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05.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solomong 2025. 10. 26. 10:49

105.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본문: 마태복음 27:45-50)

I). 서론: 주님께서 십자가 가상 칠언(七言)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처참한 부르짖음은 이미 시편 22편 1절에 예언된 바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람어)라는 이 네 마디의 말이 가진 내용을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깊이에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한꺼번에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쏟아져 나올 만큼 처절하고 비참하게 표현하려면, 우리나라 가락의 창(唱)을 부르는 사람들의 통절한 울부짖음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묵상함으로 주님께서 속죄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아파하셨는지, 이 고난주간 기간에 그 의미를 되새기며 은혜를 받았으면 합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이때는 유월절 망월 때임으로써 일식은 있을 수 없으므로, 이적의 어두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적의 어두움은 일직이 애굽의 어두움(출 10:21-23)을 위시하여 몇 차례 있었습니다. (암 8:9, 욜 2:31) 이때 어두움의 뜻은 하나님의 진노인 심판의 상징과 죄로 말미암아 인류의 고민을 대표한 “인자”의 고통의 상징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②.“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1의 인용의 말씀으로, “엘리”란 히브리어 發音입니다. 마가 복음서엔 “엘로이”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람어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상의 절규는 정신적 고통을 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순간 사실상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것으로, 이는 인간의 죄를 대신 쓰시고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희생양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이는 십자가의 최고봉이요, 구원사의 초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로 호칭하셨으나, 이때만은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사적인 친밀한 칭호에서 공적 칭호로 변한 것이지요, 사랑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아픔을 절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죄에 관한 결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느끼시는 마음에 그리스도 구속의 은총은 충만한 것이 됩니다.

 

③. “크게 소리 지르시고” -十字架 上의 7. 언중, “다 이루었다.”(제6. 언),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제7. 언)라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이 큰소리로 외친 것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증거라고 고대 교부들은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아직 육체의 여력을 가지고 계시면서, 생명의 구주로서 스스로 생명을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요 10:17-18) “영혼이 떠나시다”(ἀφη̃κε τό πνευ̃μα)라는 문자적으로 “영혼을 내어놓으셨다.”라는 뜻입니다.

 

3). 본론(Context): 이 외침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들고 있는듯한 감'도 느낄 수가 있고, 예수님께서 극도의 감정적 폭발을 하신 것 같기도 하고, 원한의 사무친 절규 같기도 합니다. 억울해서 견딜 수 없는 호소의 극치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주님의 억울함, 절망 및 비통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깨끗한 삶을 살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았고, 남을 돕고 사랑하고 침식을 잊으실 정도로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인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신 분인데, 그 결과로 이러한 처참한 죽음을 받으시게 되었으니 과연 예수님이야말로 십자가상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부르짖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생을 강도 노릇을 하고 못된 행동은 찾아다니면서 다한 한편 강도는 ‘내가 지은 죄로 이런 형틀에 매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하면서도, 그래도 고통에 못 이겨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칠만한 사유”도 될 만합니다.

우리는 이 비애의 문을 겨우 열고 그 속에 있는 고난의 발자국들을 찾아보면, 이 절규의 <성격과 내용과 그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격>은 분명히 탄식의 표현입니다. 인간적인 구원의 손길은 다 끊어지고, 오직 하나님께만 당신 자신의 문제를 호소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아버지만은 나를 버리시지 않을 줄 압니다.”라는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依支)하는 고백(告白)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처분을 해 주실 것을 알겠으니,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라는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용>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막심한 고통 중에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사랑의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구슬픈 탄식의 절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저주하고 버리는 대신에, “어찌하여(Why me? Why me?), 왭니까? 왭니까?”라는, 이 대목은 우리가 오늘날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를 깊은 고통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가슴은 예수님의 무거운 마음이 천근만근 되는 뜻한 느낌을 느끼게 합니다. 주님의 슬픔, 아픔, 고독이 몸서리칠 정도로 엄습(掩襲)해 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천지간에 ‘외로움’을 주님께서는 이때 느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의(義)란 것은 ‘바르고’, ‘정확’하고, ‘엄격’하고, ‘법적’이요, ‘굽힐 수’ 없고,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인생에 대한 바른 판단으로 공정,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이는 굽힐 수 없는 법(法)으로 작용하여, 모든 불의한 자에게 유죄(有罪)를 선고(宣告)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의(義)는 불의(不義)한 자만, 심판과 정죄와 실망만을 가져왔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인생의 불의와 죄를 폭로(暴露)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완전한 의를 행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유죄의 최후 선고와 멸망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로써 심판하려는 것을 모든 인생이 도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생의 본능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과 자비가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여기에는 사랑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세상을 의로써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도덕적 질서와 의의 잣대로써 심판하십니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되는데, 어떻게 하면 인생들이 하나님의 義 앞에서 살 수 있느냐는 문제가 야기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義 앞에서 최후적 심판을 감당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의는 절대로 변화가 없을 것인데, 어떻게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말미암은 구원(救援)을 바랄 수가 있는 것이냐가 큰 문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의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로운 속성적(俗性的)인 의를 변경할 수 없으며, 그의 의로운 행동을 바꿀 수 없기에, 불의한 인생을 위해서는 하나님 편에서 반드시 한 의(義)가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들은 영원히 버림을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절망적인 죄 사이에(中間에) 개입되지 않고는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한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났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하여 죄의 값을 대신 갚기 위해서 십자가상(上)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형벌(刑罰)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滿足)하게 함으로, 인생들의 죄에 대한 사유(赦宥)와 하나님과의 화목(和睦)을 그리스도께서 만족(滿足)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독생자 아들을 통해서, 인생들을 위해서 십자가상에서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의(義)와 아들까지 희생시킨 하나님 아버지의 인생을 위한 “사랑”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주님의 그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인생을 구원키 위해서 아들의 그 고통의 순간에도 얼굴을 돌리시고, 버리셨던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같은 아픔을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나라의 도덕적으로 퇴폐해서 임금님이 죄를 지으면, 두 눈을 뽑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범죄에 걸려든 자가 왕자(王子)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아들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눈 하나를 뽑고, 아들의 죄에 대한 몫으로 왕자의 눈 하나를 뽑았습니다. 그러니 선포한 대로 두 눈을 뽑았으니 임금님이 선포한 의와 법을 이루어서 위엄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나라엔 퇴패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금의 눈과 왕자의 눈을 뽑거늘, 하물며 백성들의 잘못에 대한 눈을 뽑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절규에도, 하나님 아버지 편에서는 얼굴을 돌리셨지만, 피를 토하는 아픔이 있었고, 예수님은 영혼과 육신이 찢어지셨던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이 1974년에 쓴 저서의 책 제목이<The Crucified God>(‘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저서 속에서 몰트만은 "God was in Christ."(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울 수도 없고, 고통 할 수도 없는 무감정한 하나님이라면, 이는 하나님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바로 삼위 일체적인 의미에서도 쉽게 이해되는 것이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하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를 그냥 버리면서, "너나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해라.”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고통과 고뇌에 대해서 같이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라고 하는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Wiesel이란 작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유대인 집단수용소이었던 아우츠빗츠(Auschwitz)에서 고생하다가 살아 나와서, 그때의 경험 이야기를 쓴 책 이름이 <Night>라는 것인데, 이 책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몰트만이 인용하였습니다. 집단수용소를 탈주하다가 잡힌 2. 사람을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단두대에서 처형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수 한 사람은 늙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청년인데, 노인은 이내 숨졌지만, 청년은 30분쯤 단두대 올가미에 목이 달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이 참혹한 정경을 유대인들이 보는 중인데, 이 책의 저자 Wiesel이 뒤편의 군중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Where is God?), "Where is He?"라는 소리가 들리더란 것입니다. 매달린 청년은 그냥 계속해서 고통 중인데, 또 들려오기를 "Where is God now?"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밤"(Night)이란 책의 저자 Wiesel은 자기 마음속으로, "He is Here!"(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 "He is hanging there on the gallows."(하나님은 저기 교수대 위에 달려 있다. ) 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란 주제의 개념도 바로 '십자가의 신학'을 주창키 위한 것이었으며,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기도를 도외시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그리스도는 그 고통의 십자가를 고독히 지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려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사랑! 이 은혜! 白骨難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사랑하시는 獨子를 죽게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가 참혹하고 힘든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저 힘들어요."라고 울음을 터트릴 수 있는 신앙. 그리고 기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면 인생에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주님처럼 버림받는 순간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지 않고, 우리와 함께 괴로워하시면서, 연민에 찬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죠! 이런 신앙과 기도의 삶이 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 그리스도를 죽게 했기 때문입니다.

 

4). 결론: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그렇게 처참히 고통 속에도 하나님은 묵묵히 부답(不答)하셨고, 그처럼 천지간에 고독과 외로움에 몸부림 처도, 하나님은 한 마디 위로(慰勞)의 말씀도 없었습니다만, 이 모든 아픔이 인생들을 위한 속죄(贖罪)의 대업(大業)으로 하나님은 함께 고통 하시면서 얼굴을 돌리시고, 독생자 아들을 외면하시면서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키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經綸)이었던 것입니다. 白骨難忘의 은혜를 지속해서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