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96. 바울의 역설적인 실존

solomong 2025. 9. 15. 11:53

96. 바울의 역설적인 실존

(본문: 고후 6:8-10)

 

1). 서론: ‘逆說’이라는 말은 직관이나 상식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모든 결과를 일컫는 말입니다. (合理主義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개념)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명백히 거짓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인생 자체가 역설적인 실존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하다, 정의롭다, 사랑한다.”라고 하지만, 자칫하면 안이할 정도로 通念化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想念도 인간실존의 밑바닥까지 파고 들어가서 각도를 달리해서 볼 때, 과연 지금까지의 우리의 규정이 타당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복에는 불행이 있고, 정의에는 불의가 있으며, 사랑에는 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역설 속에 실존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역설적인 인간실존이 바로 우리가 애써 규정하여 보려는 深淵입니다. 이제 바울의 실존을 이 역설 속의 깊이를 본문을 통해서 보기로 합시다.

 

2). 본문의 이해(Text): 前場에서부터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의 반대자들과의 화해를 호소해 왔습니다. 복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 복음을 증언하는 사역자가 좋지 못하면 복음 자체의 진가도 가려지는 법입니다. 화해를 호소한 그는 하나님과 같이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모든 역경을 극복함으로 자신의 사도직의 영화로운 것이라는 긍지와 감흥에 젖어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복음 전도자의 사역 결과로서,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역설적인 실존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⓵.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바울은 예수님의 12. 제자 (사도)의 일원도 아니었고, 예수님 살아생전엔 예수님 곁에도 못 갔던 자가 使徒라고 자칭한다고 비난하는 반대자들에게 답변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요, 자신의 전도 효과는 성실성을 갖춘 진실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⓶.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무명한 자”(ἀγνοούμενοι)란 ‘무시를 당한 자’, ‘신임장이 없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많은 사람에게 특히 유대주의자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무시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의 지위, 학문, 문벌, 기타의 특권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버렸습니다. (빌 3:4-7)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예수님을 섬기는 중에서, 유대교의 랍비 활동보다 더 유명해졌습니다.

 

⓷.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바울의 비난자들은 그의 한 발은 무덤에 들어갔다고 할 만큼, 바울의 고난이 극심하여 죽는 것처럼 보였으나(고후1:9, 11:23), 그러나 남에게 활력을 넣어 주고, 기적적으로 그것을 능가하면서 살았습니다. ‘보라’(ἰδοὺ)-이야기의 生氣를 넣어 주는 낱말입니다. 바울의 감격을 감출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고난 중에서 매일같이 체험한 기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⓸.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바울의 ‘육체의 가시’(고후12:7)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바울의 身病인 ‘안질’로 보는 것이 유력합니다. 그의 반대자들이 ‘안질 병’은 하나님의 벌이라고 하면서 모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鍛鍊(訓練)의 계기로 삼았습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아픔과 수난은 그의 범죄(사울 시대의 범죄)로 징계를 받는 것 같으나, 도리어 하나님의 보호로 끝나곤 하였습니다.

 

⓹.“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바울의 반대자들이 바울을 비관자라고 비난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직시하고 슬퍼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슬퍼하셨습니다. (사 53:3)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인생관은 슬픔과 기쁨의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는 자와 같이 울고(롬12:5), 하지만 슬픔 속에 즐거운 샘이 솟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승리를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목적성취에 고난도 한몫한다는 신념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사실 바울은 한편엔 근심의 사람이었으며(롬 9:2, 빌 2:27), 다른 한편엔 기쁨의 사람이었습니다. (롬 5:3, 14:17)뿐만 아니라, 기쁨을 권면한 사람이었습니다. (빌 2:18, 3:1, 4:4) 우리들의 경험에 의하면, 슬픔과 기쁨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와서 서로 補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와 고난에 예민한 마음은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기쁨도 예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아는 자는 그의 부활의 능력도 아는 것입니다. (빌 3:10)

 

⓺.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바울은 손수 천막 만드는 직업을 하여 자급 전도에 종사하였으므로, 가난한 자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이 그 사도직이 불안하여 교회의 부양을 요구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빈천한 것을 인정했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참 부유는 마음과 정신에 있으며 즉, 영적인 부유한 은혜는 또한 육의 축복을 결과할 것이므로 많은 사람을 부유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⓻.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바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빌 3:8),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했습니다. (롬 1:1)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만물이 그의 것이 된 것입니다. (고전 3:21) 7가지 역설적으로 말한 결론으로 거듭난 자의 무한히 높고 넓은 시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말해서, 기독 신자의 소유는 마음과 정신에 도움이 되어야지 짐이 되면, 안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개는 그와는 정 반대가 될 때가 많습니다. 물질적 소유가 많으면 교만 할 수가 있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뢰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물질적 소유는 적을지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지혜의 보화,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을 누릴 수가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면서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 고뇌와 세상 번뇌도 축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서로 협력하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고전 3:21-23)

 

3). 본론(Context): 前場에서 줄곧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주의자로 전향한 자신을 비난과 조소에 대해 끈덕진 설득과 화해를 호소해 왔습니다. 복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 복음을 증언하는 사역자가 좋지 못하면 복음 자체의 진가도 가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화해를 호소한 그는 하나님과 같이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모든 역경을 극복함으로 자신의 사도직의 영화로운 것이라는 긍지와 감흥에 젖어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복음 전도자의 사역 결과로서,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역설적인 실존을 7가지 분야로 피력하고 있습니다. ⑴. 바울은 예수님의 12. 제자(사도)의 일원도 아니었고, 예수님 살아생전엔 예수님 곁에도 못 갔던 자가 使徒라고 자칭한다고 비난하는 반대자들에게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요, 자신의 전도 효과는 성실성을 갖춘 진실한 것이었다는 것으로 답변을 합니다.

 

⑵. 바울은 많은 사람에게 특히 유대주의자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무시(신임장이 없는 자)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지위, 학문, 문벌, 기타의 특권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배설물처럼 죄다 버렸습니다. (빌 3:4-7)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가 예수님을 섬기고 전도하는 중에서, 유대교의 랍비 활동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⑶. 바울의 비난자들은 그의 한 발은 무덤에 들어갔다고 할 만큼, 바울의 고난이 극심하여 ‘죽는 것처럼’ 보였으나(고후 1:9, 11:23), 그러나 남에게 활력을 넣어 주고, 기적적으로 그것을 능가하면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 감격을 감출 수 없어서 자기 말의 生氣를 넣어 주는 말인 ‘보라!’라는 말을 하면서 感興에 젖기도 했습니다. 그가 복음 전도의 수많은 고난 중에서 매일같이 체험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진실을 간증했던 것입니다.

 

⑷. 바울의 ‘육체의 가시’(고후 12:7)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바울의 身病인 ‘안질’로 보는 것이 유력합니다. 그의 반대자들이 ‘안질 병은 하나님의 懲罰’이라고 하면서 모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반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鍛鍊(訓練)의 계기로 삼았으며, 이와 같은 아픔과 수난은 그의 범죄(사울 시대의 범죄)로 懲戒를 받는 것 같으나, 도리어 하나님의 보호로 끝나곤 하였던 것입니다.

 

⑸.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을 悲觀 者라고 비난한 것 같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고통을 직시하고 슬퍼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슬퍼하셨습니다. (사 53:3)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의 인생관은 슬픔과 기쁨의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는 자와 같이 울고(롬 12:5), 하지만 슬픔 속에 즐거운 샘이 솟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승리를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목적성취에 고난도 한몫한다는 신념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사실 바울은 한편엔 ‘근심의 사람’이었으며(롬 9:2, 빌 2:27), 다른 한편엔 ‘기쁨의 사람’이었습니다. (롬 5:3, 14:17)뿐만 아니라, 기쁨을 권면한 사람이었습니다. (빌 2:18, 3:1, 4:4) 우리들의 경험에 의하면, 슬픔과 기쁨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와서 서로 補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와 고난에 예민한 마음은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기쁨도 예민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아는 자는 그의 부활의 능력도 아는 것입니다. (빌 3:10)

 

⑹. 바울은 손수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하여 자급 전도에 종사하였으므로, ‘가난한 자’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이 그 사도직이 불안하여 교회의 부양을 요구하지 못한다고 비난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자신의 빈한한 것을 인정했으나, 동시에 많은 사람을 부유케 한다고 했습니다. 참 부유는 마음과 정신에 있으며 즉, 영적인 부유한 은혜는 또한 육의 축복을 결과할 것이므로 많은 ‘사람을 부유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⑺. 바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빌 3:8),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했습니다. (롬 1:1)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만물이 그의 것’이 된 것입니다. (고전 3:21) 7가지 역설적으로 말한 결론으로 거듭난 자의 무한히 높고 넓은 시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실적으로 말해서, 기독 신자의 소유는 마음과 정신에 도움이 되어야지 짐이 되면 안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개는 그와는 정 반대가 될 때가 많습니다. 물질적 소유가 많으면 교만 할 수가 있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의뢰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물질적 소유는 적을지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지혜의 보화,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을 누릴 수가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면서 은혜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 고뇌와 세상 번뇌도 축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서로 협력하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지요. (고전 3:21-23)

 

자! 이상의 7가지 <바울의 역설적인 실존>에 대해서 해설을 해 보았습니다. 복음 전도자 Paul의 <불성실과 진실성, 무명과 유명, 생사의 문제, 징계와 보호, 비관과 낙관, 가난과 부유 및 허무와 충만>에 대한 逆說的인 實存에 대해서, 그는 인간적인 탈을 벗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도약(跳躍)해서 진실한 자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철학적으로 역설(Paradox)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반대되는 표현으로서,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암시적인 표현이란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불성실, 무명, 죽음, 징계, 비관, 가난, 및 허무한 것’ 같으나 사실은 ‘진실, 유명, 하나님의 보호, 낙관, 부유, 및 충만’하다는 것을 모순어법(oxymoron)을 통한 자기 자신의 진실을 밝혔던 것입니다.

 

또한 실존(Existence)이란 철학적인 용어개념은 낱말 그대로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으나, 실존철학에서는 가벼이 넘길 수가 없는 심각한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19C.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S. Kierkegaard)는 추상적인 관념만을 중시하고 실재의 사실을 무시하는 Hegel 철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용한 實存의 개념은 ‘진실한 인간 존재 양식, 곧 하나님 앞에 홀로서는 단독자’라고 하였습니다.

 

실존하는 자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3가지 근본 형태를 키르케고르는 심미적 실존(快樂), 윤리적 실존(善惡), 종교적 실존(信仰)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심미적 실존은 이기적인 쾌락의 노예가 되어 어쩔 수 없는 ‘권태’(현실과의 불균형)에 사로잡혀서, 윤리적 실존을 향한 비약을 유발하게 되고, 윤리적 실존은 인간은 자기 안에서 규범이 말하는 것과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도덕률을 사는 구체적인 방식 간에 벌어진 틈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 안에서 죄의 사실이라는 이 같은 차이점을 알게 되어 윤리적 인간은 갈등을 통해서, 종교적 실존을 향해서 비약되고, 종교적인 실존은 絶望을 전제로 하며,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면서도 한편으론 永生으로 인도하는 병이며,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理性을 넘어서 信仰으로 인도되고, 신앙을 통해서 改心을 체험하게 되며, 신앙만이 인간을 고뇌로부터 해방을 받게 되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필자가 잠시 <바울의 역설적인 실존>을 이해하기 위해서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S. Kierkegaard)의 실존(Existence) 사상에 대해서 언급해 보았습니다. <바울의 역설적인 실존>은 키르케고르(S. Kierkegaard)의 실존 사상에 비추어 본 그대로입니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들의 역설적인 실존>의 모습도 이렇게 되었으면 합니다. ‘불성실, 무명, 죽음, 징치, 비관, 가난, 및 허무한 것’ 같으나, 사실은 ‘진실, 유명, 하나님의 보호, 낙관, 부요, 및 충만’하다는 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며, 신앙적 차원에서 유명하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며,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신앙적 견지에서 항상 기뻐하며, 영적인 부유한 은혜는 또한 육의 축복을 결과할 것이므로 많은 사람을 부유케 할 수 있다는 신념에 살며, 우리에게 물질적 소유는 적을지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지혜의 보화, 및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을 향유(享有)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은혜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복음 전도자 Paul의 <불성실과 진실성, 무명과 유명, 생사의 문제, 징계와 보호, 비관과 낙관, 가난과 부유 및 허무와 충만>에 대한 逆說的인 實存에 대해서, 그는 인간적인 모든 탈을 벗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도약(跳躍)해서 진실한 자신을 보여 준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철학적으로 역설(Paradox)의 개념은 일반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반대되는 표현으로서,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암시적인 표현이란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불성실, 무명, 죽음, 징계, 비관, 가난, 및 허무한 것’ 같으나 사실은 ‘진실, 유명, 하나님의 보호, 낙관, 부유, 및 충만’하다는 것을 모순어법(oxymoron)을 통한 자기 자신의 진실을 밝힌 것처럼 우리도 신실하고 진실한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는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하는 實存(Existence)>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키르케고르(S. Kierkegaard)가 말하는 심미적 실존의 쾌락과 윤리적 실존의 갈등 假面(Persona)을 벗고,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신앙의 실존 모습 그대로 서서, 하나님 연민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