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떨리는 영혼
(본문: 시 6:1-10)
1). 서론: ‘영혼’의 개념처럼 분명하지 못한 말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애매한 것이 인간에게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국어사전엔 1. 죽은 사람의 넋, 2. 불교적인 의미로는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의 본원이 되는 실체, 3. 기독교적 의미(Catholic)는 육체와 함께 인간을 이루되, 신령하여 불사불멸하는 정신, 4. 보편적으로 육체와 구별되어, 육체에 머물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마음의 지성소로서, 생명을 부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비물질적(非物質的) 실체, 혼. 이라고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시편 6편은 다윗의 시로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영혼의 고통 가운데서 여호와를 부르며 고침과 건짐을 바라는 탄식 시입니다. 시편 32, 38, 51, 102, 130, 143편과 함께 <참회 시>로, 회개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을 세분하면, ①. 구원을 하나님께 간구함(6:1-5) - 그는 육체적 고통을 안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6:2)- 육체적인 고난 때문에 몰골이 수척하여진 상태가 뼈가 떨리고 있음을 호소하면서 고쳐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②. 다윗 시인의 처참한 모습(6:6-7) -다윗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고통으로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냥 잠이 안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절망이 엄습하므로 고통스러운 불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시나이다.”(6:6) 라고 했습니다. “밤마다”- 원어에는 “밤새도록.”의 뜻입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띄우며”라는 말은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는 말입니다. 원어에는 ‘눈물로 홍수가 났다’라는 의미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눈물을 하도 많이 흘려서 홍수가 났고, 그래서 침대가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나의 잠자리는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얼마나 큰 정신적 절망에서 고통받고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③. 고뇌를 통한 신앙의 확신(6:8-10). 다윗은 영적인 문제도 안고 있었습니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6:3-4) 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인간의 지성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란 마음이나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에 ‘목숨’이라 해도 그 의미를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혼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의 호흡이라는 말로는 의미가 좀 부족합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이 안고 있는 고민은 “내 영혼이 심히 떨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떨린다는 것은 인간이 기초에서부터 온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자기 존재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는 문제를 안고서 힘겨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모습이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6:9)라고 외칩니다.
육체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 영적인 문제가 나를 괴롭혔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고뇌를 통한 신앙의 확신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雪上加霜으로 그의 원수들이 다윗의 경건함이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흐뭇해하면서 조소하는 무리를 향하여,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6:9) 그간 밀어닥친 고뇌의 가락은 사라지고 치솟는 환희와 확신의 가락으로 울려 퍼지게 됩니다.
3). 본론(Context): Paul 서신에서, Paul은 인간의 구성요소를 ‘영. 혼. 육’(靈. 魂. 肉)(살전 5:23)으로써, “...너희 온 영(靈)과 혼(魂)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라고 3분설(Trichotomy)로 되었다고 하고, 몸과 영(2분설=Dichotomy)으로 말할 때도 있습니다.(고전 5:3)
“내가 실로 몸으로(肉體) 떠나 있으나 靈으로는 함께 있어서...”그렇다면, 영은 무엇이며, 혼은 무엇인가. 영(靈)은 ‘퓨느마’ 즉, ‘바람’의 뜻으로 창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生氣, ‘바람’이란 뜻)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영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높고 불멸(不滅)한 것이라면, 혼(魂)은 육적(肉的) 생명과 연관된 것입니다.(죽음을 ‘혼이 떠나갔다’로 표현)
어찌했던, 성서에서 ‘영혼’이란 말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신앙’이란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외부적이고, 육체적인 행동과 관련이 되어 있는가 하면(倫理), 이 ‘신앙’이 외부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내면적인 인격의 깊이에 있는 ‘영혼’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意識, 눅 12:19-20) 사람이 자기 자신과 대화 할 수 있는 독백을 그의 영혼을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너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라는 말씀입니다.
이리하여, 우리가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는 현상 전부를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리 영혼의 귀요, 하나님을 본다는 것도 우리 영혼의 눈이 하는 일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접하는 영적 접촉도 우리 영혼의 촉수를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에 관한 생각을 좀 지루하게 말한 이유는 본문 시편 제6편의 시인(詩人)이 자기가 당면한 현실적 고통을 육체의 문제나 정신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기 영혼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시인이 가진 고민은 그의 “영혼이 떨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이 떨린다는 것은 그 인간 전부가 그 터전에서부터 흔들리어 그의 존재까지도 의심스럽게 된 어떤 극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을 대할 외부적인 인격의 파산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접하는 내면적인 인간 자체의 파괴가 임박한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 시를 시편에 나온 7개의 ‘참회 시’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6, 22, 38, 51, 102, 130, 143. 편 ) 그러나 이 6편의 시(詩) 내용은 죄를 참회하는 문제보다,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낄 만큼 심각한 고난을 체험하고 있는 다윗입니다. 이 시편의 신학적인 문제는 고난을 하는 한 인간의 고난 상태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음에 직면한 고난 속에서도 어떻게 절망하지 않고 ‘신앙’으로 버티고 나아갈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의지(依支) 신앙입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은 육체의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수척하였습니다.”, “사망 중”, “음부”, “탄식함으로 곤핍(困乏)하고”, “내 눈이 쇠하고” 하는 등의 표현은 그의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의 고통은 정신의 것이기도 합니다. “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밖으로 나타나게 하다)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 하는 표현이나, 하나님이 자기의 “곡성을 들었나이다.”(8절) 라는 구절들은 그의 마음과 정신의 비통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육체적, 정신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 영혼이 심히 떨린다.”라고 하는 말이나,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간절히 빌고 있는 것에서 그의 영적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육체, 혼(정신), 영의 삼중(3重)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인이 “행악(行惡)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8절) 하는 말은 불의를 행하고, 악을 행하는 어떤 개인 또는 ‘구릅’의 사람들 때문에 받는 고통이며, 또한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기를 빌고 있는 말은(10절) 그를 괴롭히는 사람 또는 단체가 이 시인의 원수가 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에서 그 원수의 정체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이 원수나 행악자(行惡者)들로 말미암은 인간적인 사건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궁지, 극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야웨! 당신의 분내 심으로(怒)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당신의 진노하심으로 나를 벌(罰)하지 마소서”(1절) 라는 기도가 이 시편의 중심적인 요체라고 하겠습니다.
도스또에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벌’(罰)은 죄 결과의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돈 많은 노파를 죽이고 겁에 질려 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파를 죽인 목적은 돈 때문이었지만, 훔친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바위 밑에 감추어 두고, 그 두려움에 식음을 전폐하고 공포에 질려 영육이 타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의 연인(戀人)인 ‘쇼냐’의 희생적인 사랑과 신앙 안내로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만, 이 작품의 내면적 의미엔 ‘쇼냐’ 삶의 영상은 거룩한 그리스도 속죄사건을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인류의 죄를 지시고 골고다 산상에서 예수님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 27:46) 절규한 말씀은 그만큼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이 얼마나 아팠으며,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贖罪)하는 데는 그만큼 대가(代價)를 희생한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묵상해야 할 문제는 원죄는 물론이거니와 자범죄(自犯罪)에 대한 민감하고 예민한 의식 속에서, 영. 혼. 육이 뼈를 깎아내는 아픔을 느끼고 회심하느냐, 영. 혼, 육이 마비된 상태로 살고 있느냐의 전자냐. 후자냐. 입니다. 영혼의 예민성은 성화(聖化)로 진전되지만, 영혼의 마비성(痲痺性)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비록 기독 신자이면서도, 성직자(목사)이면서도 태연자약하게 사는 모습 속에 오늘의 심각한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찌했던, 진실한 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자에게 (죄에 대한 예민성을 가진 자들)하나님이 주시는 <쓴잔>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 위에서 받는 고통과 비극을 단지 행악자나 악한 인간에게서만 오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의 가시를 위해서 3번 기도(고후 12:7-10)하였지만, 하나님의 응답으로써, “내 육체에 가시, 자고(自高)하지 않기 위해서 약할 때 그때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경건한 자에게도 이런 시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해야만, <떨리는 영혼>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를 괴롭히는 원수라기보다는,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 질고, 비극은 죄 없이 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연단일 수 있으니, 원수들이 비난해도(죄 때문에 오는 고난, 비극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과 연단이다.”>할 수 있을 때, 자신의 원수는 죄 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알게 되고, 원수는 “부끄러워 물러간다.”라는 확신과 주님 주시는 ‘고난의 잔'을 인종하면서, '연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외부적인 고매한 人格의 승화와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고뇌를 통한 신앙의 確信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다윗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범죄로 인하여 정신적인 고통이 그의 육체까지 쇠약하였으며,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때문에 괴로워서 밤새도록 눈물로 지새우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그 결과로 자기 영혼도 떨리게 되었다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몸, 혼, 영, 자신의 ‘전 실존’이 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다윗의 죄상에 대해서는 본문엔 언급이 없지만, <밧세바의 사건>(6, 7계명 犯法)이 아닌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영혼의 처절한 고통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처절한 절규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에 대한 민감하고 예민한 의식 속에서, 영. 혼. 육이 뼈를 깎아내는 아픔을 느끼면서, 끝내 성화(聖化)로 진전하여 환희의 개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그의 원수들이 다윗의 경건이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흐뭇해하면서 조소하는 무리를 향하여,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6:9)라고 하면서 나에게서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그간 밀어닥친 고뇌의 가락은 사라지고, 치솟는 환희와 확신의 가락으로 울려 퍼지게 됩니다. 즉, 원수들이 비난해도(죄 때문에 오는 고난, 비극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과 연단이다.”> 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뼈저리게 드린 간구의 기도는 용서와 사랑으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에 찬 모습에 원수는 “부끄러워 물러간다.”라는 신념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잔'을 인종하면서, '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처절한 절규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죄로 인한 전 실존의 고통과 눈물이 주는 선물은 새로운 삶의 기둥을 세울 수 있는 순간이 되며, 삶의 무게를 툭툭 털어버리고 홀가분한 영육으로 성화 되는 순간이 되도록 합시다. 중요한 문제는 자기 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비록 당시엔 <쓴잔>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이 잔을 인종하면서 받아들일 때, 강함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외부적으로는 사람을 대면할 때 고매한 人格으로 승화되는 모습이며,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고뇌를 통한 신앙의 確信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소유자들이 다 되도록 노력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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