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쁨의 새로운 의미
(본문: 빌4:4-7)
1). 서론: 신학자 폴 틸릭히(P. Tillich)는 그의 저서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기쁨(Joy)과 즐거움(Pleasure)을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도둑이 남의 물건을 훔쳐서 돈을 물 쓰듯 해도, 한 때 '즐거움'은 있을지 몰라도 그 삶 속에 참 '기쁨'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쁨은 슬픔에 반대되는 개념(槪念)입니다. 또한 슬픔(Sorrow)은 고통(Pain, Suffering)과 구별됩니다. 슬픔은 존재의 핵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오는 슬픔은 관계가 회복될 때에만 슬픔이 해소됩니다.
전사(戰死)한 남편의 장례식에 아무리 훈장(勳章)을 달아주어도,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단지 죽은 남편이 살아 날 때만이 슬픔이 해소됩니다. 또한 아무리 고통스럽고 손해를 보아도 그 속에서 기쁨은 맛볼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는 어머니에게는 비록 고통스러워도 자식이 存在하는 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본론(Text): ①. 본문에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옥고를 치루고 있는 중에도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권면의 말씀에는 문제가 제기(提起) 될 수가 있습니다. “기뻐할 처지에 있어야 기뻐하는 것이 인간의 보통 정서감정이 아니냐.”라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인간현실을 무시한 말씀이다. 인간의 삶은 결코 늘 기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은 기쁜 일과 고통스런 일이 엉켜 있는 엄숙한 현실이다.”란 것입니다.
②.또한 “기뻐하는 것은 반드시 미덕(美德)일 수가 없다. 슬퍼 할 일로 차 있는 현실에서, 남들은 우는데, 나 혼자 기뻐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조롱(嘲弄)하는 것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결코 기뻐하는 삶보다, 오히려 고난을 체험하고 있으면서, 무슨 위선(僞善)의 말이냐.”라는 등등의 문제가 야기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런 문제점을 몰라서 이런 권고를 한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③.그렇습니다. 삶이란 결코 기쁨의 연속일 수 없는 엄숙한 현실이지만, 고통 중에도 주님의 사랑을 받고, 또한 주님을 신앙하고 사랑하는 삶속에서 참 기쁨을 맛보란 의미에서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기쁨보다 오히려 고통이나, 고뇌를 더 많이 체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로마’ 옥중에서 죄수의 몸으로 고통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빌립보교우들에게 권면한 것입니다.
④.또한 그는 不治의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 "내 육체의 가시, 이것이 떠나기 위해 3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주께서 답하시기를 '내(주님)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시기로 나는 오히려 자랑하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3). 본론(Context): ①.그러므로 기독교의 기쁨이나 감사의 기준은 세상의 그것과 다릅니다. 기독교는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종교입니다.(시126:5~6) 그러기에 기독교의 기쁨은 역설적(逆說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고통이 동반하고, 아픔이 전제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위의 서론(序論)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머니나 자식이 서로를 물질적인 것으로 주고받을 때의 기쁨이 아니라, 참 기쁨은 ‘그 존재자체’를 기뻐할 때입니다. 어머니와 자식 간의 인격적 관계에서의 만남입니다. 예술가의 기쁨은 그 예술자체에 도취할 때인 것처럼 말입니다. 돈과 명예를 목적으로 할 때는 기쁨이 올 수 없습니다.
②.그런데 현대인은 생을 ‘즐긴다.’(Pleasure)다는 말을 쓰고, 행복의 기준도 '즐거움'에 있습니다. 즐거움은 곧 행복이란 등식(等式)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틀(Aristotle)은 행복을 최고선(最高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의 모든 것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道具)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희랍의 ‘에피큐리안’ 학파는 감각적, 육체적 쾌락을 인생의 진리요, 참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런 논리가 그냥 그대로 전개된다면, 사랑도, 우정도, 행복을 위한 하나의 기교(테크닉)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참 사랑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고, 고마움이나 감사가 있을 수 없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행복할 수 있느냐가 궁극의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③. 그렇다면, 사랑이니, 순정이니, 우정이니 하는 것은 이용물(利用物)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고민이 있고, 현대 교육의 고민이 있습니다. 신앙도, 감사도 조건부(條件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福)을 주니 감사하다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인격과 내 인격이 부딪쳐서 나오는 것이지, 인격과 물건(I-It)과의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④.이런 사실에 영감을 받고서, 눈을 뜬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해지며, 모욕을 당하며, 궁핍과 박해 및 곤궁을 당하는 것을 기뻐한다.”고 개가(凱歌)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존재전체를 ‘존재 그 자체인 그리스도’(Being-Itself, The Ground of Being)께 내 맡긴 믿음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자유로운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이런 신념과 신앙에서 오는 기쁨은 양면(兩面)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나’(바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경우이고(반드시 얻는 경우만 아니고, 빼앗기는 경우, 즉 고통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 다른 한 면은, 그 고통과 약함에서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오히려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을 위하는데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는, 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나, 모욕을 환영하며, 그럼으로써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데서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이 한 가지뿐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은 그 약한 상태에서 다가오는 가능성(可能性)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The Lord is coming soon.)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고 있는 주의 재림(再臨)에 참여하는 소망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 앞에서 현재의 약함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다가오는 그 소망의 삶을 앞 당겨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도래(到來)하는 미래 소망에 기뻐하라는 이유였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소망의 삶’ 때문이란 것입니다.
4). 결론: 우리도 바울이 의미하는 기쁨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 때문에, 그것이 ‘고난의 잔’이라도 주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기뻐할 수 있다는 뜻을 삶에서 체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또한 기쁨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시에 몰트만(J. Moltmann)이 말하는 바와 같이, 미래가 현재에로 도전해 오는 희망(The Hope)을 앞 당겨서, 기뻐하는 소망의 신앙을 갖도록 합시다. 다시 말해서 주님 때문만 아니라, 너(Thou, 이웃)를 위한 삶에서도 기쁨과 보람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주님을 뵈옵는 그 소망에도 기쁨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끝.
'04. 신약설교마당(135)' 카테고리의 다른 글
| 95. 끝끝내 사랑과 끝까지 부인과 배신 (0) | 2025.09.08 |
|---|---|
| 94. " 내가 이를 위해 이때에 존재 합니다." (1) | 2025.09.03 |
| 92. 그리스도의 遺言書 (4) | 2025.08.23 |
| 91. 인간 역사의 신음 소리 (2) | 2025.08.19 |
| 90.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6) | 2025.08.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