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끝끝내 사랑과 끝까지 부인과 배신
(본문: 요13:1-2, 26-30, 36-38)
1. 서론: 우리는 악한 운명과 싸우다가 마지막 거점이 무너질 때, 끝장이 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亡했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패배를 의미합니다. 하늘같이 귀하게 기르던 외아들이 죽는다든지, 병석에서 암이라는 선고를 받는다든지, 뜻을 같이 하던 가장 믿던 同志를 잃을 때에 끝장이라는 비명 소리를 외칩니다.
論語에 孔子가 이 같은 비명 같은 소리를 했다는 것이 두 곳에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기둥처럼 믿던 제자, 顔淵이 죽었을 때, “顔淵死子曰噫天喪予天喪予”(안연 사 자왈 희 천상야 천상야-안연이 죽거늘 공자 가라사대 “슬프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늘이 나를 버렸다는 것은 끝장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는 만년에 그의 뜻이 모두 좌절됐다고 자인했을 때, 子 曰 “鳳烏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봉조부지 하불출도 오이의부- ‘봉황새도 나타나지 않고 황하에서 훌륭한 善政法則을 도형으로 표시한 문서가 천년 묵은 거북이가 짊어지고 나온다는 전설속의 그 河圖도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것으로 그만이로구나!’)라는 절망을 한탄한 뜻으로, 끝장이 났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은 드디어 一直線을 그으면서 제자들을 끝끝내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하신 반면에, 베드로와 가롯 유다는 끝까지 부인과 배신으로 끝장을 내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사랑을 부어 주시고, 사탄은 스승에 대한 반역의 슬픈 종말을 고하도록 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 교차되는 말씀을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끝까지"(εις τέλος) -드디어(드디어 주님의 최고도의 사랑이 나타나셨다는 뜻) 극한까지, 극도까지, 영원히 및 한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τέλος-종국, 마지막이란 뜻입니다. ②. “자기 사람”(ἰδιος)-요1:11에는 유대민족을 가리키고, 여기서는 주님의 제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대민족은 아브라함의 혈족을 말하는 것이고,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람>을 위해 <자기 때>가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인식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③. “한 조각”(φωμίον)-입에 넣을 만한 크기를 말합니다. 보통 우정의 표로서 특히 골라낸 한조각의 식물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유다’에 대한 최후의 사랑의 표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반역자를 끝끝내 사랑하며 그를 포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까지는 감히 스승을 팔아넘기지 못하고 주저하던 ‘유다’가 이 때에 결연히 악한 생각을 결정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악마 얼굴로 변해가던 모양을 ‘사도 요한’은 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④.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는 베드로의 말과 주님의 예고의 말씀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란 연약한 것이며, 모순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베드로에 대해 주님의 예언의 깊이를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이 맞서 있는 신비로운 대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과 사건은 4복음서가 다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마6:34, 막 14:30, 눅 22:34)
주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마26:74-75, 막14:71-72, 눅22:60-62, 요18:25-27) 베드로는 가야바 법정의 뜰까지 살벌한 분위기에 위압되어, 주님을 모른다는 말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 “저주하며(καταθεματιζειν)맹세하여(ἀναθεματίζειν)”-베드로 자신이 ‘예수를 모른다고 한 말’이 진실이 아니라면, 자기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선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의 용기 있는 진언인,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와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사이에 커다란 단애(斷崖)가 가로 놓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런 과정이 베드로의 眞面目이며, 오늘날 우리 기독자들의 실존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종내 주님을 위한 순교의 장엄한 종지부는 실패의 아픔이 재귀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유종의 미’를 발휘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3. 본론(Context): 먼저, 주님의 初志一貫한 변함없이 제자들을 끝끝내 사랑을 관철하심에 대해서 묵상해 보십시다.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같이 예수님의 生涯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공관복음서의 내용의 말씀을 독특한 입장에서 해석했을 뿐, 거의 대부분은 신학적인 말씀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사, 즉 인류를 救贖하기 위한 피 흘리시는 그 아픔을 독특하게 우리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설레게 합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의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을 반대한 것에 대한 반증으로, 靈肉의 사랑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향하는 도중에 ‘수가 성’ 야곱의 우물 곁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숙적관계(宿敵官界)를 깨드리고, 행로에 피곤하여 목이 말라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심으로, 인간들의 가슴에 고갈된 사랑의 갈증을 해소시킨 것,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시는 애틋한 사랑,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허한 사랑의 장면, 본문에서 제자들을 끝끝내 사랑하신다는 말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요12:27)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반면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면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종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요19:28) 하심에 “거기 신 포두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29-30)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들이 그토록 기다리었던 사랑의 극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목이 타는 인생의 사막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고 끝도 안 보이는 사막, 거기서 길 잃은 인생 나그네로 목이 탄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얼마나 오아시스를 그리며 살아왔습니까! 엄마를 잃은 어린애가 엄마를 찾아 부르고, 또 부르짖음으로 목이 타듯이, 그리움의 사랑에 목이 타왔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이 철저히 목 타심으로 우리를 解渴시켜 주시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주님은 지금도 끝끝내 사랑의 一直線을 그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만강에 넘치고 감읍한 사랑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否認과 背信을 생각해 보십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에도 본문에서(베드로 생의 前半部) 끝까지 부인했습니다. 그의 비겁이 끝까지 갔습니다. 그것도 부인이 자기 자신을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자신이 예수를 모른다고 하는 부인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진실이 아니면 저주를 받겠다는 맹세까지 하면서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순간적인 부인이었다면 그래도 일말의 동정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 일당에 의해서 산헤드린 공회로 끌려가는데, “멀찍이”(마26:58, 눅22:54) 겁이 나서 간격을 두고 뒤 따른 것에서 부인은 시작 되었고, 가야바 아래 뜰에서 하속들과 동류하여 춥다고 불을 쬐고있는 중에, 3번 부인의 말 중 첫 번째는 자기 안전을 위해 응급 결에 본능적인 부인이었다면, 두 번째 부인은 요한복음서는 첫 번째 부인 이후에 상당한 간격의 시간이 흐른 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자기와의 그간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반복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또한 세 번째의 부인은 예수님은 자기와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키 위해서, 또한 거짓말이 아니고 진실하다는 뜻으로 ‘거짓이면 저주를 받겠다고 맹세’까지 한, 아주 惡質的인 부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일이라고 탓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오늘의 우리 자신들의 실존이 아닌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급할 때는 “주여! 주여!” 안전하고 평안하면 주님의 말씀은 뒷전으로 돌려놓고, 눈앞의 이익과 쾌락 선택에 급급했던 우리들 자신이 아닌가를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닭 울음을 듣고, 비로소 주님이 말씀을 생각하고서 밖에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이 처절한 통곡 이후에 베드로 인생은 장엄한 발걸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통곡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롯 유다의 背信을 생각해 봅시다. 유다가 12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을 당시, 다른 제자들은 거의 갈릴리 지방 출신의 농촌 촌뜨기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유일하게 남방 ‘케리옫’(kerioth, ‘그리욧’ 수15:25) )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외되는 외로움을 느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리는 북부는 갈릴리 지방, 중부는 사마리아 지방, 남부는 유대 지방으로 3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기름진 농촌 곡창지대였고, 사마리아 지방은 혈통과 신앙이 문난해 진 곳이라고 하여 상종치 않는 지역이었고, 남쪽 유대지방은 정치적 관심이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결국 유다도 이런 문화권 속에서 성장했기에, 정치적 관심이 지대하여 로마식민의 굴레를 벗고 해방하자는 이념이 투철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동기도 다윗 왕조의 재현을 꿈꾸며, 유대 군중의 생각처럼(요6:15), 예수님을 지상의 왕으로 모시겠다는 Messiah관이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예수님의 행보는 자기가 꿈꾸던 것과는 다른 이념으로 생각하고서 반역의 길을 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12제자 群의 財務를 맡음에서 오는 物慾이 그로 하여금 배신의 길을 택하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요6:71, 12:6) 마리아는 유대 풍습에 따라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그녀의 지극한 헌신의 태도도, 거기에 만족하시는 그리스도의 심정도 유다에게는 이해되지 못했습니다. 唯物主義者 마음에는 정신계의 묘미를 알지 못하여, 마리아의 아름다운 헌신을 상징하는 그 향유 냄새도, 유다의 마음에는 300데나리온 계산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이념에 갈등하던 유다는 드디어 행동으로 배신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관습에는 친구간이나 사제 간에 서로 안고 입 맞추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랑과 친밀의 정을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눅7:36-50) 그러나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송한 하속들에게 유다의 입 맞추는 신호로 예수님을 쉽게 붙잡도록 했습니다.(마26:47-50) 시몬 집의 여인과 유다의 극단적인 대조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됩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었고, 하나는 주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어찌했던, 사랑의 표정을 반역의 군호로 삼았다는 것은 가장 가증한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배신의 과정 속에서도 끝까지 회심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마27:5-10, 행1:18) 필자의 스승이신 정류 이상근 목사님의 소책자 <들의 백합화>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어디서든지 한 사람의 유다를 容許하신다. 그것은 한 사람의 예수를 원하셔서다.”라고 피력하였습니다. 진정 오늘의 교회에서도 신앙과 교회를 욕 먹이는 배신자가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끝끝내 사랑의 돌보심이 그 배신을 덮고도 남을 영원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테는 神曲 지옥 편에서 기술하기를 “줄리어스 시저를 배신한 부르투스와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는 지옥의 제일 하층(9층)에서 고통 한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반역한 자의 비참한 최후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과 인품 수련에 他山之石 내지 反面敎師로 일깨우는 교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배신과 반역이 있을지라도, 끝끝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있기에 가슴 벅찬 감사한 마음과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결국, 끝끝내 주님의 사랑도, 끝까지 부인과 배신도 끝장이 났습니다. 끝끝내 주님의 사랑은 당신 자신의 희생이 극도에 달하셔서, 우리를 위한 피 쏟음으로 인하여 “목마르다.”는 말씀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살리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목이 마릅니다. 현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과 같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을 이기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베드로의 부인과 가롯 유다의 배신은 자기 사랑의 길을 택하여 자신까지 잃어버리는 종국의 끝장이 난 그 길은 결코 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한편, 베드로의 부인과 유다의 배신일지라도 돌이킬 수 있는 餘裕를 주셨지만, 베드로는 칠흑 같은 밤길 속에서 悔悟에 찬 오열(嗚咽)을 통해서 재귀하여 장엄한 순교로 마감한 삶이었지만, 유다는 끝장까지 비참한 자기 갈 길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 역시 끝끝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살지만, 혹여 주님의 사랑에 반하는 인생길일지라도, 즉시 발길을 돌이키는 삶을 베드로에게서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만, 결단코 유다의 길은 걷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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