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마7:6, 막1:24, 6:20, 눅1:35, 49)
1). 서론: 1896년 영국의 막스 비어봄(Max Beerbohm)의 풍자소설, 「행복한 위선자」(The Happy Hypocrite)는 비양심적인 악인 로드 죠오지 헬(Lord George Hell)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음뿐 아니라 행동에도 야비함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그의 얼굴만 보아도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름답고 순결한 ‘제니 미어’라는 소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얼굴이 저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어!” 하고 그를 거절했습니다. 로드 죠오지 헬은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고심한 끝에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인자하게 보이는 가면을 쓰고 제니 미어에게 청혼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결혼하게 된 그는 날마다 그의 위선을 감추고 참을성 있게 너그럽게 보이려고 힘썼습니다. 좋은 사람같이 보이려고 끊임없이 그의 나쁜 성질을 억눌렀습니다. 어느 날 과거 술친구이자 연인이었던 ‘겜블’이라는 여자 친구가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로드 헬의 가면을 무자비하게 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면이 벗겨졌을 때, 거기에는 거룩한 얼굴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얘기는 풍자소설이지만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줍니다. 사람은 날마다 노력했던 만큼의 선하고 거룩한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거룩한 모습의 인격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맹자’가 한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구가이불귀, 악지기비유야(久假而不歸, 惡之其非有也).” 즉, 오래도록 인자인 척하면, 그가 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성품도 오랫동안 가장하고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수사도 베드로는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벧전 1:16, 레11:44)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 살고 있는 현대 기독자들은 "거룩" 혹은 "성결"의 개념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 속에 많은 세속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聖)과 속(俗)의 구별 기준이 모호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거룩의 개념과 거룩의 실상(實狀)에 대하여 살펴보고 우리의 삶과 신앙을 새롭게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거룩’의 의미-‘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קדשׁ)>는 구약성서에 약 850여회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결하다"(to purify), "깨끗하다"(to be clean) “구별하다”라는 뜻인데, 이 낱말의 원래의 의미는"휘장"이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곳에 휘장을 치면, 그 휘장에 의해 휘장 안과 휘장 바깥이 구분되지요. 구약성경의 성막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뜻입니다. 신약의 헬라어로는 하기오스 (ἅγιος)인데, ‘거룩’이라는 명사 형태가 되면 하기오스모스 (ἁγιοσμός)이며, 이는 모두 ‘거룩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인 하기아조(ἁγιάζω)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②.본문의 의미-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것의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과 교회의 존엄성 등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보존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복음은 모든 자에게 전해져야 하고, 교회는 누구와도 대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직자의 성성(聖性)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개와 돼지>는 부정한 동물들로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가리킨 대명사이었습니다.(마15:26) 그러면 본문의 함축된 뜻의 개는 배교자, 복음을 혐오하는 자라면, 돼지는 욕심에 사로잡힌 육의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성서 말씀에는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돼지 코의 금 고리와 같다.”(잠11:22-Beauty in a woman without good judgment is like a gold ring in a pig's snout.) 라고 하였고,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5-46)라고 복음의 뜻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는 의지(意志)의 죄인을 대표한다면, 돼지는 육(肉)의 죄인을 상징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막 1: 24, 눅 1:35, 49절에 나오는 ‘거룩한 자’라는 칭호는 모두 예수님께서 Messiah 되심의 성격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막 6:20절엔 헤롯이 세례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서, 요한을 죽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육욕 사이에서 방황하는 헤롯의 묘한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롯이나 헤로디아는 똑같이 육욕에 침윤된 악인들로서, 육욕이 양심의 지시보다도 더 압도당한 자들이라면,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위대한 삶과 사명을 대비한 말씀의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③. ‘거룩’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개념-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거룩”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거룩한 사람(제사장)과 장소(지성소), 시간(명절과 절기)과 물건과 음식물(정결하다고 주장한 물건과 음식물)등이었으나, 신약의 복음 시대에는 엄격한 성(聖)과 속(俗)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구약과 신약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예수의 피 흘림”의 유무(有無)에 있습니다.
즉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와 예수의 보혈의 차이는 그림자와 실체의 차이인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만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구약에서도 피 흘림이 있었지만, 그것은 매년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피 흘림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게 되었으므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7- 20)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근본적 차이인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거룩하다’에 대한 어원적 뜻은 ‘정결하다’, ‘깨끗하다’, ‘구별하다’는 의미에서 ‘다르다’ 및 ‘진지하다’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약적인 성. 속(聖. 俗)을 갈라놓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이 ‘구별하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이나 성품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고,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도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별되게 사는 것이 곧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세속화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언행(言行)과 사고(思考)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고,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분명한 구별이 없이 사는 자는 세속화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날이 같지만, 주일(主日, 일요일)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날입니다. 엿새 동안에는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하루는 자신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날입니다. 그래서 ‘성일(聖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은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하나님을 위해 쓰려고 구별한 건물입니다. 그래서 ‘성전(聖殿)’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목사, 전도사, 장로 등의 직분은 세상의 직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성직(聖職)’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특히 구약의 제사장 같은 직무를 가진 목사를 성직자(聖職者)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代言하는) 목사에게 직무수행이나 그의 삶이 거룩해야 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선포하는 자세는 기도하고 묵상하는 중에 성령께서 오묘한 진리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을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지극히 귀하고 오묘한 비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세는 정중하고 진지해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오묘한 진리를 공개하여 선포하는 자세가 그렇게 경박할 수가 있겠습니까! 꼭 comedy 배우 같습니다. 강단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면서 괴성을 지릅니다. 거룩의 모습은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 가 없습니다. 각성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심은 아주 귀한 복음의 보배로운 진주를 웃기기나 하고, 복 받으라고, “아멘”을 강요 하면서, 생각 없이 그렇게 헐하게 쉽게 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중한 자세와 삶 전체를 거는엄숙한 결단 없이 주고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 진주를 산다.”것은 광장한 모험이요. 엄청나고 진지한 결심 끝에 나온 대결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 재산’보다 ‘진주’가 더 고귀하고 값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 ‘거룩하다’란 말의 ‘코데쉬’나, 신약의 ‘하기오스’는 속된 것에서 분리하여 구별한다는 것 일진데, 인간(성직자, 성도) 자신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內面)의 더럽고 속된 인간성과 정욕의 찌꺼기를 끊임없이 벗겨내고 씻어내어, 자신 안의 거룩함 자체이신 하나님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주인 노릇을 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정화시키는 작업이 바로 자신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 자체가 구별(區別)되고, 진지(眞摯)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통치하실 때,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김 중권 장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김 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김 장로에게 비서실장을 좀 해 달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저는 안 됩니다. 저는 노태우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이고, 제가 또 영남 사람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서실장은 대통령과 고락을 같이 한 사람이 해야지, 저는 전혀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그 자리를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했는데도 “꼭 해 달라”고 하시더랍니다. 계속 거절했더니 대통령께서 집에까지 찾아오셨답니다.
그러니 더 이상 거절을 못 하고는 “정 그러시면 한 가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나는 장로입니다. 주일은 교회에 가야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를 부르시면 안 됩니다. 이 날은 하나님이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서실장을 해야 합니다. 나는 매 주일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을 허락해 주시면 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받고 대통령 비서실장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 중권장로의 거룩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고,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도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하기에 하나님을 닮아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거룩이란 낱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내면적으로 정결해야하고, 외면적으로는 구별되고 진지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구약적인 성. 속(聖. 俗)을 갈라놓는 의미가 아니라, ‘거룩’이 ‘구별하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고,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이나 성품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고,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도록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별되게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본 받아 거룩하게 사는 것이 됩니다.
특히나 구약의 제사장 같은 직무를 가진 목사를 성직자(聖職者)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代言하는) 목사에게 직무수행이나 그의 삶이 거룩해야 한다는 뜻에서, 일반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와도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목사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인도하는 직책에서 구별되고 말씀 대언하는 태도가 과연 진지(眞摯)한가를 깊이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선포하는 자세는 기도하고 묵상하는 중에, 성령께서 오묘한 진리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을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지극히 오묘한 비밀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세는 정중하고 진지해야 하겠습니다. 오묘한 비밀의 진리를 선포하는 자세가 그렇게 경솔(輕率)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진중한 자세와 삶 전체를 거는 엄숙하고 묵중한 결단 없이 말씀의 비밀을 주고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서 진주를 사는 것’처럼, 광장한 모험과 엄청나고 진지한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전 재산’보다 ‘진주’가 더 고귀하고 값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세인(世人)과 구별되고 다르면서도, 진지하게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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