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본문: 마 23:37-39, 눅 13:34-35)
1). 서론: 병자호란 때, 당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까지 피난을 간 상황에서 청나라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항복을 해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主戰派)가 팽팽히 맞서게 되었는데, 결국 ‘삼전도의 치욕’인 ‘인조’가 항복을 하게 되고, 그 결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신하 등이 포로로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척화항쟁을 주장하다 포로로 끌려간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이 시조의 주인공인 예조판서 김상헌이었습니다. 끌려가기 전 친구에게 지어준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청나라에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비장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의 산천을 떠나고자 하냐마는/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하여라.”김상헌은 “삼각산아!(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마치 뿔처럼 솟아 있어 삼각산(三角山)이라 불리게 되었음. ) 한강수야!”라고 조국 산하(山河)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국을 떠나는 비장감이 감도는 우국 충절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하직(下直)의 노래로 옛정을 달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국산천(祖國)에 대한 절절한 사랑, 오랑캐 땅에 잡혀가는 비장감, 귀국에 대한 불안 의식 등이 뒤섞인 작자의 심경이 영탄법(咏嘆法)의 표현방식으로 표출한 것이었습니다.
춘원(春園) 선생 자신은 비록 친일파였지만, 이 시를 평 하기를 “이 노래는 진실로 작자의 뼈를 깎아서 붓을 삼고, 가슴을 찔러 먹을 삼아서 조국의 강산과 동포에게 보내는 하소연이요, 부탁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조국의 왕도(王都)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조국애에 대한 애절한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작금의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2016~2017) 역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어려운 시기에 봉착해 있는 차제에,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우리들의 애국관(愛國觀)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본문 내용의 말씀 전까지, 바리새인들의 죄를 공격하시고 그들의 화(禍)를 경고하셨으나, 이제 본문에서는 그들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대하여 패망을 개탄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죄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예루살렘 도성이 멸망할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누가복음 19:41-44에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셨다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②.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2번 반복하여 예루살렘을 부른 것은 예수님의 극한 감정의 정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긍휼히 여기시어 통곡하며 애정 어린 심정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 교권자들의 죄악이 예루살렘에서 감행되었기 때문입니다.
③.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가장 강렬하고 순결한 모성애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암탉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품는다는 것은 따스한 어미의 체온으로 새끼를 보호하며,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여러 번’ 방문하셨으며,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반복적인 사랑으로 감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애도하신 것은 심판의 주님보다는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주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자들을 돌로 쳤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결국 독생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3년간은 ‘암탉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품는 것처럼’(시 17:8, 57:1), 예루살렘(특히 바리새인들과 유대 교권자들)을 향하여 사랑의 호소를 했지만, 예루살렘은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애타는 심정으로 한탄하셨던 것입니다. 피나는 상심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성전,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들이 걷던 예루살렘 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애달픈 조국애를 엿보게 됩니다.
이처럼 예루살렘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아름다운 위치(시48:2)보다도 더 아름다운 진리를 받은 거룩한 그 성(城)이 선지자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처절한 기도와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 외에 이처럼 신랄한 말씀은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다윗이 반역하다가 죽은 아들을 향하여 “압살롬아! 압살롬아!”를 연상하게 됩니다. (삼하 18:33) 하여간, 예수님의 피나는 상심의 표현이며,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하겠습니다.
차제에 우리는 애국의 기준을 예수님의 애국 사상에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렇게 인종(忍從)하시면서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셨건만, 유대 바리새인들과 교권자들은 끝내 그 사랑에 대한 항거와 배은망덕(背恩忘德)으로 대응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간도 그렇게 애절한 호소를 했건만(암탉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품는다는 것), 오히려 예수님의 가슴에 비수를 던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는 주 후 70년에 예루살렘은 잿더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거절한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만약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랑의 길을 취하고, 권력정치를 버렸다면, Roma 군대의 징벌이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正義)를 저버린 정권과 권력자는 다 망했습니다. 독일 히틀러와 이태리 뭇소리니 그랬고, 우리나라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그러했습니다. 국정 농단 당사자들의 귀결은 천심(天心)인 민심(民心)을 배반했고, 정의(正義)를 저버린 인과응보(因果應報)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조국애(祖國愛)에 대한 기본 표준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적 차원에서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선별하여 결단해야겠습니다. 그 어떤 가치판단도 애국의 길이 아님을 우리 기독 신자들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데, 우리 기독 신자들이 선봉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는 음성을 항상 들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예수님은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모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성전)이 황폐하여 버린바” 된 것을 보신 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면서 눈물 나는 애도의 탄식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항거하면 우리도 예루살렘과 같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순종을 우리에게 강요치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자발적인 순종만이 값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조국애(祖國愛)에 대한 기본 표준은 예수님‘사랑의 호소(암탉이 날개 아래 그 새끼를 품는 것처럼)와 정의적 차원’에서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과제를 선별하여 결단해야겠습니다. 그 어떤 가치판단도 애국의 길이 아님을 우리 기독 신자들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화적 도약(跳躍)을 위해서 우리 기독 신자들이 선봉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시는 음성을 항상 들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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