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30.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solomong 2025. 6. 10. 10:28

30.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시 42:1~11)

 

1). 서론: 인간계의 戀人을 사모하는 마음같이, 오랜 가뭄 끝에 기진맥진한 가련한 암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듯이, 혹은 쫓기는 수사슴이 사냥개들을 피해 가면서 다친 곳에서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씻기 위해 본능적으로 강을 찾듯이, 시인은 영적 침체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사모하는 慕情의 정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세계에서도 홀로 애태우는 戀情의 마음은 잠 못 이루는 밤으로 눈을 감아도 구만리 창공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는 몸짓에 베갯잇 소리만 처량하지요.

 

이처럼 본문의 시인은 정상적인 예배 공동체에서 축출되어, 그 자신은 원치 않는 곳으로,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그 이름을 찾아 성소에 모일 수도 없는 이방 지역에 던져진 사람으로서, 그의 현재 삶에서 신앙 자체를 말살해 버리려고 하고, 그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없애버리려는 부당한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원수들이 빈정거리는 소리는 비수로 뼈를 찌르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애절하게도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으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의 고뇌와 고통 속에 처할 때, 하나님이 그리워 목이 타는 심정으로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 시 42편은 43편과 합하여 한편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의 형태나 사상이 같아서 그렇게 보는 생각입니다. 저작의 시기는 사울의 박해 시로 보는 견해와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요단강 동편으로 피난 갔을 때로 추측하나, 압살롬의 반란 때로 보는 것이 더 유력합니다. 1.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마음(42:1~5), 2. 방랑 중에서 하나님을 바라봄. (42:6~11).

3). 본론(Context): 하나님을 연인처럼 사모하는 마음,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입니까. 사랑하는 애인을 그리워서 목말라 애태울 때 비록 그가 순간적 환락을 찾아 육체를 찾아 헤맨다고 해도, 그것은 비록 이기적인 연모의 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육체와 물질, 명예와 권력 등의 행복을 갈구하는 그 마음보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에게 목이 말라 간절히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이 42 시편 시인의 노래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참 아름다운 것을 모를 뻔했습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졌을 때, 그들은 모진 박해 속에서도 이 아름다운 영혼의 갈증 때문에 그들이 비록 고단하고 괴로운 생활이라도, 새 힘을 얻었으며 어둡고 지루한 하루하루를 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교의 세력이 강했던 로마에서 이 새로운 종교를 믿던 사람들은 밝은 태양 아래 살 수 없어 지하 동굴로 숨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와 갈라져야 했고, 종들은 주인에게서 쫓겨나야 했고, 각종 하늘이 주시고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직업에 종사해오던 사람들은 이 신앙 때문에 그들의 생활 방도를 잃어버리고 거리로 방황하면서도 그들 중심에 간절히 사모하는 한 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시편 42편 1절을 생각하고 암사슴이 시냇물 찾듯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 하여서 <사슴> 표를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사슴은 얼마나 연약한 동물입니까!

 

그렇지만 이것이 목이 말라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수난받는 크리스천들의 Symbol로 삼았다는 것은 <생선>을 상징으로 삼았다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고기> 상징에는 교리적인 냄새가 풍기지만, <사슴> 상징에는 간절히 애타는 괴로워하는 영혼을 알려주어 훨씬 더 친근미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목이 말라 애태우는 이 광경은 우리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목이 마른 사슴, 그것도 암사슴, 새끼를 배었거나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암사슴의 경우, 그 애태움이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의 기후를 생각할 때, 아무 곳에서나 물을 구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정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일 년 중 가뭄의 시절(4~10월)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 모든 “와디”(시내)들은 말라 건천이 되어 버립니다. 언덕을 넘고 넘어도, 들판을 건너고 또 건너도 시냇물을 찾기가 힘이 드는 곳입니다.

 

찾아다니다가 지쳐버리면 목을 길게 뻗은 채 쓰러집니다. 간절한 욕망을 남기고, 목이 말라 시냇물로 향한 아름다운 의지를 뻗은 다리처럼 내뻗고 쓰러지게 됩니다. 이 시편 42편 시인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을 이 암사슴으로 표현한 것은 그의 사상이 가장 원만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팔레스타인 사정을 잘 아는 독자들에게는 감동을 주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인이 이렇게 하나님께 목말라 함은 자기 경험에서 나온 것인가? 단순히 상상이었던 것이겠습니까?

 

본문 전체에 흐르고 있는 배경으로 보아 시인 자신은 말할 수 없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정상적인 예배공동체에서 축출되어 그 자신은 원치 않는 먼 곳으로,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그 이름을 찾아 성소에 모일 수도 없는 이방 지역에 던져진 사람 같습니다. “내가 전에는 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4절) 라고 그는 분명히 과거 어느 한때 예루살렘 성소에서 그 예배공동체에서 어떤 지도적인 역할을 해오던 사람이었던 것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러한 종교적인 환경에서는 완전히 차단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마치 현재 하나님 예배가 말살되고 있는 북한 땅으로 사로잡혀간 어느 교회 지도자의 경우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6. 25. 그 당시 사로잡혀 끌리어 다니던 송창근 박사님 같은 많은 목사의 경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일을 생각하고 내 마음이 상한다.”(4절) 라고 하는 것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현재의 핍박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 시인은 단순히 예배드릴 성전이 없다든가, 그가 예배를 인도하고 성도들과 함께 종교적 축제나 그 행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 때문이 아니라, 실지로 그에게서, 그의 생활에서 신앙 자체를 말살해 버리려고 하고, 그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없애버리려는 부당한 핍박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 3절과 10절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사람들이 종일 빈정대오니 밤낮으로 눈물로 보냅니다.”(3절)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날마다 원수들이 빈정대는 소리는 비수로 내 뼈를 찌르는 것 같습니다.”(10절) 라고 하는 것은 시인의 원수들이 철저한 무신론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동시에, 이 하나님을 믿는 자기를 모욕하고 자기의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짓밟는 것 같고, 사랑하는 자식을 자기 앞에서 죽이는 것 같은 가슴을 저미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당하는 이 고통을 그는 한동안 어떻게 해결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불안 속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마르게 사모하는 그 일 자체가 이미 해결을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11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을 찾지 못해 고민했지만, 이제 그는 이 하나님을 목이 타게 찾은 그것이 하나님을 찾는 일이 되어 오히려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이 타게 구하는 이여, 그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노래하는 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시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리워서 목이 타는 이유를 간략히 설명해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감명 깊게 시사해 주는 교훈은 진퇴유곡에 빠진 시인의 애절하게 <하나님을 사모> 하면서 탄원하는 것을 <육하원칙> 속에서 재음미해 보았으면 합니다.

 

‘고라’는 다윗이 성전 예배에서 찬송의 책임을 맡긴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본문의 시는 다윗이 지어 고라 자손에게 찬미를 부르게 한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는 압살롬 반란을 피해서 요단강 동편으로 피난 갔을 때, 시인은 불신자들로부터 종일 조롱 받기를 너를 구원하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네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듣고, 이런 조롱을 받는 시인은 너무 슬퍼 눈물만 흘리고, 음식도 먹지 못해 눈물로 음식을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이전에 예루살렘 성막에 순례하던 일을 회상하면서, 지금 자기의 처지는 예루살렘을 멀리 떠나서 적의 추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정에 있으니 슬퍼하다가,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며 스스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며 낙망하지 말고, 만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으로 앙망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자기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고 고백합니다.

 

사슴이 목이 타서 시냇물을 찾음은 생명이 달린 절박한 문제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음을 사슴의 상태를 비유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의 처한 상황이 매우 급박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죽음에 처할 것만 같음을 나타내 줍니다. 그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리워 목이 타는 심정!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탄원함으로 현재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타는 듯한 이 갈증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시대적으로 보면, 분단국가로서의 긴 세월을 이념적 갈등 속에서 북한은 자주 도전적인 핵실험과 2년 넘게 전염병으로 인한 불안과 고독, 개인적으로는 저마다의 아픔을 지니고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 해서 신앙생활로 위로를 받으며 은혜의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조차도 자유롭지 못하여, 교세는 약화 되어 가고, 개인 신앙생활은 약화나 침몰 되어가는 현실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젠 우리 역시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며 스스로 격려하면서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며 낙망하지 말고, 만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을 더욱 애타게 그리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이 되려면 몇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1. 그 첫째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염려란 신앙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물질계를 향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에서 염려 대신에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마 6:28~30)

 

2.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이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하나님을 默想(思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크게 능력자로 보이며 염려와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3. 세 번째는 하나님께 <懇求>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구체적인 <고민>의 문제들이 작게 보이고 고민이 별것이 아님을 확신하면서 아뢰게 됩니다. 4. 네 번째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게 됩니다. 확고한 믿음을 표현하게 되며,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가지 불안하고 두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러한 문제들을 크게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크게 보시면서 이제 우리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움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에 따라서 우리 다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든 공포 물리치고 여전히 찬송하면서, 다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만이 지극하기를 바랍니다.

 

4). 결론: 본문 시인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그리워하는 마음이요, 기다리는 마음이요, 간절한 마음이요, 애타는 마음입니다.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과 아픔을 동반한 그리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뜨거운 눈물과 깊은 기도와 간구 그리고 찬송과 더불어 물결의 파문처럼 일렁이며 하나님께 받들어 드립시다. 아무리 거센 비바람이 앞을 가리고 폭풍 이는 들녘에 저희가 다시 서성여도 하나님께 저희의 사모하는 마음은 변함없이 한결같음을 보여드립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물 없는 사슴이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없는 우리 인생도 죽음을 맞을 뿐입니다. 날마다 원수들이 빈정거리는 소리는 비수로 뼈를 찌르는 것과 같은 절망의 바닥에 있을 때, 그 또한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 있음을 어찌 잊으리오.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분도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우리가 매일 보좌 앞에 엎드려 기도와 간구 및 찬송해야 할 이유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