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언감생심입니다.
(본문 시 50:1~23)
1). 서론: 언감생심( 焉敢生心 )이란 문자 그대로 <어찌 언, 감히 감, 날 생, 마음 심> 자로 풀이하자면 ‘어떻게(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느냐?’라는 뜻으로,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거나, 우리나라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라는 뜻입니다. 언감생심도 유분수이지 감히 초로인생이 하나님과 비교하는 것은 자기 분수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엄위로운 존재와 권위와 능력을 무시하고 인간이 하나님과 같다고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본문 21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고 하나님과 인간이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하나님과 인간이 스스로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한 죄로부터 인간은 타락의 길을 가게 되었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높은 보좌에 올라 가 보자는 생각이 ‘바벨탑’을 쌓았던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오늘날도 자기 분수를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 시의 내용은 49편과 같이 교훈과 지혜 시이지만, 전편과는 대조점들이 있습니다. 저자가 전편은 고라 자손이나 본문은 아삽이며, 내용 면에서는 전편은 지혜문학이지만, 본문은 예언적이고 전편의 대상은 전 세계적이나 본문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내용은 1. 하나님의 부르심(1~6), 2. 참된 제자(6~15), 3. 부도덕한 자에 대한 경계(16~21), 및 결론의 권면(22~23)입니다.
3). 본론(Context): 이스라엘의 악인들이 반도덕적 행위를 감행하여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으므로 저들은 하나님도 자기들과 같으며, 그런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은 상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21절) 라고 하나님과 사람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는 다르다.” (사 55:8)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고 하겠느냐?”(사 46:5)라는 말씀은 하나님과는 아무도 비교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만,”- 감히 하나님과 인간이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하나님과 인간이 스스로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한 죄로부터 인간은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높은 보좌에 올라 가 보자는 생각이 ‘바벨탑’을 만드는 동기였다는 것을 창세기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는 노력을 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그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며(시 2편) 하나님은 없다고 하며(시 10:4)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혀 무시하는(시 28:5) 오만을 범하고 있습니다. 성서의 진리는 항상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라 구별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철저히 배격하고 하나님은 인간과도 다르며, 더욱이 그는 피조물의 세계를 지배하시지, 그것들이 신의 위치로 올라앉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제2, 제3 계명의 정신입니다. 본문 기자도 이러한 이스라엘 신앙의 전통에 굳게 서서,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노래를 부르며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노래를 모든 인간 자신이 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본문 시의 구조 자체가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주제 아래 편성된 것 같습니다. 첫째 부분에서는(1~6절) 이렇게 우리 인간과는 다른 하나님이신 것을 그의 현현-옛날 모세에게(출 3:19), 엘리야에게(왕상 19장), 이사야에게(사 6장), 에스겔에게(겔 1장) 나타나신 것을 통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에서는(7~15절) 하나님을 인간과 같이 생각하는 사고를 시정시키고 있습니다.
즉 바벨론이나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사람을 대접하듯 아첨하고 뇌물을 바치면 인간의 모든 잘못을 덮어 주고 용서하는 신으로 생각하였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지 않으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제물을 바치는 일로써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그가 받는 물질의 다수로 공의나 정의를 굽힐 수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제물 여하에 그의 정의의 법칙을 함부로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리고 있습니다.
셋째 부분에서는(16~23절) 하나님을 인간과 같다고 생각하는 악인들에 대하여 책망하고 그들에 대하여 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 시는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주제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리는 “예언자적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시의 문장은 대체로 하나님 자신이 예배 공동체를 향해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인칭 문장으로 전편의 시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탄식의 시나 찬송의 시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간구하고 애원하는 인간의 일인칭 문장이지만, 이것은 예언자들의 문장과 같이 하나님이 그 말씀을 직접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가 이 독특한 문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인간과 다르다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그는 온 세상 만민, 동에서부터 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기의 명령을 들려주시는 분입니다. (1~2절), 그가 인간에게 나타내시는 모습은 조용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큰 위엄으로 나타내십니다. “그는 삼키는 불을 앞세우고, 돌개바람을 거느리고 오신다.”(3절)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왜 동과 서에서 만민을 부르시고 또 왜 그렇게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그것은 만민을 심판하시고 특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그의 언약의 백성을 불러 모으셔서 그들의 행한 일을 심판하시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4~5절) 무슨 자격으로 이러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는 다만 만민과 이스라엘을 판단하시는 재판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재판의 원칙은 다만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6절)
정의의 재판장으로 인간에게 오시는 하나님 앞에 인간은 다만 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감히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을 인간 자신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는 인간의 물질로 자기의 공의를 바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이 그가 바치는 물질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는 태도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목사들이 신도들에게 헌금을 많이 내어야 은혜를 받는다고 외치는 일을 요즘에 와서 흔히 보게 됩니다.
그것은 제물을 많이 받아야 복을 주는 우상으로 하나님을 타락시키는 죄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12절) 라고 하셨는데, 제사 행위나 제물보다 감사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4절) 다른 시인은 “소와 살진 소를 드림보다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시 69:30~31)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 자신과 같이 생각하는 악인들은 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도둑과 짝하고 음탕한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말, 거짓말을 거침없이 하며, 친 형제간이라도 욕설을 퍼붓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을 어찌 책망하지 않으며, 이들의 죄를 저들 눈앞에 전시하지 않겠습니까? (21절),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너를 찢겠다.”라고 했습니다. (22절)
위에서 본문을 풀이할 때,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주제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리는 “예언자적 시”라고 했습니다. 본문 시의 문장은 대체로 하나님 자신이 예배 공동체를 향해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인칭 문장으로 전편의 시가 이루어져 있어서,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가 이 독특한 문장에 나타나 있다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본문의 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감히 여기에 표현하기도 두려운 그야말로 “언감생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운운하는 것이기에 접어 두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위치와 존재 및 분수를 넘어가서 “언감생심입니다.”라는 말을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사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는 신분 사회는 아니지만, “각계각층”이란 말처럼 사회 구조가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져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언감생심은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무조건 포기하라는 식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언감생심은 이루기 힘든 목표를 세움에도 전혀 노력하지 않거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을 무시하고 여러 단계를 단숨에 올라가려는 허황한 꿈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쓰입니다.
본래 향해야 할 목표나 성격과 다르게 일을 진행하는 경우, 턱없이 모자란 역량을 가지고 너무 원대한 꿈을 꾸는 것, 다른 의도를 가지고 못된 일을 꾸미는 경우 등에도 쓰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 뜻을 품은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여 형편이 어려워지는 것에 대한 자조적인 의미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누구 앞이라고 언감생심 그런 말을 지껄이는가?”라고 하든지,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만, 내 여동생에게 그 친구는 언감생심 말한 번 건너볼 엄두도 못 낼 주제이었다.”
상기 <언감생심>에 대한 예문(例文)을 사회윤리학적 견지에서 설명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G. H. Mead(미국 1863-1894 사회윤리학자)의 인간 이해의 초점은 인간은 ‘사회적 자아’라고 했습니다. 자아(自我)가 자아가 됨은 그 자아가 타자(他者)에 보내 준 몸짓(Gesture)에 대하여 타자의 반응이 보내는 해석을 통해서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몸짓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나는 나의 몸짓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체 아(主體 我, I )는 자발성과 창조성의 원리를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자주의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을 말한다고 했으며, Me의 개념은 타인이 나에 대하여 갖는 Image의 정신적 표현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즉, 타자의 눈을 통해서 비추어진 사회아(社會我)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회 심리학적 입장에서는 자아와 타자 간에 의사 거래(The Transaction)를 한 것입니다. ‘언감생심’에 대한 예문의 언어로 표현한 자가 A라고 한다면, 사회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그는 자기 긍정(I’m OK) - 타인(대화 상대자) 부정(You’re not OK-왕초 병자)입니다.
이 왕초 병자는 생후 2~3년에 형성되는데, 부모로부터 행동양식을 외적 자극(훈계, 규율, 법도, 부모의 의사소통, 목소리의 억양, 얼굴 정서의 표정, 등)을 통해서 경험하면서 성장한 자입니다. 처음에는 ‘옳다’고 느꼈던 부모에 대해 오랜 기간을 지내는 동안에 충분히 잔인성을 포함하고 있는 자세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왕초 병자는 적당한 겸손의 가면으로 숨기지만 증오와 잔인성이 있으며, 칭찬받으면 칭찬을 더 경멸하게 되는 성격입니다.
그러므로 근본 문제는 좋은 부모 밑에서 잘 자라나야 하지만, 대화 상대자인 친구나, 후배나, 사회인에게 <언감생심>이란 용어를 자주 구사하거나, 대화 상대자가 이 용어 사용하는 것을 들으면, 정서적으로 교만, 증오심, 잔인성 등의 악감정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기독 신자들은 교인 형제들과 친구들에게 대화할 때, <언감생심> 등의 용어 구사와 선별을 잘해야 하며,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이스라엘의 악인들이 반도덕적 행위를 감행하여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니 저들은 하나님도 자기들과 같으며, 그런 죄를 범하여도 하나님은 상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21절) 라고 하나님과 사람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기자인 시인은 이스라엘 신앙의 전통에 굳게 서서,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노래를 부르며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노래를 모든 인간 자신이 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의 시초부터 하나님과 인간이 스스로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한 죄로부터 인간은 타락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높은 보좌에 올라 가 보자는 생각이 ‘바벨탑’을 만드는 동기였다는 것을 창세기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엔 하나님이 그 말씀을 직접 들려주는 일인칭의 형식으로 “내가 어디 너와 같으냐?”라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가 문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끝내 하나님은 인간이 드리는 제물 여하에 그의 정의의 법칙을 함부로 바꾸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려 주시며, 정의의 재판장으로 인간에게 군림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인간은 다만 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감히 여기에 표현하기도 두려운 그야말로 “언감생심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운운하는 것이기에 접어 두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사회윤리학적 차원과 사회심리학의 견지에서, 우리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실존과 위치 및 분수를 넘는 “언감생심”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사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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