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86. 연민의 한 조각

solomong 2025. 7. 25. 10:34

86. 연민의 한 조각

(본문: 마 15:21~28, 막 7:24-30)

 

1). 서론: 1996년 후반 IMF의 찬 바람이 한창 불어올 때, 소설가 김정현 씨의 ‘아버지'란 소설이 시대성을 띤 작품으로 인정받아 100만 부 판매를 돌파하고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작가는 “왜 눈물로나마 메마른 가슴을 적시고 싶어질까. 아버지! 그 가슴 뭉클한 이름마저 향기를 잊어버리고 산 것이 그 얼마인가! 가로등만이 초라한 골목길에서 휘청거리는 발길을 내딛는 굽은 그의 등을 본 적이 있는가! 결국, 이 책의 이야기는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닌 내 가까이에서 숨 쉬고 있는 여러 사람의 진실한 이야기이다.”라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28세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였지만, 늘 한직에서만 맴도는 공무원으로 살다가 35세에 췌장암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죽은 후, 가족의 생계 걱정과 자욱한 현실의 비정함에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고뇌는 같은‘아버지’란 동질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진심을 모르던 딸 ‘지원’의 편지 몇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아빠! 당신은 우리 가족들에게 실망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분노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술에 흔들리는 아버지, 우리는 훌륭한 아버지를 갖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사회적 명성을 얻었습니까. 재산을 축적했습니까. 부디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주십시오. … 추신 : 결코 이 편지로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상처는 아버지의 책임입니다.”

 

이것은 딸의 비수이었습니다. 오늘의 신세대 자녀들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세상 모두를 잃어버린 것 같은 허탈감에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버이날이나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에 즈음해서, 심도 있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혈연공동체인 가정마저, 인간 냄새가 고갈된 현실의 상황을 우리 모두 애절한 심정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란 소설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들의 현실의 이야기는 더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박한 인간의 실존을 뛰어넘는 본문 속의 이 여인은 자기 딸을 위한 온갖 수모와 모멸감을 초월한 한 모정(母情)의 스토리는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그것은‘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께 딸을 위한 ‘연민의 한 조각’이라도 은총을 베풀어주기를 간구한 본문의 말씀입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가나안 여자-막 7:26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은 Palestine의 원주민의 이름으로(창10:15) 뵈니게( Phoenicia=지중해 연안 두로와 시돈을 중심 한 지역을 말함. ) 지방을 유대인이 식민지역으로 다스려 왔습니다. 그래서 뵈니게인은 유대인에 대해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②.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마 15:23) 이를테면 가나안 여인의 애원에 대한 예수님께서 침묵(沈黙)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이 해석은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신 주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베풀지 그 여부를 생각하는 의미로, 가나안 여인의 신앙을 깊게 하기 위해서 묵묵부답하신 뜻으로, 정작 유대인(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불신하고, 이 이방 여인의 환영을 비교하시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라는 여러 가지의 풀이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하간, 주님의 침묵은 그녀의 ‘믿음을 심화’(深化) 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③.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마 15:24) 예수님 편에서 생각해 본다면,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유대인들은 잃어버린 양들이었습니다. (겔 34:6, 요 10:11) 하지만,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을 엿들었을 때, 느끼는 심정은 이방인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인종 차별하는 뜻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 여인이 ‘인간차별의 모욕감’(侮辱感)을 느끼게도 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④.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마15:26)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選民意識)에서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념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으나,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는 감정은 이방인에 대한, 더 솔직한 표현은 직접 듣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격모독’(人格冒瀆)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여인의 응답은 예수님께 향한 신앙, 겸손, 기지 및 인내의 미덕들의 총화(總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부복(俯伏)하면서까지, ‘자기 딸에 대한 애절한 사연을 호소’한 반응은 <침묵, 인간차별 및 인격모독>인 점에 대한 불평과 항변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함에도, ‘개’라는 모욕감도 수용하고, 당연한 권리주장이 아니라, 부스러기도 주워 먹겠다는 겸허함과 그 부스러기라도 넉넉하다는 믿음을 가졌고, 그러면서도 결코 실망하여 후퇴할 수 없다는 끈질긴 인내심의 소유자이었습니다.

 

3). 본론(Context):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실 때, 한 가나안 여인이 사귀 들린 사랑하는 딸을 고치려고 예수께로 나와서 주님의 연민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비하고 인자하신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냉엄한 태도로 그 여인의 애걸을 듣지 못한 척 그냥 묵묵부답으로 지나 가버렸습니다. 모성애(母性愛)의 정열을 가지고, 멀리서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 한번 만나보기를 간청하고 있던 이 여인은 기적적으로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소의 수치가 있고, 어떤 멸시와 천대를 받더라도 사랑하는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예수님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땅끝까지 따라갈 각오로 나아갔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여인을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애원의 절규를 성가시게 여겨 저희끼리 이 여인이 돌아가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안목에는 제자들이 안 보였고, 이 여인의 심정에는 예수님의 연민의 한 조각만 얻기 위하여 계속해서 애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일종의 증오감에서 “저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소서!”가 아니라, “저 여자가 성가시게 구니 쫓아 보내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羊)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이방 여인의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는 뜻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반동적으로 더한층 절하면서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끝내 주님은 극도로 모멸 찬 말씀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자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이스라엘의 혈통인 사람대접을 받는 인격체(人格體)를 의미하고, ‘개’는 가나안 이방 여인이란 구도(構圖)로 해석되어 집니다. 개 같은 이방인에게는 연민도 줄 수 없다는 멸시에 찬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집념은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포기하거나 좌절할 수가 없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신앙, 겸손 및 인내의 미덕들이 잘 조화된 응답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모성적인 사랑을 가진 억세고 재치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인과 예수님 간의 대화를 한번 분석해봅시다.

 

①.여인:“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⓶.예수님: (침묵), (제자들이 중간에 끼여서 “성가시게 구니 쫓아 보내소서!”) ⓷.예수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이방 여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다. ) ⓸.여인: “도와주소서!”⓹.예수님:“여자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⓺.여인:“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⓻.예수님:“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오히려 예수님이 여인에게 항복한 셈입니다.)

 

결국 여인은 소원을 성취해, 그 딸이 그 난치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믿음에 감복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유대인을 위해서 오신 주님께서 여인의 딸도 고쳐주실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제자들이 품게 했습니다. 끝내 여인의 믿음을 더 깊게 하기 위한, 인종(忍從)의 시간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딸에 대한 모성애를 시험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며 묵묵부답하시는 것에 대한 예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방법대로 해 볼 대로 다 해 봐라!”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들의 힘이 소진할 때까지 해봐라.”라는 것입니다. “내 힘이 다 쇠잔하였습니다.” 그러기까지, 주님은 지금도 침묵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은 “인내는 소망하고 있는 자의 가장 큰 예술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악성 베토벤은 "인종! 그것은 괴로운 인생의 안내자다."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개’라는 멸시를 당하도록 하심은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해 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연민을 주시되, 결코 구하는 대로, 첫 마디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연민을 받음에도 고통과 수치라는 대가(代價)를 받을 수 있는 자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얻어지는 것 치고, 값진 것이 없고, 오래 가지 않습니다. 벼락부자, 낙하산 승진, 바락 성장, 벼락출세 등 이런 것은 다 망할 징조입니다.

 

이해와 타산에 젖은 가족 혈연공동체 속에, 어찌 참된 이해와 깊은 사랑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적(敵)으로부터 받는 고통과 고뇌보다 더 가슴을 쓰리게 하는 아픔은,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무명 시인이 쓴 다음의 시는 우리를 크게 감동케 하고 있습니다.

 

“신새벽을 밝히는 이유”: 어렸을 적 주위의 분주함에 새벽녘 눈을 뜨면/ 항상 볼 수 있는 것보다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둔/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기도 소리였습니다./ 모질지 못하여 이런저런 일들에 힘겨워하시면서도/ 해도 뜨지 않은 그 새벽녘을 항상 먼저 밝히시곤 하셨던/어머니를 저는 두었었습니다./오늘 저는 그 새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진한 향내와 함께/ 내 어머니보다 풍요롭고 한가한 삶을 살고 있지만/이 새벽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내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내가 그러하기를 기도합니다./내 자식들이 또한 그러하기를 기도합니다.

‘신새벽을 밝혀서 기도하는 여심’(女心)처럼,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끈질긴 집념으로 결국 연민의 한 조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낙망하여 발길을 돌렸다면, 그녀는 영원히 주님의 연민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래서 이 가나인 여인은 천만 대 이르는, 모든 사람에게 깊은 교훈을 주게 되었습니다. 우주와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을 믿고, 자기의 가장 큰 고민과 비애를 무릅쓰고 간청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연민의 한 조각을 받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이 끈질긴 여인의 믿음은 마침내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도 무너지게 할 그런 신앙이었습니다.

 

“주여!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1/2도 아닙니다. 1/3도, 1/10도 아닙니다. 넘치는 주인의 상이니,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도 족합니다. 그것은 한 조각이 아니라. 전부를 받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모성(母性)을 ‘그믐달 같은 여인’이라고 합니다. 초겨울 깊은 밤, 무섭도록 새파란 하늘에 서릿발이 서듯이 차디찬 그믐달은 볼 만 합니다. 양쪽에 앙칼지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두 귀는 스치기만 하면, 붉은 선혈의 피가 쏟아질 것 같은 감을 느낍니다. 예컨대 역사적으로 성춘향, 유관순, 논개, 에스더, 라합, 룻, 그리고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말입니다.

 

5월의 훈풍처럼 다사롭고, 가볍게 나부끼는 수양버들처럼 부드러운 부모의 정도 있어야 하지만, 이런 그믐달 같은 매섭고 앙칼진 집념, 끈질긴 부모의 정(情)도 특히 자녀의 큰일을 위해서는 우리 부모들은 이런 보도(寶刀)를 일단 유사시는 뺏어 들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남자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고,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자녀를 위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희생해가며, 모욕을 받으면서 우리를 사랑하면서 키우셨습니다. 이런 명절 때면, 더욱 모정(母情)이 그리워지는군요!

 

4). 결론: 본문에 나오는 이 가나안 여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여인이 자녀를 위하는 일이라면, 주님을 향해 포기하지 않는 신앙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모두 이 여인의 아름답고 지칠 줄 모르는 믿음을 본받아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 '연민의 한 조각'을 갈구하면서 살아가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명절 설날이나, 팔월 한가위나, 어버이날을 기하여 우리 부모님, 특히 우리 어머니의 은혜에 감읍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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