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10. 신앙생활의 은근성

solomong 2025. 11. 13. 12:14

 

신앙생활의 은근성

(본문: 마 6:1~18)

 

1). 서론: 고려조 작사미상의 '가시리'란 시조가 있습니다: 가시리 가시리 잇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 잇고 / 잡사와 두어리마는, 선하면 아니 올셰라/ 셜온 님 보내옵나니, 가시는듯 도셔 오쇼셔. 1연은 사랑하는 임을 떠나 보내야 하는 슬픔, 2연은 버림받을 경우, 외롭고 쓸쓸한 삶을 두려워하는 심정을 노래합니다.이어서 3연은 임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 떠나는 임을 잡지 못하는 여심(女心)을 드러낸 후, 4연은 홀연히 떠난 임이 곧 돌아오시기만을 애처롭게 호소하는 것으로 시상(詩想)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현대문으로 상세히 감상해 봅시다. 가시겠습니까,(진정으로 떠나) 가시겠습니까? (나를 버리고) 가시겠습니까? 나는 어찌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생각 같아서는) 붙잡아 둘 일이지마는 (혹시나 임께서 행여) 서운하면 (귀찮아 마음이 토라지면, 다시는) 아니 올까 두렵습니다. (떠나 보내기) 서러운 임을 (어쩔 수 없이) 보내옵나니, 가자마자 곧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총총히) 가시는 것처럼 돌아서서 오십시오.돌아가신 자칭 국보 1호라고 하던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는 이 '가시리'를 평하기를 한국 여인의 '은근과 끈기'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사 사랑하는 임에 대한 정한(情恨)이 '은근과 끈기'로 애달프게, 가슴아프게 이런 정절(貞節)을 토하거늘, 하물며 우리 주님에 대한 우리들의 삶에서 기개야 물어 무삼하겠습니까마는, 우리도 주님에 대한 신앙 생활에서 이런 절개를 가지고, 은근과 끈기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 바리새인들의 종교 생활의 결함은 그들의 의가 사람들에게 보이고, 자랑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독신자의 새 생활의 의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상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 하에서 구제, 기도, 금식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1). 신앙 생활도 은근과 끈기

 

여기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한 가지 더 미리 생각해 둘 것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외식적 종교 생활의 조목을 공격하셨지만, 그 자체를 공격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릇된 구제나, 기도나, 금식 등을 책망하신 것이지, 구제하는 것, 기도하는 것, 금식하는 것, 그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것이 신앙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될 때, 이렇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유대인은 외경 <토비트> 편에 '자비는 죽음에서 구제하고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라는 말씀에 입각하여 구제사업을 강조한 것은 좋으나, 그 구제란 것은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외식적이며 대인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 선전적이었습니다.

 

당시 비가 오지 않아서 가물 때에 하나님께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에는 백성들을 모아서 거리와 장터에서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운집한 많은 군중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서 구제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유대 사회에 주님께서는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며 은근한 구제를 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자기 기억에도 남지 않게 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자의식과 자기 만족이 과시의 근본인 것을 생각할 때, 구제를 하고도 '구제를 하였다'는 의식이 없는 사람이 참 구제자일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란 말씀은, 하나님은 밀운(密雲) 중에서 뇌성으로 대답하시는 것이나(출 19:16~19), 전장에서 화병거 중에 계신 것을(왕하 6:17)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2). 기도의 무게를 다지는 하나님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고 여러 모양으로 계십니다. '은밀한 중에서 보시는' 것은 하나님은 구제의 대상으로 은밀한 구제를 장려하신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은밀한 구제를 장려하신 것은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하신 말씀과 일견 모순되는 듯합니다만, 실은 오히려 일치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주경가 부루스(Bruce)는 "숨기려는 시험을 받을 때는 나타내고, 나타내려는 시험을 받을 때는 숨기라"고 하였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은밀한 구제가 빛을 비취는 내용이며 방법이라고 봅니다.

 

구제에 대한 교훈과 같이 '기도'에 대해서도 먼저 유대인의 그릇된 외식적 태도를 경책하고, 이어서 참 기도의 양태를 보입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서 기도하는 법이 있었고(행 3:1,눅 18:9~14), 또 대략 포로시대를 전후하여 생긴 형식으로 하루에 3차례 기도하는 법이 있었습니다(단 6:10, 행10:9). 만일 이 기도의 시간이 외출 때면, 길가에서 그대로 기도하고 또 기도 잘하는 사람을 칭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일부러 기도시간이 되면 길가에 나가서 기도하는 외식스러운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외식자란 희랍원어는 '후포크리테스'인데 그 뜻은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배우이며, 더 나아가서 위선자를 의미합니다. 데.윗트(De Wette) 주경가의 말처럼 "배우들은 관중들을 많이 얻기 위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녔다"고 하였습니다.

 

인도교나 무슬림교에서도 항구와 큰 길가, 또는 지붕 위에서 관중을 향하여 기도하는 법이 있다고 합니다만 종교란 것은, 이와같이 외식적 대인적(對人的)으로 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서서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의 보통 기도의 양태였고, 성서에는 이 외에 꿇어하는 기도(눅 22:41, 엡 3:15), 엎드려 하는 기도(에스라10:1) 등이 있습니다.

 

첫째는 보통의 기도, 둘째는 간구의 기도, 셋째는 자복의 기도를 교훈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 반대하신 것은 일상의 규례적 기도 생활 자체가 아니고, 그들의 외식적인 태도였던 것입니다. 골방이란 곳은 자기만 알고, 하나님만 아시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장소이며, 문을 노크하는 것은 막연히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을 끊고(왕하 4:4), 하나님께만 의지하는(왕하 4:33), 마음의 태도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장소에서 외식하는 유대인을 대조하신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말에서 이방인을 대조해서 교훈하셨습니다. 이 교훈을 주신 갈릴리 지방은 이방과 접경이 되어 이방인의 풍속을 잘 알았을 것이며, 산상보훈에서도 세 번이나 그들을 언급하셨습니다(마 5:74, 6:32, 7:7~8) 한편은 타락해 가는 내부적 종교를 경고하시고, 다른 편은 이교도의 잘못을 막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릇 됨은 외식에서 있었던 것처럼, 이방인의 그릇 됨은 '무용의 반복'에 있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던 아데미교도들이 두 시간동안 '크다 에베소 사람 아데미여' 하며 연달아 불렀던 사실이나(행 19:34), "바알이여, 응락하소서"를 반복하던 바알교도나(왕상 18:22), 불교도들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반복하여 백 번이나 불러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나, 다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서장(西藏)에는 큰 광목에다 깨알처럼 기록한 수천자의 기도문을 감고 돌리는 '기도의 수레바퀴'가 있다고 합니다. 저희의 사상은 말을 많이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대상자이시며 기도의 수를 헤지 않으시고 우리 기도의 무게를 다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종교생활에 금식이란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실로 극기의 절정이며, 신앙 정진의 극단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성서에서도 혹은 특별하신 신탁(神託)을 받고자 할 때(출 34:28, 신9:9), 혹은 죽은 자를 위해서(삼상 31:13), 혹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왕상21:27) 금식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주 목요일과 월요일에 2회, 전일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할 때, 등산한 날이며, 후일은 하산한 날이라 하여 금식하였습니다(눅 18:12). 주전 586년에는 그들이 포로된 후는 금식은 비애를 표시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신앙 정진의 표시로 금식은 엄숙한 경의의 대상이 되어야 할 터이나, 유대인들은 이것도 슬픈 기색을 내며 얼굴을 흉하게 하는 형식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요세라는 사람이 있어 금식을 하고는 얼굴을 씻지도 않고, 성전을 방황하면서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였다고 탈무드에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는 조금 금식을 하여서 얼굴이 아직 상하지 않았을 때는 재(灰)를 발라서 상한 얼굴로 보이고자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3). 은근히 주님을 사랑하라

 

"너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신 이 말씀은 금식같은 심각한 종교생활을 하나님 상대로 할 것이지, 사람 상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예수님 자신도 40일 금식하셨고(마 4:4), 또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고 교훈하심으로써 금식의 필요성을 인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금식도 사람이 없는 광야에서 하셨습니다.

 

그 교훈의 말씀은 '신랑이 빼앗기는 날' 즉, 신자의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금식은 사람 상대가 되지 말며, 하나님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정진이란 사람을 상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 상대가 되어서만이 신앙인의 진리 체험도, 또한 그럼으로써 희열도 있겠거늘, 외모화하고 형식화하여 남에게 '종교의 냄새'가 되어서는 오히려 가증한 것이 되겠습니다.

 

금식기도, 철야기도를 널리 광고하여 피차 경쟁적으로 하는거나 금식의 날을 세어서 남에게 광고한다거나 하면, 모두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은밀한 중에 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는 등 대인적으로는 더 명랑한 인간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자 리빙스톤은 참담한 개척자의 온갖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늘 명랑하고 그의 입에서는 유머가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번은 사자에게 습격을 당하여 위기일발에서 그의 하인에게 구출을 당하고 자기 몸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면서, '나의 몸은 나의 모든 사명을 다 하기까지는 아마 불사신인 모양이다.' 하면서 미소를 띄었다고 합니다.

 

3). 결론: 진정한 남여간의 사랑도 은근하고 끈기있게 다함 없는 정을 쏟거늘. 하물며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이 세상에 찾아 오셔서, 오히려 친구가 되자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여 그 몸을 던져 죽기까지 하셨거늘,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은근히 주님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내 이웃을, 가련한 형제를 사랑해서 아름다운 미덕을 그 분만이 아신다면 더 바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로는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으로 주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우리 집 문을 노크해 오신다고 했습니다.(마25:45) 그래서 우리는 은근과 끈기있는 신앙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2007. 12. 10.

山下연구소장: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