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범죄 한 여인을 보는 시각
(본문: 요8:1~11)
1. 서론: 악성 베토벤은, 한번은 하루 종일 먼 거리를 여행하고 어느 성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성주(城主)가 저녁 대접을 잘하고 위대한 음악의 연주를 듣기를 원해서 베토벤에게 청을 하고는 저녁에 음악회가 있다고 선전하였습니다. 베토벤은 먼 거리에 여행을 하고 저녁밥을 먹고 나니, 연주보다 잠을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주는 사정도 모르고 연주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글을 성주에게 남기고 그 성을 그날 밤 떠나고 말았습니다. "성주님! 당신 같은 사람은 매일 태어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천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사람이요, 사람 잘못 보았소!"라는 글이었습니다. 성주는 권력을 실어서 인간을 보았습니다. 베토벤은 자기의 천재적인 예술의 시각으로 성주를 보았습니다.
베토벤은, 또 한 번은 유럽의 성악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심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1등을 한 어떤 여인에게 "당신 노래는 훌륭했습니다. 어느 날 누가 당신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다면, 당신의 노래는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요."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 경우는 베토벤의 말은 인생 고뇌를 통한 생철학(生哲學)의 견지에서 인간을 본 시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종(忍從), 그것은 괴로운 인생의 안내자다."라는 유명한 말은 청각을 잃고서 얻은 위대한 악성 베토벤의 경험에서 나온, 자신이 자기를 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여기에 예술의 시각도 아니고, 철학의 견지도 아니고, 자기 뼈아픈 경험에서 본 시각도 아닌, 전혀 다른 인간을 보는 한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었습니다. 오늘의 설교는 예수님께서 ‘범죄한 여인을 보는 시각’이란 제목으로 묵상해 볼까 합니다.
2. 본론(Text): ①.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8:6)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여인을 돌로 치도록 유도해서, 예수님의 평소 사랑의 정신에 배치가 되도록 하고,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위반 하는 자로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좌우간 예수님을 피치 못할 교활한 Dilemma로 빠트리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마22:18의 경우와 비교)
②. “시험함 이러라.”(πειράζοντες) - (요8:6) -예수님께서 만일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면, ‘로마정부의 허가 없이 유대인이 마음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금지한 '로마의 법률'을 어기는 것이 되고, 또한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이는 '모세의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를 겨냥한 시험이었습니다.
③.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8;6) - 여기에 “쓰시니”(κατέγραφεν) -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아마 이 여인의 죄상을 즉시 지워버릴 수 있는 성전의 낭하 먼지 위에 쓰셨다고 보여 집니다. 사람은 우리가 범죄 할 때, 그 죄상을 역사에 기록하고, 신문 잡지 등에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지워 버리기 쉬운 먼지 위에 쓰신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죄상을 자기 자신 위에 기록하고, 당신 자신의 피로서 이것을 씻어 속죄의 죽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신 것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보시고, 침묵을 통한 들뜬 감정을 냉각시키고 이성을 되찾아 보자는 심정에서 그들에게 無言으로 답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영국 격언에 “침묵도 또한 답인 것이다.”란 말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셨다고 보겠습니다. Jerome이란 성서 주경학자는 이 때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글은 여인을 송사한 자들이 범법한 죄목이었다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④.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 아무도 기대하지 못한 회답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모습을 여기서도 엿 볼 수 있습니다.(마5:17) “죄 없는 자”(ὁ ἁναμάρτητος)란 이곳에서만 나타나는 말로서, 단지 범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 지을 욕망까지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8:11)- ‘정죄’(κατακρίνω)란 말도 공관복음에 자주 나타나는 용어로서(9 차례 사용), ‘심판’(κρίνω) 보다 는 가벼운 말씀입니다. 그것은 죄로 규정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정죄도 하지 않는 선고유예(宣告猶豫)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寬容인 동시에 그녀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갱생을 당부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3. 본론(Context): 욕정의 거리에서 향락에만 들떠 달려온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은 마침내 예수님 앞에 끌려 나오고 말았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완전히 무시를 당한 채, 개처럼 강제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억울해 한다거나 분노할 만한 여지도 없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여인은 뭇 군중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 끌려 나왔습니다. 관능을 자극하면서 육체를 향락하는 것만이 삶의 목표라고 우겨대던 자기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 어떤지를 심판 받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녀의 모든 걸어온 자취는 하나하나 공개될 것이며, 허다한 흑막과 밀어(密語)는 모조리 공개될 찰나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일 경우'는 약혼녀가 간음을 행할 경우 현장에서 그냥 돌로 쳐서 죽이라고 구약 신명기(22:23~24)에 기록된 것을 근거해서 한 말입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돌에 맞아 죽여야 할 탕녀라고 말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유대 군중은 벌써 마음으로 이 여인을 죽여 놓고 본 것입니다. 살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고 이미 못을 박았습니다. 군중들의 마음에 이 여인은 이미 죽은 창백한 시체였습니다. 그녀 자신도 완전히 삶을 체념하였습니다. 더는 기대도 희망도 없습니다.
도피처도 없습니다. 요행도 바랄 수 없습니다. 그냥 돌에 맞아 찢어지고 깨어져야 할 하나의 고기 덩어리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무리는 와글와글 들끓고 있었습니다. 극도로 흥분된 상태에서 분노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이런 인간은 속히 처치해 버려야 한다."고 주먹마다 돌을 들고 씨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이 된 일입니까? 이 만고에 다시없는 죄인을 향해서 달리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랜 침묵을 깨트리고 묵중한 말씀으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아우성치는 군중의 심판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동안 못 보신 척, 못 들은 척, 무엇인가를 땅위에 쓰는 주님의 손가락은 종내 이 여인을 향해 투석 명령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글을 쓰셨다는 것은 감정을 냉각시키고, 이성을 되찾자는 주님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춘기의 청소년은 자주 낙서를 잘합니다.
산에 가면 큰 돌에 자기 이름을 새기기도 하고, 벽이 있으니 거기에 낙서를 합니다. 흰 종이에 낙서를 합니다. 이것은 사춘기의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은 자기들의 감정을 발산하는 한 심리적인인 적응기제(適應機制)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성을 되찾은 군중들은 어른에서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다 슬금슬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돌로 여인을 칠 자신이 없기에 사라졌습니다. 주님의 밝은 빛 앞에서 들뜬 감정이 냉철한 이성으로 바뀌고, 무딘 양심이 맑은 양심으로 변화를 받아 돌로 칠자는 여인이 아닌, 저마다 자기 가슴을 쳐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사라졌다고 하겠습니다. 결국 예수님 앞에 여인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강풍의 회오리바람이 한차례 밀려간 뒤 대지엔 고요한 정적만이 있었습니다. 필자는 성서의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한 음악이 생각나곤 합니다. 그것은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No. 6. '비창'의 1악장 끝부분 트롬본 소리, 마치 '다 끝났다. 다 끝났다' 하는 느낌과 북소리, '큰 강풍에 그간 쌓은 벽돌집이 허물어지는 소리와 폐허의 잿더미' - ‘세미한 바이올린 소리’- 슬픔과 절망에서 고요히 희망의 빛을 갈구하는 뜻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때 이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머리는 산발로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머리카락이 뽑혀지고, 옷은 갈기갈기 찢겨서 너덜너덜하고, 갖은 수모와 곤욕을 당한 창백한 얼굴(사실은 이것으로 그녀의 죄 값은 다 갚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주님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라고 하는 체념적인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실존 철학자의 "숲이 우거져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너무나 무성했던 인생 때문에, 그가 보아야 할 인생은 가려진 채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무성했던 인생의 꽃잎이 완전히 떨어진 지금, 이 가련한 인간은 비로소 진리를 응시하며 하나님과 마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묵중하신 주님의 입이 열렸습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결코 이 여인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변호의 말씀이 아닙니다.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간의 가치가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Nathaniel Hawthorne의 작품 중, '데이빗드 스원'(David Swan)이란 글을 보면, 노부부가 잠자는 소년을 보고 아주 잘 생겨서, 소년이 깨면 아들을 삼겠다고 데리고 가려는데 기다리던 마차가 와서 그만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년에게는 좋은 행운의 기회가 왔으나 잠으로 인해 기회를 포착치 못 했던 것입니다. 행운의 기회(Opportunity)를 잃어버렸다는 교훈을 주는 것으로 삶을 묘사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 나쁜 사람들의 군상을 연상해 봅니다. 인간을 보는 다른 시각으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와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어찌했든 선악 간의 판단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하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여인의 죄가 그렇게 쉽게 탕감되었느냐고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이 끌려온 순간부터, 이 최후의 탕감선언 직전까지 예수님께서 겪으신 무거운 '침통한 아픔'(*時差의 간격이 있었지만, 이미 침통한 이 아픔은 속죄주요, 메시야로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아픔을 미리 앞당긴 아픔! 이었습니다.)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죄의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조율시키는 십자가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면 이 여인의 죄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아픔을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내심으로 아파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유복자인 사랑하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과 삶의 의미는 자식의 성공만 기대했는데 그 아들이 죄를 지었다면, 이때 가장 아픔을 느끼는 자는 어머니인 것입니다. 아픔은 사랑이 기하급수로 커지게 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죄에 대한, 실패에 대한, 고통과 아픔은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포는 나약한 동정이 아니요, 실속 없는 공포탄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에 근거한 산 능력의 복음입니다. 이 사실이란 곧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픔이며, 예수님의 아픔입니다. 이 십자가의 아픔 앞에 설 때, 인간은 비로소 죄를 아파할 줄 알게 됩니다.
이 아픔을 아파할 줄 알 때, 정의와 사랑의 조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픔이요, 아픔은 사유요, 사유는 사랑이요, 사랑은 복음입니다. 이럴 때 주님의 연민의 눈길은, 연민에 찬 시각은 우리를 향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을 보는 주님의 시각에 우리는 감읍(感泣)해야 할 것입니다.
4. 결론: 이 가련한 여인은 비로소 진리를 응시하며 하나님과 마주 대면하게 되었을 때, 묵중하신 주님의 말씀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다시는 범죄 하지 말라."고하셨습니다. 이는 결코 이 여인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변호의 말씀이 아닙니다.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간의 가치가 완전히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한 가지 필수조건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죄가 그렇게 쉽게 탕감된 것은 이 여인이 끌려온 순간부터, 최후의 탕감선언 직전까지 예수님께서 겪으신 무겁고, 침통한 아픔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조율시키는 십자가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인을 정죄하지 아니 한다.’면, 그러면 이 여인의 죄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픔이며, 예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아픔 앞에 설 때, 우리들은 비로소 죄를 아파할 줄 알게 됩니다. 이 아픔을 아파할 줄 알 때, 정의와 사랑의 조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픔이요, 아픔은 사유요, 사유는 사랑이요, 사랑은 복음입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 범법한 여인을 연민에 찬 시각으로 본 것처럼, 우리를 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시각에 우리는 만강(滿腔)에 넘치는 감읍(感泣)을 해야 할 것입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14. 때의 고민 (1) | 2025.12.03 |
|---|---|
| 113.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1) | 2025.11.28 |
| 111. 明暗이 交叉하는 인생 (0) | 2025.11.16 |
| 110. 신앙생활의 은근성 (1) | 2025.11.13 |
| 109. 야고보 형제의 공명심 (0) | 2025.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