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89.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

solomong 2025. 8. 9. 10:23

 

 

89.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

(본문: 빌4:4)

 

1. 서론: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로서, 기질적으로는 낭만과 서정성을 지닌 <안톤 슈낙>“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이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 시절(1955년 고2학년)에 인상 깊은 구절들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고 필자의 뇌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이 수필은 1953년부터 고등학교 제2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려지기 시작하여, 1982년 국정교과서 개편으로 살아지기까지 30년 동안 청소년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되는 내용은 “휴가의 마지막 날, 바이올린의 G현,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만월 밤의 개 짖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작은 슬픔과 삶의 허망함에서 오는 우수를 노래한 수필로서, 산문이라기보다는 서정시에 가까운 느낌을 주는 글입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우수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적절한 상황을 찾아내는 예리함과, 그것들을 짧은 구절 속에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감각적 文體가 매우 돋보였습니다. 특징이라면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리고 처절함을 느끼는 상황보다는 감미로울 만큼, 처연하고 슬픈 상황을 나열했다는 점이란 것입니다. 이를테면, 인간 실존 그 자체뿐만 아니라, 삶의 서글픈 정황을 묘사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의 인간 실존 자체는 슬픈 인생고와 역경 속이지만, 오늘 본문 전후의 말씀과 인간실존의 복선(複線)이 뿌리 채로 흔들림 속에서도,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毅然히 당부한 <존재의 근저(The Ground of Being, Being Itself)에서 솟는 기쁨> 교훈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Paul Tillich에 의하면,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인 하나님을 '존재의 根柢'(The Ground of Being), 혹은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 '궁극실재'(Ultimate Reality)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의 전 실존을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이신 그리스도’께 내 맡긴 믿음에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본문의 핵심-본문의 앞부분은 교회생활에 있어서의 상호관계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었으나, 본문은 주님을 상대한 우리 스스로의 생활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쁨, 감사, 및 평안의 삶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②.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기쁨’은 빌립보서의 기본사상 입니다.(1:4, 3:1) 바울은 앞부분에서는 교회생활의 분규 같은 어두운 면을 언급하였으나, 본문에서는 명랑하고 밝은 면모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본문의 기쁨의 개념은 주안에서 갖는 신앙적인 기쁨이지, 세속적인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잠시 조건여하에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계속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내가 다시 말하노니”-간단없는 기쁨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거듭 기쁨의 삶을 힘주어 말하는 것은, “기독자의 삶속엔 역경과 고난의 생활도 있는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느냐”고 의의(疑意)를 제의하는 기독자들에게 그 懷疑를 제거하려는 의도라고 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에서 노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옥고를 치루고 있는 중에도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해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삶이란 결코 기쁨의 연속일 수 없는 엄숙한 현실이기에, 고통 중에도 신앙 속에서 참 기쁨을 맛보란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을 통해서 기쁨보다 오히려 고통이나 고뇌를 더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옥중에서 죄수의 몸으로 고통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불치의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내 육체의 가시, 이것이 떠나기 위해 3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주께서 답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하시기로 나는 오히려 자랑하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병명이 무엇이냐에 대한 학자들 간에는 구구한 해석이 있습니다만, 대개 다메섹 도상의 강열한 빛으로 눈병이 기인되었고, 거기다가 고향 땅 ‘다소’의 10년간 은둔생활에서 지난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로 눈이 상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어찌했던, 전도자 바울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가시보다 옥중에서 자기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에 달관(達觀)하고서,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메시지를 지금 빌립보 교우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기쁨이나 감사의 가치관은 세상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종교입니다.(시126:5~6) 그러기에 기독교의 기쁨은 역설(paradox)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때 고통이 동반하고 아픔이 전제(前提)하듯이 말입니다.

 

현대인은 생을 '즐기다'(Pleasure)라는 말을 많이 쓰고, 행복의 기준도 '즐거움'에 있습니다. 즐거움은 곧 행복이란 등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틀(Aristotle)은 행복을 최고선(最高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의 모든 것은 행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에피큐리안 학파는 감각적 육체적 쾌락을 인생의 진리요, 참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이런 논리가 그냥 그대로 전개된다면, 사랑도, 우정도, 행복을 위한 하나의 기교(테크닉)에 불과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참 사랑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고, 고마움이나 감사가 있을 수 없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행복할 수 있느냐가 궁극의 목적이 됩니다. 사랑의 참 기쁨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더 주고 싶고, 손해를 보아도 감격하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기쁨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 진정한 연인(戀人) 간의 사랑의 관계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이 말이 틀렸다면, 사랑하는 대상도 자기중심적인 행복을 충족키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P. Tillich라는 신학자는 그의 저서,<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란 저서에서 ‘기쁨’(Joy)과 즐거움(Pleasure)을 구별해서 말했습니다. 도둑이 남의 물건을 왕창해서 돈을 물 쓰 듯해도, 한 때 '즐거움'은 있을지 몰라도, 그 삶 속에 참 '기쁨'은 없습니다.(항상 불안 속에 살기에) 그러기에 '기쁨'은 '슬픔'의 반대되는 의미(槪念)입니다. 그런데 슬픔(Sorrow)은 고통(Pain, Suffering)과 구별됩니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은 존재(存在)의 근저(Being Itself)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오는 슬픔은 관계개선이 될 때만, 슬픔이 해소됩니다. 전사(戰死)한 남편(男便)의 장례식에 아무리 훈장을 달아주어도 슬픔을 당장 극복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단지 죽은 남편이 살아 날 때 만, 슬픔이 기쁨으로 전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워도 손해를 보아도 그 속에서, 참 가치와 참 의미 있는 일에는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삶의 의미를 두고 있는 어머니에게는 비록 고통스러워도 자식이 존재하는 한,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미국 St. Louis 소재 Eden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아침 등교 길에 본 사실입니다. 고속도로 진입 입구에서, 두 젊은 청춘남여가 서로 자동차로 엇바뀌어 오던 길에 차를 멈추고, 길바닥에서 한참동안 포옹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이한 것은 양쪽에서 뒤 따르던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두 젊은이의 포옹이 끝나기를 웃으면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네 같으면, 소리소리 지르면서 야단이 났을 것입니다. 또한 얼마의 기간과 성질의 해후상봉(邂逅相逢)인지는 모르나, 감히 공공질서를 무시하면서도 그렇게 감격일 수가 있느냐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느낀 소감은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감격'을 저들은 만끽하고 있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헤어져 있었는지 나는 모릅니다./그 어떤 사연으로 헤어졌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다만 지나간 얄궂은 운명의 작란으로/얼마나 원망했는지/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했는지 나는 모릅니다./지금은 격정에 찬 환희의 눈물만이/서로의 얼굴을 적시고 있을 뿐입니다.”라는 시적 (詩的)감흥을 느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오랜 질병에서 쾌유 되었을 때, 멀리 떠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서신을 받았을 때, Beethoven 제5. '운명' 교향곡 3, 4악장을 들을 때, 옥중에서 바울과 실라가 한 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미한 것 등은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생명과 관계된 문제이며, 영혼과 육신에 대한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란 개념'입니다.

 

황막한 인간실존이라고 하지만, 인생은 이런 저런 장면이 있어서 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바울은 특이한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생의 찬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자기의 흉금(胸襟)을 털어놓으면서,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기쁜 일이냐고 합니다. 자기는 본래 그리스도의 비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요, 예수님 편에서 보면, 원수요, 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를 용서하시고,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귀한 성직까지 맡기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고, 기쁜 일이냐고 합니다. 환희 찬 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 섭리의 원칙은 죄 짓은 자는 결코 용서 할 수 없는, 굽힐 수 없는 공도(公道)요, 공의(公義)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한 다고해서 그냥 용서하고 지나갈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인 것입니다. 노예시장에서 주님의 몸을 속전으로 팔아 우리를 解放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바울은 그 구원의 감격을(생의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것 입니다. 이러한 감격 속에는 <죄에 대한 아픔)>이 있었던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죄의 감각이 둔한 곳에는 구원의 즐거움도 없으며, 죄의 감각이 예민하고 심각한 곳에는 구원의 기쁨도 큰 것입니다. “죄의 고통과 구원의 감격은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죄성(罪性) 깊은 고뇌의 밤길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구원의 환희는 큰 것입니다. 인간역사에서 예외 없이 진한 생의 깊은 고뇌의 아픔을 지불한 사람들은 다 <생의 감격>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조건부인 순종과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내리셨습니다. 신약엔 무조건, 단지 믿음으로 구원하시고 축복과 은총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 무조건적 인 이신득의(以信得義)는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구원의 기쁨인 것입니다.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의 감사자 태도는 첫째로, 고난과 근심을 그대로(사실대로)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그 사실을 분석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 최악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 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마음의 기쁨은 최악의 불운(不運)까지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는데 있습니다. 둘째로, 적어도 그것이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이상 비난과 조소에도 개의치 않으며 염려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1929년 미국의 시카고 교육계에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예일대학교 급사, 가정교사, 판매원 등을 거쳐 고학한 로버트 헛긴스가 30세 나이에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크고 유명한 시카고대학교의 총장이 된 사건이었습니다.

 

"애송이 천재, 젊고 교육 이념이 삐뚤어졌다"는 비난의 화살이 난무했습니다. 그 때 그의 아버지는 '아무도 죽은 개를 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격려하면서, "부당한 비난 속에 위장된 칭찬이 있는 것을 잊지 마오."라는 말로 격려했다고 합니다. 그 후 사람들의 비난은 사라지고 그는 유명한 총장이자 교육학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근심·걱정은 우리가 행동할 때보다 한가할 때에 밀어닥칩니다. 한가한 때 공상이 시작되고, 마귀가 알을 까기도 합니다. 자기 일에 의미를 가지고 몰두하라는 것입니다.

 

4). 결론: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은 고뇌를 통한 삶의 기쁨(joy)이요, 최악의 불운까지도 받아들일 각오 속에서 오는 기쁨이요, 주님의 뜻 때문에 비난도 개의치 않는 데서 오는 기쁨이요, 의미 있는 일에 자신을 침잠(沈潛)시키는 데서 오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참 기쁨의 삶을 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 감격으로, 천신만고를 이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외과 의사가 쓴 수필집에서 이런 고백한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한 밤중에 환자가 문을 노크할 때, 일어나기가 괴롭지만, 그러나 자기존재의 의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인 것입니다.

 

바울이 주 안에서 기쁨이란 바로 이런 자기 ‘존재의 근저에서 솟는 기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절대적 기쁨입니다. 성령 안에서 신비한 신앙의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약속, 소망하기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생도, 수고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니 그 임(任)을 위한 것이라면, 즐겁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Paul이 자주 말하는 그의 생생한 체험이고, 우리의 경험입니다. 코로나 전염병이 우리들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현실이지만,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이 지금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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