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하나님의 위로
(시94:1~23)
1). 서론: '위로'라는 말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행위입니다. 삶의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진정한 위로의 힘입니다. 이 위로는 인위적인 사람의 행동에서 보다,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 합니다. 우리의 삶속에 있는 좌절과 절망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위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위로의 은혜만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히 세워줄 수 있습니다. 종내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들의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됨을 묵상해 봅시다.
2). 본론(Text): 이스라엘의 적에 대한 하나님의 보수(報讐, 앙갚음)를 부르짖는 본문 시는 하나님의 심판적 권위를 노래하기 때문에 신정시(神政詩)에 삽입된 듯 합니다. 저작의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귀한 때라고 여겨 잡니다. 내용은 1. 하나님의 보수(응징)의 기원(1~15), 2.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으로 되었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에서 "근심"이란 낱말('사아프'란 원어는 걱정과 염려로 마음이 헛갈린 상태를 말함.)은 성서에 많이 나오지 아니하는 말이지만 악인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사는 정직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염려와 걱정을 말합니다. 본문의 시는 복수의 정신이 강하게 나타난 시로서 비복음적인 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시편애서 말한 복수 감정은 인간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으로 보아야 하며 또한 자신의 신앙과 경건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한 나머지 비록 그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생각은 아니하고 불의에 분노하고 악에 항거하는 인간의 정의감에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 악인에게 핍박과 수난을 당하고 있는 시인으로서 그들의 악이 없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저들을 멸망시켜 달라는 생각은 반드시 신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시는 복음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앙적인 솔직함이 나타난 시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근심은 악인으로부터 오는 신앙적인 조롱과 그들의 오만한 말과 행동들입니다. 본문의 시인을 근심케 하는 사람은 "교만한 자"(2절), "악인"(2~3절), "악을 행하는 자"(4, 16절), "악한 자"16절)라 불리는 자이며, 이들이 하는 짓은 "지껄이며 오만히 말하며"(4절), "주의 백성을 짓밟으며 주의 기업이 된 자들을 핍박하며"(5절),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6절), "고아를 살해하며"(6절), "야웨는 보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다"고 말하며(7절), "법을 내세우며 악한 권세를 부리고 있다."(20절)라고 하는 것의 등등입니다.
이들이 하는 말은 교만하고 악한 말을 하며,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학대하며 야웨의 영광과 그의 구원사를 다른 민족들 앞에서 전달하는 특별한 사명을 가진 택함을 받은 백성을 핍박하며 특히 그들에게는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이 추호도 없을 만큼 불의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고대법에서나(사1:15절 이하; 미 3:9절 이하; 암 5:10절 이하; 말 2:5절 등) 가르치고 있는 정의의 구현을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을 빙자하고 온갖 악한 일을 대담히 하고 있습니다. 마치 야웨의 날을 축복의 날로 오해하듯(암 5: 18절 이하) 예루살렘에 예배 때만 참석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으로 안일하게 신앙을 생각하는 사람들(렘 7: 4~7절)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야웨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기 편이 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들의 악행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범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자신감과 자기 경건의 보장을 스스로 잔인할 만큼 자기 의(義)에 넘치는 교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은 보시지 않고, 또 자기들의 악행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이 생각은 하나님을 부정함에도 올 수 있고 하나님을 지나치게 자기 표준에서 이용함에서도 올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신론자인 동시에 반신론자들입니다.
본문의 시인은 이런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대에 또 그러한 악인들 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인에게서 염려와 근심이 떠날 수 없습니다. 순간마다 긴장이요, 순간마다 이 악인들이 쏘는 악담과 모독이 화살처럼 본문 시인의 심령에 꽃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괴롭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수난과 핍박 중에서 사는 본문의 시인을 그의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1절) 라고 본문의 시인은 부르짖고 있습니다. 시인의 암담한 현실을 밝혀줄 빛은 다만 하나님에게서만 올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 위에 공의를 실현하시고 이 땅에 있는 악과 불의를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른 것은 바르다 하시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실수 또는 고의적으로 정의의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공정한 판단을 하십니다. 악인들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고 날 뛰게 하시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을 모르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이 우준한 사람들아 생각 좀 해보라. 이 무지한 자들아, 너희는 언제 좀 지혜로운 생각을 할 것인가?"(8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는 일을 보고 인간의 하는 말을 다 듣고 계십니다. 그는 "귀를 지으신 자요, 또 두 눈을 만드신 분"(9절)이기에,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거슬러 하는 말, 하는 일을 그냥 두실 까닭이 없다는 것이 본문 시인의 확신입니다. "열방을 징벌시고 또 교훈하시는 하나님이시다."(10절)함은 이런 징벌을 당하고 그에게서 올바른 삶의 길을 배우는 사람은 참 복받은 사람입니다.(12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환란을 면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다."(13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 편에 있지 않고 그의 법을 따르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교훈과 징벌을 받을 줄 아는 그의 백성, 그의 기업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본문의 시인은 그 악의 함정 속에서도 피할 수 있었음이 다만 그의 공의의 판단을 하시고 그의 백성을 가까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함이라 감사하고 있습니다.(16~17절)
그의 사랑은 언제나 그의 넘어지는 발을 붙잡아 주신다고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찬송은 "하나님의 위로"에 집증되었습니다. "내게 근심이 많을 때 주의 위안(위로)이 내 영혼은 기뻐하오리다."(19절)와 야웨 하나님은 "그의 산성이요, 그의 피할 바위가 됩십니다."(22절)라고 하나님께 이러한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영혼은 겁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동족에게 "위로하라 위로하라!"고 외친 것도 하나님이 그의 원수를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힘찬 신앙을 물려받은 바울도 "찬송할지어다......모든 환란에서 우리를 위로하라.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위로로서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를 능히 위로하게 하신다."(고후 1:3~4)라고 했습니다.
* 이상과 같이 악인의 악행으로 무죄한 의인이 무수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으로 악인을 징벌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위로로 본문 시인의 영혼은 기뻐한고 했습니다. 이런 아픔이 그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현존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존입니다.
사실이지 인생은 광야를 걸어가는 나그넷 길이며, 수고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이 삶의 유일한 휴식조차 슬픔의 버드나무 아래서 보내기가 일수이지요. 슬픔과 탄식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며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릅니다. 하지만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고, 희망은 마치 밤엔 저주의 서리가 내릴지라도 아침엔 찾아오는 위로의 이슬도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철학자 소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의 표현대로 "삶은 이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힘겨운 여정이자 의무이며 감당해야 할 부역이다."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라고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자만이 그랗게 말할 수 있으며, 즉각적인 효력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고 생각하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했지요.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평강이 곧 하나님의 위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 하셨지요.
고요한 정적이 감돌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슬프게 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듣고 싶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내가 외면했던 악인이 준 나의 상처이기도 하고, 내 안에 남아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고요한 정적은 우리를 깊숙이 끌어 들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나는 여기에 있다. 너와 함께 하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를 요란하게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안아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닥을 치고 있다고 느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는 고독한 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수치와 고통, 아무도 모르게 무너진 믿음의 자리, 그 침묵의 공간에 하나님은 계십니다.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눈빛으로 “괜찮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이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곁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조용한 사람들에게 익숙하며, 화려한 언변보다, 묵상하는 자의 눈빛에서 신앙의 깊이를 보이게 됩니다. 말로 설명되지 않아도 아는 위로, 존재로 느껴지는 사랑, 그 모든 것은 고요함 속에서만 들리는 언어이며,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잘 들리지 않고 고요해야만 들을 수 있습니다. 고요함은 단지 ‘조용함’만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향해 내 마음을 기울이는 자세이며, 세상의 소음을 끄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공간을 여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 공간 속에서 숨 쉬고, 회복은 그 틈에서 움트는 것입니다.
지금, 그 고요함 안에 들어가서 세상의 소음을 조금 끄고, 내 마음의 문을 조금 열고, 그분께 묻지도 않고 기다려 봅시다. 하나님은 고요함을 통해 가장 깊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말보다 강하고, 설명보다 진합니다. 우리를 다시 숨 쉬게 하고, 다시 믿게 하며, 다시 사랑하게 만듭니다. 정적(靜寂)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위로는, 그렇게 오늘도 우리를 살려내게 합니다.
4. 결론: 위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행위입니다. 삶의 고난과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삶의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진정한 위로의 힘입니다. 이 위로는 인위적인 사람의 행동에서 보다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있는 좌절과 절망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은혜만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히 세워줄 수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여정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들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혼자 스스로 믿음의 여정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모든 것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온전한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강(滿腔)의 넘치는 은혜를 입으면서 살아갑시다. 끝.
2025. 5. 26.
山下연구원장: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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