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94. "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 합니다."

solomong 2025. 9. 3. 11:04
 

 

94. "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 합니다."

(본문: 요12:27)

 

1. 서론: 세상만사가 최후, 종국, 마지막이란 등의 말을 하게 되면 심각해지고, 엄숙해 지며, 옷깃을 여미는 경건한 자세가 됩니다. 다시 못 볼 생이별을 하거나, 영원한 고별인 임종의 장면들이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33년의 짧은 지상 생의 종언을 고할 즈음에 당도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베다니 마리아’, ‘마르다’의 자매의 영접을 받으시고, 당신 자신의 장례의 상징으로 향유로 발 씻음을 받으시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셔서, 의미심장한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고난의 잔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까."라는 뜻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인성(人性)을 가지신 예수님의 젊은 죽음에 대한 애석한 통한(痛恨)의 소리라고 하겠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의 나락(那落)에로 추락하는 때의 그 절박하고 나약한 심정을 이해 못하실 것입니다. 인간 누구라손 이런 순간이 있더라도, 그런 실존에 절망하지 않고, 정신을 차려서, "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 합니다."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명제(命題)를 가지고 이 사순절 기간에 묵상되지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론-Text: ①.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지금”(νυ̑ν)의 뜻은 ‘드디어’라는 의미로, 십자가를 앞에 둔 중대한 그 때를 무게 있게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 때의 주님의 마음은 “민망하다”(τετάρακται) 표현한 말씀의 뜻은 ‘소동한다.’(뒤끓게 한다. 혼란케 한다.)는 뜻의 현재완료형으로, 그 고민은 벌써 온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육적 죽음을 전제한 뜻입니다.

 

②. “그러나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겟세마네 동산의 고민의 기도문을(마26:39, 막 14:35~36, 눅 22:42) 전하지 않는, 요한복음의 이 기도문은 공관복음서와 충분히 상통하면서도,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심각한 표현을 하시고 있습니다.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는 것(공관복음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은 완전한 人性을 가지신 주님으로서는 응당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심은 인성의 나약함을 극복하시고, 신적인 장엄성과 사명에 대한 충실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경 학자 Bengel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복종하려는 열심히 만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뒤 따르고자하는 주의 종들과 기독자들은 난국을 맞을 때마다, 이 기도문을 마음에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 말씀인,"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시고는 곧 이어,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순간적이지만, 인간적인 생각을 하시고는 곧 이어 "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 문장 중에 접속사이지만 ‘그러나’ 라는 말이 기독교 신앙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내포된 낱말이라고 봅니다.

 

인간인지라 기독자들도 순간의 유혹을 받거나, 잘못 생각해서 너무나 인간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허나, 마음을 돌이키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러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폴 틸릭히(Paul Tillich)는 '그러나'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라고 표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러나'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엔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말씀과 같은 내용의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이 고민은 십자가보다 더 심각한 고투를 하셨는데,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심적 고통의 아픔을 맛보셨습니다. 그래서 땀과 피를 쏟으셨다고 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거의 비슷한 기사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6:39에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엔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누가복음 22:42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말씀 중에는, ‘지금’이란 말은 ‘νυ̑ν이란 원어로서, “드디어”란 의미이고, "민망(τετάρακται)하다"는‘소동한다.’의 뜻으로, 현재완료형, 피동형인데, 외부로부터 ‘고민꺼리’로 도전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는 "고난의 잔을 받지 않게 하여 주소서"라는 말씀과 상통하는 뜻으로, 인성적인 주님의 한 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와도 상통한 뜻입니다.

 

주님의 인성적인 나약함을 극복하고, 신적인 장엄함을 표시한 주님의 소명의식에 충실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석가 Bengel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열심의 만남(encounter)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난국을 당할 때마다, 이 기도문을 반복하면서 이 때 주님의 장엄했던 그 심정을 항상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것을 거부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지동식 박사), “무슨 말을 하리요”는 주님께서 적합하신 기도의 말씀을 찾는 중에 할 말이 없어서 ‘말문’이 막히시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을 통하여 영광을 얻는다는 이 법칙은,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자연계의 식물에서부터, 제자들을 포함해서, 피조물 전반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얻으리라.”는 것은 자연계의 희생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이 법칙을 도피할 수 있겠느냐. 라는 뜻입니다.(권세열 박사), “이와 마찬가지로 운명에 떨어질 신도들을 생각하여 마음이 설레 임을 금할 수가 없다."(黑崎幸吉)라고 해석했습니다.

 

각종 영역(英譯)의 성서의 말씀을 소개하면, "Now my heart is troubled-and what shall I say? shall I say, 'Father, do not let this hour come upon me'? But that is why I came-so that I might go through this hour of suffering."(Good News B.), "Now my soul is troubled. What shall I say: Father, save me from this hour? But it was for this very reason that I have come to this hour."(Jerusalem B.), "Now is my soul troubled. And what shall I say? 'Father, save me from this hour'? No, for this purpose I have come to this hour."(Oxford B.)라고 했습니다.

 

여기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긴장과 그의 승리를 보이시는 동시에 긴장을 승리로 만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여기서 간단히 주님께서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인간적 갈구와 싸우시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기를 싫어합니다. 더군다나 33세의 꽃다운 청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순종하는데, 괴로움과 희생이 없었더라면, 조금도 훌륭하거나 장하실 것이 없습니다. 참 용기란 무서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용기란 무서워 떨려도 그것을 이기고 담대히 올바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긴장과 승리 사이에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까. 당신의 긴장을 승리로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목소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주님의 일생에 중요할 때마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하실 때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기운 내라!"고 하시지만, 단지 우리의 탈은 그 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애타게 하시지만, 우리가 그 분의 음성을 못 들어서가 아니라, 안 들으려고 하기 때문에 못 듣습니다.

 

외람된 이야기입니다만, 그래서 저의 아호(雅號)를 위 4복음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지공>(志空)이라고 오래 전부터 사용하여 왔습니다. 목사도 비신앙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을 순간순간마다 도전을 받고, 유혹을 받아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의 마음의 비우고, "주님의 뜻으로 채워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에서, "제 뜻은 비우겠습니다."(志空)라고 제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이후에,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독자들이 내 뜻대로 마시고, <그러나>를 외치면서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폴리갑(Polycarp, AD.69-155)은 사도요한의 제자인 이레니우스 말에 의하면, 서머나 감독으로 로마의 박해 하에 순교한 교부로서,“예수님에 대해서 NO!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나의 일생 중, 한번도 NO!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이제 와서, 그 분을 배신하겠느냐." 하면서 장작불에 타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 원리는 순교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있어서 위대한 원리라고 봅니다.

 

그런 정신으로 순(殉)한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뉴욕의 ‘코롬비아 대학교’ 캠퍼스의 아담한 정원에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등근 ‘벤취’에 한국전에서 전사한 동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재학생들은 그 ‘벤취’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서 조국을 위해서 두 주먹을 늘 쥔다고 합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인간과 신앙의 숭고한 발자취를 남기며, 또한 인류나 국가를 발전시킨 자들은 <언제나 소수 이상주의의 그 가슴이 뜨거운 자>들에 의해서 역사발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 실존주의 신학자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지금과 여기"(Now and Here)라는 말입니다. 문호 톨스토이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전개되는 사건과 상황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교회를 섬기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국가사회를 위해 봉사할 때, 당면한(직면한)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합니다."라는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하신 이 말씀의 정신을 따라서, 매일 매일 우리 삶에 있어서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합니다."라는 존재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중요한 위기 때나, 중요한 사건을 위해 결단할 때, 도피하지 말고 "주님 제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합니다."라는 결단적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주님의 이 원형적인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그 고투적인 희생의 말씀과 삶을 따라서, 우리도 순간순간마다 안이하고, 이기적인 삶 때문에, 어렵고 대아(大我)적인 삶을 도피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들로써 "그러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면서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합니다."라는 위대한 결단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