’를 보내었노라"가 더 신실한 표현으로 바울이 공무로 파송했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고, '데마'를 비롯한 세 사람은 주동적으로 자기들 스스로, 私的 理由로 Paul 곁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 사람이 主語로 됨), 또한 11절에 "누가만...”이 말씀의 "...만...”(only, alone)字가 강조를 한 뜻한 뉘앙스가 바울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는 정서로 읽을 수가 있으니 말입니다.

 

③. “누가만 나와 함께 있으니”-누가는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로서 사랑받는 醫員이었으며(골4:14), 대 문학자, 역사가, 전도자이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처럼 제자나 신앙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바울의 충실한 同志요 조수이었습니다. 누가는 제2, 3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을 수행했으며, 최후 로마로 가는 길에도 동행했던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누가만”이라는 표현은 누가의 충실성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때 바울의 측근에 누가만 있었다면, 본서의 대필자도 누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④. “마가를 데리고 오라”-마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모인 “마가의 다락방”의 주인이며 마가복음서의 저자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로 역시 초대교회의 주요한 공로자이었습니다. 이처럼 마가는 좋은 출발에서 또한 좋은 결말을 초래했으나, 그 중간에 젊은 청년 시대엔 실수한 적이 있었으니, 막 14:51의 주님께서 잡히실 때, 벌거벗은 몸으로 일신의 안일을 위하여 도주한 것과 제1차 전도 여행 때, 중도에서 스스로 탈락하여 이것이 제2차 전도 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행 13:13, 15:36-40)

 

좋은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호화로운 청년의 철없는 면이라고 보겠습니다. 그 후에 바울과 마가 사이는 완전한 화해가 되어서 옥중서신을 기록할 무렵엔 마가는 바울과 같이 있었고(골 4:10), 그 후 그는 바울을 떠나 소아시아 지방으로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서먹했던 인간관계가 “마가를 데리고 오라”는 말속에서, 우리는 바울의 사감을 초월한 숭고한 생활과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 주변에 明暗의 인물들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든지 어디에서든지 한 사람의 가룟 유다를 許容하신 것은 한 분의 예수님을 원하시기 때문이듯이, 데마와 그레스게 및 디도가 바울 곁을 결별하여 떠나는 자가 되었고, 디모데를 위시한 누가와 마가 및 두기고는 마지막 바울 생애에서 고마운 얼굴들이었습니다. 특히나 디모데는 오매(寤寐) 간 보고 싶은 제자였기에,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먼저 바울 주변을 어둡게 했던 세 사람은 분명히 사적 사유로 고독한 바울을 두고, 떠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골고다 석벽 십자가에 달리셔서 운명하실 그즈음에 12. 제자는 겁이 나서 다 제 갈 길을 가고 없을 때, 멀리서 우는 여인들만 있었고, 유사시의 제자 노릇을 한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주님의 장례 예식을 행한 것처럼, 주님의 제자 Paul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인간적 고적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꼭 언급해야 할 사람은 ‘데마’입니다. 왜 데마는 10여 년간 바울의 동역자요, 충실한 조수로서 바울이 옥중서신을 기록할 무렵에는 같이 있었습니다. (골 4:14, 몬 24)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만 버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마저도 버린 배교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세 가지 동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수고와 고생도 같이 하는 것을 그는 망각하고, 일시적인 흥분, 기쁨, 평화, 안식, 축복만을 생각한 사람으로 진단해 봅니다. 둘째는, 그간의 세월 속에서 타성과 이상도 흐려지고 감격도 식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복음보다 안전을, 십자가의 길보다 쉬운 길, 세상에서 성공을 희구했던 ‘데마’였다고 봅니다. 우리는 그에게 정죄보다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위한 제자의 길에는 영광과 더불어 핍박, 희생, 고독, 투옥, 가난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구약의 그리심과 에발의 양산(兩山)이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며 저주하던 산이요, 민족의 국부 모세의 율법은 중심적 생명이었고, 그 율법은 동전의 양면처럼 축복과 저주인 것을 '데마'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축복에 [아멘!]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저주에 아멘! 하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축복에 아멘! 은 신자의 신령한 특권입니다. (신 11:26-29)

 

동시에 저주에 아멘! 하는 것은 신자가 인종해야 할 의무입니다. 오늘의 교회의 ‘거룩한 백성’은 축복에는 아멘! 아멘! 하지만, 저주에는 아멘! 대신에 불평과 반항 및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귀의 세계에는 축복만이 있고 저주가 없거나, 저주만 있고 축복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 축복 없는 저주는 '가혹'할 것입니다. 저주 없는 축복은 '기만'인 것을 '데마'는 몰랐다고 봅니다. 우리는 축복에 용기백배해야 하고, 저주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축복만 외치는 자는 거짓된 종의 소리요, 저주만 외치는 그 또한 거짓된 종입니다. 쓸데없이 [절망]하는 것은 불신앙이요, 동시에 저주 없는 [낙관자]도 신앙공동체와 겨레를 망치는 것이 됩니다. (신 27:11-26)

 

바울의 인생 석양 길(거룩한 순교의 길)에, 평소에 자기를 사랑하던 사람이 여지없는 실패자 인생으로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를 헌신짝처럼 별 쓸모없다고, 늙었다고(패물이 되었다고) 소외시키는 모습은 오늘의 야속한 세태와도 방불하다고 할까요. 하물며 자식까지도 별 볼일이 없으면 부모를 버리는 세상이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바울 주변에서 그래도 그간 바울의 말 친구도 되고, 가족이 없는 최후의 그를 위해 끝까지 도와드려야 하는 것이 그들의 최소한의 “Humanism”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옥중에 죄수로서 더욱이 주를 위해 사형선고를 받은 그를 위로 격려하며, 그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사람들이, 마지막 바울의 상황을 보고, 바울 곁에 있어 봐야 별스러운 이득이 없다고 다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세계도 이런 몰인정하고, 비인도적인 신앙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덜된 사람들”이 라고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섭섭한 순간에도 바울이 잊을 수 없는 세 친구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입니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노니”(요 15:15~16 )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바울도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했다고 봅니다. 두 번째는. 누가였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에 늘 같이 수반했고, 그의 약한 건강을 위해서 돌보아 주던 의사 '누가'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디모데'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제자로, 제2차 전도 여행 때, 만난 '디모데'이었습니다. (행 16:1-)

 

바울이 '루스트라'에서 '돌매'를 맞고 시궁창에 버림을 받았을 때, 그를 구해 준 사람이 '디모데'이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이 사도를 찾아내어 상처를 싸매 주고, 먹을 것을 갖다주고, 집에 모셔다가 그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돌보아 준 것이 곧 '디모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수 千里 타향 로마 옥중에서 마지막 처형을 기다리는 순간, 자기가 손꼽는 3 친구 가운데, ‘디모데’만 자기 옆에 不在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디모데야!” 올 때 혼자 오지 말고 '마가'를 데리고 오라!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마가가 중도에 하차하여 복음 전도에 신념과 인내성이 없이 귀향한 것 때문에 '바울'과'바나바’ 간에 다툼이 있어서, 바울의 제2차전도 여행 시에는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수리아 쪽으로 갔었고,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 쪽으로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이 白髮이 성성한 노인이 지난날 감정들을 다 '회오에 찬 심정’으로 '마가'를 사랑하는 심정으로 다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본 바울로서 너그럽고, 용서를 구하는 죽음 직전의 생을 정리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생 황혼에 저무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것을 [정리]하는 모습을 우리는 本 받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는 성공적으로 출발한 주의 종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먹을 자기 집 다락방을 제공했고, 주님 없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며, 자기 집에서 120 문도와 더불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은 마가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사(행 13:13, 15:36-40)는 그의 인생의 중반기인 젊은 시절에 실수하여(전도 여행에서 도중에 고난에 대한 인내성 없이 귀향한 것) 이 일로 바울과 불화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가는 길 앞에서 아마 깊은 사념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다시 자신의 순교 정신을 직접 목도 하도록 하고, 그의 삶을 인상 깊게, 다시 말해서 마가가 주님을 위한 성공적인 길을 가도록 인도하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오늘날 원로 목사와 공로목사들의 인생 석양 길에 황혼이 더 진하고 더 붉게 물드는 것처럼, 후배 목사나 후임 위임목사를 위한 아름다운 바울의 모습을 본받은 정경을 한국교회에서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오월의 훈풍처럼 훈훈한 정감의 전통을 우리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그들은 또한 계계승승 아름다운 전통을 또 물려주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현실은 개개 교회마다 원로 목사와 위임목사 간의 갈등, 목사와 장로 간의 고소 사건! 위임목사와 후배 목사 간의 두 패로 갈라진 양상들이 모두가 급성장한 양적 부풀기에만 힘을 빼서, 나온 불순물들이라고 여겨집니다. 후배 목사에게 시기하지 말고, 그가 성공적인 목회가 될 수 있도록, 바울처럼 후배 목사들을 키우는 그런 큰 안목의 남은 인생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베드로의 전언을 듣고, 바울의 장엄한 순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마가복음 쓰고(AD. 67-68), 바울의 유지를 받들어 그도 순교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저는 그가 순교의 거룩한 생을 마무리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오늘의 석양에 가까운 목사, 장로 구별 없이 모든 기독 신자는 이런 아름다운 "스토리”를 남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도 우리의 [감동적인 인상과 이야기]를 그들 공동체에서 ‘이야깃거리'로 회자 되고, 그들도 이런 아름다운 생을 본받는 교회 전통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전국교회 목사 장로는 악명 높은 뉴스 이야깃거리만 난무하니, 인생의 겨울(고난, 시험, 위기, 죽음 등)철이 올 것이니, 겸허히 올겨울(계절적인)이 오기 전에 회개합시다. 우리 중 전 인간 일생을 돌이켜 볼 때, 그간의 부끄럽고, 실패의 인생을 살아온 길도 있을 것입니다만, 적어도 인생 후반기! 성공적인 생의 최후가 되었으면 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는 길에 ‘드로아’에 맡겨 둔 외투를 가져오라고 부탁한 것을 봐서 로마도 벌써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외투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책과 특히 가죽에 쓴 두루마리를 (파피루스) 가져오라고 한 것으로 봐서, 죽기 전에 '디모데'와 함께 꼭 할 말이 있었다고 보겠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겨울 전에 오라"고 했을까요. 추워지니까 외투 생각이 나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처형당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이 되면, 지중해 항해 사정이 어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전 겨울에도 지중해에서 바울 자신이 풍랑을 만나 고생했던 기억이 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중해는 10월이 들어서면, 작은 배의 항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만일 디모데가 겨울이 되어서 출발한다면, 그 이듬해 봄까지는 로마로 가는 배도 없고, 바울 자신도 이듬해 봄까지는 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는 생각이 납니다. 지금 오지 않으면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옥중에서 이런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디모데가 이 편지를 받고, 어떻게 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상상만 해 봅니다. 디모데는 아마 이 편지를 받고,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드로아'로 가서 바울의 책과 외투를 가지고 로마를 향해 곧장 떠났음이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그간 정의를 봐서)

 

그래서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이 갇혀 있는 옥중으로 달려가서 그를 기쁨으로 상봉하고, 바울과 더불어 책도 읽고, 마지막 편지도 썼을 것이며, 바울의 그 최후의 순간까지 그의 불굴의 신앙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바울과 함께 그의 사형장까지 가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장엄한 순간까지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디모데가 겨울 전에 왔으니까 가능했지, 하루만 늦어도 바울을 볼 수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중에, 봄이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누가 우리 곁을 멀리 떠날지도 모릅니다.

 

겨울이 오고 또 겨울 이 지나면, 봄이 오고, 그다음에 여름이 옵니다. 그러나 그 겨울이 오고 감에 따라, 우리의 기회도 오고 가고,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의 생사도 그럴 것입니다. 이번 주일에 한 친구를 도울 기회가 있었는데, 다음 주일에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면, 그 기회도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매일의 생활에도 귀담아듣기만 하면, "너는 겨울 전에 오라!"고 목메어 부르는 數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2, 3번까지 목소리를 들어 봅시다. 겨울이 오기 전! (이 해가 가기 전에!), "진실한 신앙인이 되도록 하자!” 우리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인간부터 먼저 되자!”라는 소리도 들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계속 죽을 때까지, "되어가는 존재”(Becoming)라고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 L. J. Sherill 박사는 그의 유명한 저서 "영혼의 투쟁”(The Struggle Of The Soul)에서 갈파한 바가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는 것은 友情의 목소리이었습니다. 디모데가 마지막 편지를 받고 만약에 구물구물 그렸다면 (에베소-골로새, 드로아, 거쳐서), 이미 배는 떠나고 항해 길이 막혀 버린 뒤일 수도 있습니다. 봄에 급히 배를 타고 로마로 갔으나, 바울을 아는 자는 없고, 어느 노파를 붙잡고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당신이 바로 디모데요!, 바울이 지난 12월 사형당했는데! 원! 저런 원!” 이때 '디모데’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사랑과 우정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와 달라."고 지금 부르짖지나 않을까! 생각해 봄직도 합니다. 늦기 전에 말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속히 오라!”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마음 문이 잠겼는지, 긴 세월 동안, 단절되어서 마음의 거미줄이 느려져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녹이 나서,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두지나 않았는지 생각해 보세요. 올겨울이 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지금 그리고 여기서"(Now and Here) [결단]해야 합니다. 생을 다시 정비해야 하겠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말입니다. ‘데마'처럼 주님보다도 더욱 ‘세상을 사랑하라.'라는 유혹의 소리를 단연코 물리쳐야겠고, 바울이 제자 '마가'를 용서하고 그의 목회의 성공을 위한 배려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양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며, 사랑과 우정의 부르는 소리에 귀를 쫑긋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老 사도 Paul의 아름다운 최후의 [인생 정리]의 모습도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젠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소명(New Calling)의 소리를 듣고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맙시다! 늦기 전에 말입니다. 후회하기 전에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