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32. 선한 친구와 위선의 친구

solomong 2025. 6. 21. 12:14

 

32. ​선한 친구와 위선의 친구

(본문: 시 41:1~13)

1). 서론: 향기가 좋은 차 한잔을 마시며 닫혀 있던 가슴을 열고 감춰온 말을 하고 싶은 그런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외로웠던 기억을 말하면 내가 곁에 있어 주겠다는 친구이면 더더욱 좋겠지요. 험한 세상에 고비마다 지쳐가는 삶이지만, 차 한 잔의 여유 속에 서러움의 몫을 나누어 마실 수 있고 마음을 알아주는 다정한 친구이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굳이 인연의 줄을 당겨 묶지 않아도, 관계의 틀을 짜 넣지 않아도, 찻잔이 식어갈 무렵 따스한 인생을 말해 주는 친구라면 참 행복하겠습니다. 이 같은 선한 친구가 내가 먼저 되어 주면, 그런 친구가 내 가까이 다가오겠지요!

오늘 본문은 2가지 종류의 친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병자 곁에 다정하고 연민에 가득 찬 정으로 보듬어 주는 친구는 참으로 진실하고 선한 친구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친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문안을 와서는 마음에도 없는 아첨하는 말을 하고, 물러가서는 병자를 죽이려는 간계를 꾸미는 위선자의 악한 모습을 또한 보여줍니다. 굳이 병자가 아니더라도, 인생의 고개 언덕을 땀 흘리며 고생스럽게 넘어가는 친구를 당겨주고 밀어주는 그런 선한 친구를 그리워하기 전에, 나 자신부터 먼저 선한 친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위선적인 이중인격의 친구는 끝내 자멸하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의 시는 제1권의 마지막 시이며, 38~40편의 시와 본문의 시는 내용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때, 친근했던 ‘아히도벨’의 배신과 시인 자신의 병으로 인해 지은 것으로 봅니다. 실로 四面楚歌의 정황 속에서 읊은 시입니다. 내용은 1. 하나님은 진실하고 의로운 자를 도우심(1~3), 2. 위선자의 공격에 직면한 시인 다윗, 3. 승리의 확신입니다. (11~13)

3. 본론(Context): 본문 시의 주제는 병자에 대한 동정이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시인 자신이 무슨 병으로 고생하는지를 밝혀 주지 않고 있습니다. 통증으로 어느 부위가 아픈지를 설명하는 구절도 없습니다. 다만 “병중”, “병상”, “고친다.”,“악한 병”,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라는 구절들이 표현되었을 뿐입니다. (3, 4, 8절) 여기에 가까운 친구로부터 버림받은 비통한 사실로, 쓰라린 아픔으로 앓고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습니다.

확실히 병은 그림자처럼 인간을 따라다니며 그의 삶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것을 피하려고 하지만, 원치 않는 질병은 곧잘 드나들고 있습니다. 물론 병을 앓지 않고 이로 인한 일생의 귀중한 시간이나 정력과 금전을 소비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의 사람은 지병으로 신음하면서 고생을 합니다. 하지만, 병이란 반드시 불행하고 괴로운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은 인간을 고독하게 만들고, 실망케 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손실을 주지만, 병을 이기고 건강케 된 사람은 병력을 통해서 인생의 귀중한 교훈을 얻게도 됩니다. 혹자들은 이를 “삶에 이르는 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투병에서 승리하여 건강하게 되면, 새로운 삶, 멋진 인생, 보람 있는 삶을 영위케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병을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요 11:4)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시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1절) 이렇게 축복의 선언으로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란 “궁핍한 자”로 번역될 수 있기에, 물질적인 결핍보다도 본문에서는 건강치 못하여 어려운 정황에 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곤경이니 궁핍이니 하는 말보다 병으로 딱한 사정에 놓인 사람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을 보이는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병든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피하고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저주까지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딱한 병자들을 따뜻하게 대접하심을 본문의 시인은 강조하여, 자기 병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실망할 일을 당해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긍휼과 돌보심을 즐기고 힘을 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빈약하고 병약한 자를 돌보고 주의 깊게 보살펴 주는 의로운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고난에 대한 기도를 드리면서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사유를 빕니다. 시인 자신의 육체적 병이든, 적의 공격이든 모든 고난의 원인은 영혼의 범죄로 보기 때문입니다. (4절) 시인 다윗이 병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적은 그의 죽음을 고대하며, 악담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병문안을 와서는 마음에도 없는 아첨하는 말을 하고, 물러가서는 시인 다윗을 죽이려는 간계를 꾸미고, 특히 다윗의 장자방(공적 모사꾼)이었던 아히도벨은 배은망덕하게도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 위선자로 이중인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5~10절)

본문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게 타산지석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내용은 양지와 음지와 같이, 첫째로는 병든 자를 선한 마음으로 친구의 아픔을 돌보는 자와 둘째로는 친구의 병문안이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자요, 이중인격의 소유자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을 수 있는 자이며, 후자는 결국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나의 투병기>인 “관속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글을 쓴 故 김정준 목사님은 31세에 목회 중, 결핵으로 마산 요양소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절규하는 기도로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하셨습니까? 주의 일하는데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기도할 때, 주님의 음성은 “네가 여기에 온 목적이 있다. 병에 걸렸기 때문에 온 것만 아니라, 사람들을 돌보라.”라는 말씀을 듣고 당신 자신보다 더 힘든 환자의 수발을 도와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음식을 먹여주고 대소변을 받아주고, 물수건으로 닦아주었습니다. 특히 하루 세 번씩 성경을 읽어주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며 천국을 가르쳤고 때로는 임종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끝내 건강케 되어 퇴원하여 남은 폐 1/4만 가지고 30 여간 여생을 사시다가 67세로 천국으로 옮겨가셨다고 합니다. 자신의 병보다 수용소 어려운 병자를 돌본 선한 친구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어 마지막 행복한 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가 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시인 다윗의 측근이었던 아히도벨의 위선과 이중인격자인 삶의 결말을 봅시다. 아히도벨 만큼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영광과 추락할 수 있는 나락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도 흔하지 않습니다. 당대의 최고 모사이며 왕의 측근이었으면서도 반역의 선봉에 서서 정권을 타도하고 예기치 못한 변수로 죽음을 맞게 되는 아히도벨의 삶을 통하여 인간사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추하게 됩니다.

아히도벨은 이스라엘을 통일한 다윗왕이 신임했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이 왕권을 찬탈하려 시도했을 때, 그에게 모략을 제공한 자 또한 아히도벨 이었습니다. 후에 다윗이 압살롬의 첩자로 심어두었던 후새의 전략에 의해 자신의 계책이 헛된 결말로 돌아가자 나귀를 타고 귀향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던 것입니다. (삼하 17:23)

위선자의 대표적인 행동은 자기를 잘 포장하고 또 남을 쉽게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나 삶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대체로 눈 감고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의 아주 조그만 잘못도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고 비난하고 정죄함으로써 마치 자기는 그러한 잘못한 것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포장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아예 대놓고 책망하시기를,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눅 6:42)고 하셨습니다.

또한 위선자는 남들이 볼 때, 거룩한 척하지만 아무도 없거나 누구도 볼 수 없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자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며, 조그만 이익인데도 그것을 위해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버리기도 하고 취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찾아다니며 그것을 통해 자기는 거룩한 사람이라는 포장과 함께 위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하는 소설은 영국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 L. Stevenson)이 1886년에 ‘이중인격’이라는 소재로 쓴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합니다. 주인공인 헨리 지킬(Henry Jekyll) 박사(의사)는 인간의 인격이 선과 악, 두 가지의 본능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여러 실험 끝에 화학 약물을 하나 만들어 마시고 자신의 인격을 두 가지로 공존케 합니다. 하나는 바로 원래의 지킬 박사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내면중에 존재하는 절대 악의 분신인 에드워드 하이드(Edward Hyde)입니다.

이 둘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낮에는 '지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때의 지킬은 굉장한 신사와 같은 행동거지를 보이지만, 밤에는 '하이드'가 되어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닙니다. 실험의 성공에 고무되어 지킬 박사는 더욱 많은 약물을 만들어 마셔서 자주 하이드로 변신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면의 ‘하이드’를 더욱더 통제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는 지킬 박사의 인격과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냥 사악한 ‘하이드’가 되려 하자, 지킬 박사는 마지막 약물의 힘으로 참회록을 쓴 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이 작품은 ‘이중인격’과 ‘사람의 잘못된 욕망의 무서운 결과’, ‘선과 악’ 등의 대명사로 불리게 됩니다. 사람이 다른 짐승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정을 주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이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바로 ‘선’이라고 하지요. 사람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사람에게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딤전 1:5 )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격체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원론에서, 본문의 교훈을 통해서 다시 한번 진솔한 자기 점검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겉으로만 착한 체하여 거짓으로 꾸미고, 겉과 속이 다른 인성과 삶은 옛사람에서 떠난 자들임을 명심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속죄의 피로 거듭나게 하신 그 은혜에 욕 돌리는 일은 결단코 하지 맙시다. 오히려 친구와 이웃 형제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동일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병약한 자를 돌보고 연민의 정으로 보살펴 주는 의로운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선한 친구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에는 그렇지 못한 위선의 친구도 있다고 애석한 사연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 다윗이 병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적은 그의 죽음을 고대하며, 악담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병문안을 와서는 마음에도 없는 아첨하는 말을 하고, 물러가서는 시인 다윗을 죽이려는 간계를 꾸몄다고 합니다.

특히 다윗의 장자방(공적 모사꾼)이었던 ‘아히도벨’은 背恩忘德하게도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여 위선자로 이중인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고 김정준 목사님은 자신의 병보다 수용소 어려운 병자를 돌본 선한 친구가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어 마지막 행복한 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다른 짐승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고 정을 주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이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바로 ‘선’이라고 하지요. 사람됨에 특별한 이유는 바로 사람에게는 ‘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독 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격체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원론에서, 본문의 교훈을 통해서 다시 한번 진솔한 자기 점검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위선의 친구는 黑心의 가면을 쓰고도 겉으로는 착한 체하여 거짓으로 꾸밉니다만, 이제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적인 탈을 벗은 우리임을 명심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속죄의 피로 거듭나게 하신 그 은혜에 욕 돌리는 일은 결단코 하지 맙시다. 오히려 친구와 이웃 형제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同一視하는 우리 자신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