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91. 인간 역사의 신음 소리

solomong 2025. 8. 19. 08:50

 

91. ​인간 역사의 신음 소리

(본문: 롬8:18-30)

 

I). 서론: 오래 동안 우리들은 바울의 구원사상을 오해해 왔습니다. 그럼으로 성서해석을 할 때, ‘구원’의 개념도 잘못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존 번연’의 이라는 신앙적인 문자에 친숙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 있는 구원관을 바로 성서의 구원관처럼 생각해 왔습니다. 천로역정 속의 기독자는 이 인간역사가 곧 망한다는 생각에서 이 세상에서 빨리 탈출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고향 사랑하는 처자, 혈육 및 이웃을 다 뿌리치고 “구원! 구원!”을 외칩니다. 그의 앞에는 장애와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이기고 결국 천국에 입성을 합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주인공은 철저한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개인의 영혼구원만을 위해서 가까운 사람을 다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달려가는 그 사람을 정말 본받을 만한 기독자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밖에 없습니다. 정말 자기만 구원받고 이 세상에 있는 자기처자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은 정말 망해도 좋다는 말인가. 우리 기독자는 흔히 설교나 공중기도 할 때, ‘구원’에 대한 말을 하게 되면 ‘노아의 방주’를 말하고, 노아방주하면 또한 교회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구원관은 이와는 전연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역사의 모든 피조물 자연까지도 본문에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늘 들어보란 바울의 절규였습니다.

 

2). 본론: 인간역사의 신음소리는 모든 피조물인 억조창생을 비롯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에서도 그 신음소리를 듣게 된다고 했습니다. 자연의 표면을 보지 말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이 신음소리가 끝나는 그날이 완전한 구원이란 것입니다. 그 구원을 위해서는 “내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내 동족인 형제를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오히려 나는 한(恨)이 없겠습니다.”(롬9:2-3) 이는 ‘천로역정’이 말하는 기독자의 자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의 생애를 바친 바울의 염원(念願)이었습니다.

 

그는 소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시기 질투하기까지 이방인에게 복음이 먼저 증거 되어야한다고 했습니다.(롬11:26 이하) 인간역사의 신음소리가 끝나는 순서는 모든 이방인-유대인-세계구원의 단계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래 전에 서부 영화인 “셴”이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총잡이가 서부마을 어느 집에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 악당들이 들어와서 갖은 횡포를 다합니다. 동네 사람들을 다 내어 쫒고, 자기들이 독차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집 주인이 가서 악들과 싸우려고 일어섭니다.

 

그러나 그가 가면 악당들에 죽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총을 잘 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인 이 총잡이는 내가 가겠다고 합니다. “주인인 당신은 집도, 재산도 있으니 여기 살아야 한다.” 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을엔 하나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면 이 동네에 못 살고, 그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총잡이는 악당들을 다처치하고 자기는 이 동네를 떠나고 맙니다. 철저히 자기를 순(殉)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일직이 모세가 말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에게 저주를 받을지라도, 생명책(生命冊)에서 지워진다 해도 간절히 원하는 바로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내가 죄를 짓는 한(限)이 있더라도, 내 동족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내 이웃을 위해서라면, 내가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고, 아픔을 당해도 간절히 원하는 바란 것입니다. 이 정도로 각오와 인간역사의 신음소리를 제거하기 위한 책임을 느끼는 바울이었습니다. 본문 18절 이하에서 ‘세계 만물이 신음하고, 인간역사 속에서 사는 인생들도 신음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우주관이요, 세계관이요, 역사관이었습니다. ’고통, 허무 및 사멸‘에 찬 인류역사 세계의 비관주의적인 안경을 쓰고 세계를 보는 사람들의 말과 같습니다. 이 인간역사의 신음소리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자연까지도 신음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일본의 성경학자 내촌감삼(內村鑑三)은 “자연에 가까이 가서 대지(大地)에 귀를 데고 들어보아라. 거기엔 양육강식의 비참한 투쟁의 마당이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개구리는 벌레를 잡아먹고 뱀은 개구리를 먹고 산에 있는 짐승은 뱀을 잡아먹는 이런 고통에 신음하는 자연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표현은 자연(自然)도 너무나 고통스러워 주님의 나타나심을 간절히 사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인간역사엔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 궁극적인 자유, 즉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간역사가 흐르는 물결 속엔 슬픔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역사는 그 슬픔의 신음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희망(Hope)에 찬 세계란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아직은 아니고(not yet), 지금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광스러운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관론에 빠질 수가 없어서 소망 속에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인간역사엔 이 신음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인간역사 세계는 “허무”에서 해방되는 길은 물질 자체의 진화나 기계문명의 발달과 같은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역사 속에서 신음에서 탈출하는 운명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밤과 같은 어두움의 날일지라도 그 날은 약속된 날이기에 오고야 맙니다. 그 날을 바울은 신앙의 안목 하에서 앞당겨 보았습니다. 신앙이란 어두운 현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저편에서 밝아 오는 아침의 여명을 보고 그 빛을 미리 감촉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국의 한 때는 철학자이었고, 목사였던 Emerson은 “신앙은 종달새 알에서 종달새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Heilsgeschichte)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 우상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이 있다고 하는 “남은자의 무리” 그들이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어가고 창조하고 완성하는 자들입니다.

 

이 인간의 역사 속에 신음소리를 듣는 우리들이 이 그리스도의 역사에 동참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역사를 끌지 않고, 인간들과 더불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인간과 더불어 역사의 완성을 위해 참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선택된 자”, 흔히 "엘리트"(elite)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역사의 신음 소리에서 해방시킬 자들은 소수의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들에 의해서 진전되어왔고, 또 그렇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 엘리트는 인간능력에 있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경륜에 참여키로 결단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기독신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구원, 이기주이적인 자기 구원에만 전전긍긍하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일직이 말하기를, “세상은 대 풍진을 일으켜 우리들로 하여금 울타리 밑에 숨어서 질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가 있다.”는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질풍노도(疾風怒濤)가 부는 적 진지인 예루살렘으로돌진하여 우리들을 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구원 받지 못할지언정 동족을 위해서라면, 역사의 풍진, 신음소리 처량히 들리는 소아시아 전 지역을 혈혈단신으로 진격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인간역사의 신음소리를 귀로 막고,군인이 싸움을 포기하고공습이 무서워 방공호 속에만 숨는, 위의 플라톤의 말처럼 역사의 풍진을 피해 비겁하게 울타리 밑에 숨는 비겁한 자들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 기억을 새롭게 합시다! 이 인간역사의 신음소리를 제거키 위해서 부름을 받은 전위대(前衛隊)로 소명(Calling)받은 것을 굳게 인식합시다. 우리는 자기 개인구원은 물론이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사회구원, 역사구원자의 대열에 선 것임을 다시 자각(自覺)해야 하겠습니다.

 

3). 결론: 사랑하는 기독동지 여러분! 이 신음하는 역사의 모순을 해방시킬 사명 자들이 우리들임을 또 다시 자각하고, 일사불란한 중에 이 웅대한 그리스도의 새 역사, 구원의 역사창조 대열에 서서 선한 투쟁을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다짐합시다. 우선 우리는 부단히 자기 자신과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실로 가장 싸워서 승리하기가 어려운 적도 자기 자신임을 재천명 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참 위기는 이 하나님의 인간역사의 구원에서 승리한 후에 자기와의 투쟁에서 패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단히 그리스도의 역사진행과정 속에 이 신음소리의 원인자인 불의와 사회 구조적(構造的)인 악과 제도를 쳐 부스기 위한 단합된 우리 기독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

 

2009. 4. 16.

山下연구소장: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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