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시 96편 설교>:여호와를 '새 노래'로 찬송!
(시 96:1~13)
1). 서론: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은 새로운 양식의 노래나 아직까지 불러보지 않은 새롭게 작곡된 노래가 새로운 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노래란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자의 마음가짐과 관련된 말인 것입니다. 단순히 습관적으로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새롭게 알고, 깨닫고, 경험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감사와 결단함으로 새로운 심령으로 부르는 찬양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새 노래란 과거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부르는 찬양입니다. 과거에도 불렀던 찬양이지만 새롭게 그 의미가 깨달아져서 감격과 감동으로 부르는 찬양이 바로 새 노래입니다. 따라서 새 노래는 신앙생활에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험하고 깨달아질 때 부를 수 있는 기쁨의 찬양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배 가운데 부르는 찬양이 그러한 새 노래로 드리는 찬양과 기도, 예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본문 시는 다윗이 아삽에게 지어준 시(대상 16:8~36)의 일부(대상 16:23~33)와 거의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의 노래로 보는 것입니다. 70인역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귀환후 제2성전의 헌당식때 본문 시로 노래하였다고 합니다. 본문 내용은 1. 지나간 세대의 놀라운 사역자(1~6), 2. 현재 열방의 통치자(7~10) 및 3. 미래에 오실 심판자(11~13)로 나눌 수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인간만의 전용물은 아닙니다. 하늘과 땅들과 바다, 숲과 나무들,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독특한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의 말이 서로 달라 통하지 않듯이 하늘과 땅의 언어가 다르고 바다와 들판의 말이 다릅니다. 짐승과 나무들의 말이 다르고 날짐승과 곤충들의 말이 다릅니다.
그러나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들의 언어는 다른 피조물을 비판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들을 있께 하고 비록 하루의 생명이라도 유지함을 찬양합니다. 만물 중에서도 노래 잘하는 피조물이 있습니다. 마치 사람들 중에 노래의 천품을 타고 난 사람처럼 새들의 고은 노래, 매미의 노래, 귀뚜라미, 풀벌레의 노래 등은 천품으로 타고난 음악가들입니다.
이렇게 만물이 노래한다는 것을 생각함은 상상만이 아닙니다. 노래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입니다. 그러나 노래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사람의 귀에는 통하지 않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귀에는 통하는 노래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노래를 하지 않는다 함은 너무나 인간 표준으로 만물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비록 존귀하게 창조되기는 했으나(시 8:5) 만물 중에 인간만 노래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들 나름대로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시10:2) 비록 인간이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간다."고 했습니다.(시19:4) 참으로 하나님은 만물의 찬송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의 권위도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의 시인들은 찬송을 받으심과 똑같이 만물들의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본문 95:11)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노래 못지 않게 자연 만물이 노래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48편 시인은 이러한 만물의 찬양만을 노래의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의 시인은 이 만물의 찬양에 화답하여 "새 노래"를 부르자고 권고합니다. 왜 새 노래입니까? 무엇이 새 노래입니까? 새 노래와 낡은 노래는 무엇으로 분간합니까?
본문의 시인이 아니라, 시편 98편 시인도 "새 노래"를 부르자고 권고합니다. 이 "새 노래"는 새로운 노래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래하는 정신을 새롭게하자>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정신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인식, 새로운 이해, 새로운 믿음에서 나옵니다. 낡은 형식적인 이해, 단순한 교리적인 반복과 성전에서 습관적으로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앙- 그의 이름, 그의 구원, 그의 영광, 그의 기이한 행적을 자기 혼자 감격하고 노래부를 것이 아니라 열방 중의 모든 만민에게 선포하는 선교적인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이 새 노래는 인간 자신의 신변에 일어난 감격이나 혜택을 노래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구원사에 대한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믿는 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분이신지- 오직 하늘과 땅에는 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표시하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인간의 고마운 점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높이고 기리고 오직 이 분밖에 내게는 없다는 순수한 사랑을 바치며 노래하는 노래가 새 노래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야웨께"란 말을 다른 시편에서보다 많이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노래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새 노래의 성격은 "야웨께" 기쁨과 즐거움을 드려야 합니다. 야웨만이 항상 노래와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본문의 시인의 설명에 의하면 그는 모든 신 위에 뛰어난 가장 높은 신이시니(4절) 이 신은 하늘을 지었고 존귀와 위엄이 그에게 있습니다.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자랑이 되기 때문에 그를 예배하고 그에게 찬양을 드리는 성소는 이 권위, 위엄, 능력,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만 이스라엘만이 찬양할 분이 아니라, 만방 만민이 노래하고 찬양할 분입니다. (7절) 그에게 드리는 찬양과 노래의 예배는 인간이 받은 바 은혜를 감사하는 예물을 가지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 구별되어진 것, 특별히 하나님이 받으시도록 정성을 드린 물질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물질 그것을 하나님이 원해서가 아니라, 예배자의 성의와 정성을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방신들에게는 많은 물질 바쳐 그 신에게 아첨할 수 있습니다. 물질을 드리는 사람이 남다르게 받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그 물질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즐겁게 하기보다 바치는 자신의 복과 행운을 기대하는 이기적, 공리적인 생각에서 물질을 바치며 예배를 드립니다.그러나 하나님은 물질에 매수되는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물질로 만족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시편89편 시인이 말하듯이 "하늘도 땅도 다 주의 것이요. 세계와 거기에 가득한 것은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다."(시 89:11; 비교 24:1; 95:3~4) 바벨론의 고대 시문학 속에는 그들의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많은 물질을 바침은 물론, 그 신들을 표시하는 언어도 아첨적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는 모든 만물의 찬송을 받으시고 또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그 중에서도 인간을 돌보시고 자신의 영광과 위엄이 모든 만민에게 퍼져 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인간의 예물과 제물에 좌우되지 않으십니다.(사 1:11) 그는 세계와 만민을 공정하게 다스리시고 돌보시기 때문에 인간은 다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예배할 수밖에 없습니다.(9절; 시 2:11)
만물의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만물의 질서를 위하여 정의의 판단을 하십니다. 특히 세계와 만민을 공정하게 판단하신다는 것을 본문의 시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13절) 여기 시인의 찬송 주제가 자연에서 인간 세계로 옮겨왔습니다. 이것은 자연 만물의 찬송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판단을 볼 수 있어야 함을 알려 줍니다.
* 이상에서 본문을 풀이해 보았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자연 만물의 찬양에 화답하여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 "새 노래"를 부르자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육의 노래가 아니라 영의 노래입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새 노래는 노래의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래하는 정신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정신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새로운 이해는 새로운 믿음에서 나옵니다.
밝은 형식적인 이해, 단순한 교리적인 반복, 성전에서 습관적으로 부르는 노래는 새 노래가 될 수 없습니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앙을 가지고 그의 이름, 그의 구원, 그의 영광, 그의 기이한 행적에 대하여 자기 혼자 감격하고 노래 부를 것이 아니라, 열방 중에 그 모든 만민에게 선포하는 선교적인 노래를 불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다시 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주 안에서 거듭나 새 사람이 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속받은 자들은 자신들을 구속한 은혜에 감사하여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새 노래를 부르면서 어린양 예수가 인도하는 데로 험한 길이든지 평탄한 길이든지 순종하며 따가갑니다. 유혹과 고난이 많은 세상에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가기 때문에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정절을 굳게 지켜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흑인 영가”가 유명한 것도 모든 억압과 곤경을 노래로 승화시켜 보려는데 있습니다.주께서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 기드온 시내를 건너시면서 “찬미”를 하셨습니다(마 26:30). 사도 바울과 실라도 감옥에서 찬미로 그 아들을 달랠 때 공포를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군인들의 사기를 돋우는 일에 군가는 큰 역할을 합니다. 어떤 운동이나 혁명이 있을 때도 사상을 담은 노래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노래는 그만큼 단결력과 호소력을 불러 일으키는 필수 불가결의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에게도 찬송의 위력은 대단합니다(골 3:16-17). 많은 성도들이 찬송을 통하여 어려운 가운데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어 그들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받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새 노래는 새로운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노래가 달라지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된다면 새 노래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어느날 문득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마음 깊이 와닿게 된다면 어제까지 불렀던 노래라 할지라도 새 노래가 되는 것이지요.
시인이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자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이한 일을 행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기대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구원이 임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은 것 자체가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다니요.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니요! 아!. 그 사랑은 우리가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매일 말씀 속에서, 기도함 속에서,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 속에서 깨달아 힘을 다해, 기쁨으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거룩한 영적인 삶의 제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통치하심을 선포하고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끝
2025. 6. 17.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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