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109. 야고보 형제의 공명심

solomong 2025. 11. 7. 10:37

 

109. ​야고보 형제의 공명심

(본문: 마20:20-28, 막10:35-45)

 

1). 서론: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고사명언의 뜻은,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서로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 생각이나 이상이 다르거나 겉으로는 함께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3번째로 수난의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같이 지금 예루살렘 상경(上京) 길에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비장한 각오로 메시아로서의 속죄의 대업을 완성하시려는 그 길목에서, 야고보 형제를 비롯한 제자들은 아롱진 연분홍 장밋빛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나간 3년간 그렇게도 당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털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쳤건만, 철부지한 야고보 형제를 위시해서 제자들을 바라보실 때, 주님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 했다고 봅니다. 주님은 죽기 위해서 가는 길이고, 제자들은 더 잘살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 속에서 오늘의 우리들 자신의 실존을 투영시켜서 철저히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①.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마4:21) 그녀의 이름은 살로메이었습니다.(마27:56, 막16:1) 마가복음에 의하면,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좌우정승 자리를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모자(母子)가 동시에 청원했다고 봅니다. 살로메는 성모 마리아와 자매간으로 친인척지간이란 가까운 관계라는 것 때문에, 이런 특청을 했다고 하겠습니다.

 

②. 야고보와 요한-처음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며, 베드로와 더불어 12제자들 중 특히 예수님의 신임을 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심복(心腹)들, 친위대(親衛隊)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화산상에 동행(마17:1)과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하러 가실 때 동반자들(마26:37)이었습니다. 베드로, 야보고와 요한은 특히 중요한 일에 예수님께서 동반하시었습니다.

 

③.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우의정과 좌의정의 정승자리는 가장 친근하고 왕 다음가는 영광의 자리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7절에 베드로가 제자의 길을 천명한 말인,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까.”라는 보상을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답변으로 말씀하신 것(마19:28)을 기억하면서 이런 요구를 했다고 보겠습니다. 또한 메시아가 오시면 지상의 왕국을 세우고, 메시아 통치시대가 도래한다는 유대인들의 다윗 왕국과 같은 일반적인 개념을 제자들은 연상하고서 공명심(功名心)에 들떠 있었던 것입니다.(행1:6)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신천지(新天地)의 시작은 세상의 종말 이전에 메시아의 고난이 선행되고, 그 이후에 오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야고보 형제나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은 종말적 메시아왕국 이전에 있을 고난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여하간, 야고보 형제의 요구는 인간의 허무한 공명심에 연연했던 것입니다. 야고보 형제가 요구한 좌우편은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였던 것이었다.

 

④. “나의 마시는 잔”-잔(ποτήριον-포테-리온)은 ‘잔’이나 ‘세례’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즉 고난, 죽음, 순교 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잔’은 왕이 하사(下賜)하는 영광의 경우(시23:5,116:13)와 하나님의 진노(시75:8, 사51:17, 22, 렘25:15, 겔23:33), 즉 고난을 표시하는 경우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후자를 두고 물으셨고, 야고보 형제는 전자를 두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서로 상반된 문답이었습니다.

 

⑤. 열 제자가 듣고 분히 여기거늘-야고보 형제를 제외한 제자들도 꼭 같은 공명심이 있었고, 그래서 시기심이 나서 분히 여긴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같은 수준에 있었다고 보겠습니다. 이런 불순한 욕심이 언제나 신앙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⑥. 대속 물(λύτρον)-가장 중요한 낱말입니다. 이 낱말은 신약성서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본문에서만 나옵니다. 이 낱말의 어근(語根)은 <λύω>로써 “푼다, 놓아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만족을 주었다는 것입니다.(만족 설)

 

3). 본론(Context): 로마 학정에 시달려 온 이스라엘은 오매간 그 옛날 다윗 왕조의 재현을 꿈꾸어 오던 그런 역사적 정황이었습니다. 갈릴리지방은 시골 촌구석 서민들이 사는 곳입니다. 추억도 새로운 갈릴리호수가 고기잡이로 하루하루 호구지책으로 살아온 베드로, 야고보 형제 등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배와 그물을 던져 버리고, 하물며 혈육의 정마저 뒤로 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이들이었습니다. 일개 어부들이 일약 메시아 왕국의 심복 제자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 3년간의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세월 속에서 이들은 엄청난 사건들을 접하면서, 스승의 뒤만 잘 따르면 훤한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려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아니고 3번씩이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상경하면 수난과 고난이 기다린다는 예고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흘려버렸습니다.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 그 흉용한 바다도 잔잔케 하시면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의 능력에 감탄과 자신들의 어깨가 절로 으슥해 지기도 했던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서에는 야고보 형제의 어머니 되는 살로메가, 마가복음서엔 직접 야고보 형제가 예루살렘에 상경(上京)하여 왕으로 등극하시면 좌우 정승 자리에 오르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심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고서, 우리 속담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치 국물을 먼저 마시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신천지(新天地)의 시작은 세상의 종말 이전에 메시아의 고난이 선행되고, 그 이후에 오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야고보 형제나 이스라엘이 오해한 것은 종말적 메시아왕국 이전에, 있을 고난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여하간, 야고보 형제의 요구는 인간의 허무한 공명심(功名心)에 연연했던 것입니다. 야고보 형제가 요구한 좌우편은 두 강도가 달린 십자가이었던 것입니다. 종내 그렇게도 기대했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처참하게도 십자가 형틀에 메이는 것을 보자, 이들은 산지사방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고하면서 도망가고 말았지요.

 

요한복음서 21장에 의하면, 이들은 주님과 함께 했던 시공(時空)들이 한갓된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고 하면서, 갈릴리 해변 그 옛 터전에서 고기잡이로소일 하던 어느 날, 부활하신 주님과 재회 상봉을 하게 되었고, “내 양을 먹이라.”는 위대한 소명과 더불어 스승을 배신했던 자신들의 부끄러운 형색을 처절한 반성과 회개의 눈물 자국으로 점철된 시공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행1:4-5)는 유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형제 등의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신앙적 환상을 잃어버리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진 뒤안길에서, 다시 신앙적 환상과 열망으로 합심 단결하여 기도한 결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게 되었지요. 이리하여 제일 처음으로 야고보는 좌우정승이 아닌 아그립바 2세인 헤롯왕에 의해서 장엄한 순교를 했고, 그 동생은 고난의 역정을 헤치면서 밧모 섬으로 유배를 가서 고난 속에서 주님의 거룩한 계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데, 야고보 형제가 공명심에 들떠서 예수님께 좌우정승을 요구한데서부터, 주님 말씀의 진의를 깨닫고, 종내 참 제자의 길을 순교로써 마감한 삶을 위에서 잠시 언급해 보았습니다. 야고보 형제가 철부지한 응석을 부렸던 말을 듣고 답변한 주님의 말씀은 <고난의 잔>에 대한 교훈이었습니다. 야고보 형제가 생각한 ‘잔’은 왕이 하사(下賜)하는 영광의 경우(시23:5,116:13)로 오해했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훈의 진의(眞意)는 하나님의 진노(시75:8, 사51:17, 22, 렘25:15, 겔23:33), 즉 고난을 표시하는 경우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만왕의 왕으로서 하사하시는 영광스런 ‘잔’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진노의 잔이요,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고난의 잔’의 의미를, 마침 이 주간이(2017. 4. 9~15) 고난 주간이기에 다시금 지금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목사들과 성도들이 실존적으로 가슴깊이 되새김질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실낙원 이후,살인자 카인의 후예들로서, 노아의 홍수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연민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하늘에 닿게 하려는 교만스런 바벨탑 건설, 의인 10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430년간의 애급의 노예생활에서의 구원, 바벨론 포로의 삶 및 로마 식민지 종살이, 이 모든 고난의 역정의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사53:1 이하) 이는 ‘너’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너 대신 지는 짐이라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서 멸시받고 모욕을 당하고, 너의 벌을 대신해서, 너의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해서, 노예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그’와 ‘너’가 누군지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 오늘날 우리들의 해석으로는 ‘그’는 예수님이요, ‘너’는 지금의 우리들 자신들이요, 넓게는 이스라엘 민족을 포함한 온 세상 사람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야고보 형제가 주님께 요구한 것은 사사로운 영광과 명예이었으며, 열 제자가 이를 듣고 분히 여긴 것을 보아서, 그들도 꼭 같은 공명심이 그들의 내심에 잠재해 있었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설령 제자들이 그 당시 주님의 고난을 대충 이해하여 진심 어린 마음으로 감내하는 고난의 동참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흉내라도 내어서 당하는 고난이었을지라도, 비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하는 차원 높은 것임을 의식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달게 받는 고난 그 자체는 성스런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신인(神人)간의 죄로 말미암아 불화(不和)된 것을 화해시킨 십자가의 고난은 제자들과 지금의 우리를 죄의 노예 상태에서 풀어서 해방시킨 것 일진데, 우리 역시 이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에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교회와 사회를 섬기는 참 봉사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심각히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주 듣는 말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축복과 은총의 삶을 살게 된다.’는 성공의 기독교라는 선포를 강단을 통한 목사의 설교와 복음 선교자의 외침에서 듣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죄에서 사죄와 해방을 받았기에 그 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성스런 <섬김의 고난>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잊고서 하는 선언(宣言)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 고난의 유산을 기꺼이 받겠다는 차원 높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후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너는 어찌하여 내가 물려 준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호의호식하고 왔느냐”물으시면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4). 결론: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야고보 형제처럼 공명심에 들떠서 축복과 성공의 복음에만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심정부터 가져야하겠습니다. 인간실존의 처참했던 모습을 직시(直視)해 보건데, 에덴동산을 쫓겨난 이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원죄와 자신들의 범죄로 불화관계에 놓였던 상태를 하나님께는 만족하게 하시고 인간들에게는 죄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代價)를 지불하여야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대속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만족케 하여 우리들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만강에 넘치는 감사의 심정으로, 일찍이 사도 바울이 고백한바와 같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라는 마음으로 섬기는 교회와 사회생활 속에서 구속 은총에 보답하는 심정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아픔의 봉사가 있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과정이 실패의 쓴잔을 마실 때도 있을 지라도, 쓰디쓴 고난의 잔을 통한 '신앙의 환희'를 맛보는 우리 주님의 종들이!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