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27. 신앙과 윤리

solomong 2025. 5. 17. 10:25

 

27. ​신앙과 윤리

(본문: 시 15:1~5)

 

1). 서론: 신앙과 윤리, 종교와 도덕, 예배와 삶, 교회 안의 경건과 교회 밖의 행실, 이 두 가지의 대립은 종교가 시작한 이래 어느 사회에서도 항상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대체로 이 경우는 2개의 명제를 일치시켜 하나의 조화된 삶을 살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치우칠 때가 많았습니다. 신앙적인 일에 기울어지고 보면 윤리적인 일에는 등한히 하게 되고, 종교행사에만 정열을 쏟다가 보면 사람들 앞에서 덕행이 모자라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상생활의 삶을 되는대로 살아도 되는 줄 알고, 기도와 독경(讀經)과 명상에 치우치다 보면, 교회 밖 세속 사회에서 신앙의 빛을 흐리게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잘 보이고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비판과 미움과 원망을 사면 그 신앙은 윤리를 무시한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윤리가 겸비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도록 본문 말씀을 통해서 더욱 교훈을 받도록 묵상해 봅시다.

 

2). 본문의 이해(Text):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바른 생활을 노래한 것입니다. 저작 시기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삼하 6장)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질문형식으로 “누가 주의 장막에 유할 자냐(1절)”에 대한 대답으로 “진실하여 행악하지 않는 자다.”(2~5)라고 하면서, 결론은 신앙과 윤리가 겸비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 시 15편의 시인은 이스라엘 신앙의 특성이 일부 지나친 종교 지상주의, 구체적으로 예배 지상주의자들에 의하여 이지러짐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야웨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 사람,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질문으로 이 시가 시작됩니다. 이 질문은 사람들에게 질의하지 않고 야웨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여쭈어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이미 어떤 사람이 성소에서 예배를 바로 드리는 사람인가를 일러 주셨으므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찬성과 동의를 표시하는 질문입니다. 가령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은,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려고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내 눈을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라.”(사 1:11~17) 본문의 시인도 예배드리는 자의 윤리에 대하여 대체로 이사야의 교훈과 공통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가 “예언자의 교훈을 본받았다.”라고 한 독일의 구약학자 Gunkel 말은 정당합니다. 이 시가 주장하는 바 신앙과 윤리의 관계성은 아모스 (암 5:21 ), 호세아(6:6), 예레미야(7:21) 등의 예언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시인이 주장하는 윤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정직하게 행한다는 것으로, 여기서 ‘정직’은 언행이 흠잡을 데 없이 안전함을 말합니다. 교회에 충실히 다니기는 하지만, 그 말에는 실수가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다른 사람을 멸시할 때, 그를 어떻게 신앙인이라 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행동이 거칠고 난폭하고 잔인할 때, 그의 신앙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흠 잡힐 생활로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둘째는, 정의를 ‘행하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디서 어떤 사람이 보아도 공정하고 타당한 행동을 말합니다. 즉, 편파 심이 없고, 사리사욕에 기울어지지 아니한 삶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이기적인 언행을 삼간다는 것입니다. 셋째는‘진실을 마음으로부터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진실은 거짓됨이나 가식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체면을 앞세우고 이익을 앞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진실이란 때로는 마음에 없는 진실을 가장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혀로 참소하지 아니하고 남을 모함하지 아니한다.’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그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해치지 않는다.’라는 말도 이 시인이 말했는데 이는 친구와의 신의를 저버리고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점은 친구만이 아니라, 자기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훼방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밖에 맹세한 것은 자신이 손해를 보아도 지킬 만큼 신의가 있어야 하고, 돈이 있다고 해서 고리 대금업자 노릇을 하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 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사법권을 가진 사람은 뇌물을 받고 죄인을 석방하거나 무죄한 자를 옥고로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앙 원리에서 떠난 사람을 상대하지 말고, 그 대신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항상 존경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윤리적인 구체적 사항들은 명심하고 사람과 하나님 앞에 흠 잡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예배와 생활을 일치시킨 사람들이요, 이런 사람이야말로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상에서 본문 시인이 말하는 신앙과 윤리가 괴리(乖離)되지 않고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풀이해 보았습니다. 신앙과 윤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치되는 삶을 살기가 어려운 것이 오늘의 우리 자신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날마다 나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부인이 교회당 앞에 있는 어느 집 울타리에 열린 호박이 먹음직하다고 해서 그것을 몰래 따다가 아침 반찬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배는 예배 행위를 드린 그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올바른 삶을 가져서, 신앙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 주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날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 교회당에 가서 감사헌금, 십일조 헌금을 바치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리고,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교회당에서 만나는 믿는 형제들에게 친절과 예의와 사랑을 보여서, 믿는 사람이 얼마나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냐를 보여 주는 기독 신자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하고 의로운 모습이 교회당 밖에서, 날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생활에서, 그의 일터, 그의 직장, 그의 생활 터전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날마다 삶에서도 기독 신자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절대로 예배당 안에서만 국한될 수 없고, 우리의 믿는 행위는 믿는 사람들끼리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일반 불신자들 사이에서 자랑할 수 있는 신앙의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허위요. 우리의 믿음은 가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잘 보이고,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비판과 미움과 원망을 사면, 그 신앙은 윤리를 무시한 신앙입니다. 성서에서 말씀하는 신앙은 그 처음부터 신앙과 윤리가 끊을 수 없는 관계인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계명 정신이 그렇고, 예언자들의 삶의 양상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삶이요, 삶이 신앙이 되는 기독 신자의 확고한 정체성을 수립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성전(주의 성산, 주의 장막)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신앙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만족할 만한 자세가 무엇이냐는 질문(1절)과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윤리적인 덕성을 갖출 내용을 답변하고(2-5), 그래서 신앙과 윤리가 유리되지 않는 삶을 사는 자들은 영원히 요동하지 않는 번영을 누린다는 형식의 내용입니다. (5절)

 

본문의 교훈에 따라서 오늘날 우리도 신앙과 윤리가 괴리(乖離)되지 않고 일치되는 삶을 사는 기독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진실하고 의로운 모습이 교회당 밖과 가정으로 옮겨져서 날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생활에서, 그의 일터, 그의 생활 터전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날마다 삶에서도 기독 신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은 절대로 예배당 안에서만 국한될 수 없고, 우리의 믿는 행위는 믿는 사람들끼리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일반 불신자들 사이에서 자랑할 수 있는 신앙의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허위요. 우리의 믿음은 가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잘 보이고, 사람들의 관계에서는 비판과 미움과 원망을 사면, 그 신앙은 윤리를 무시한 신앙입니다. 성서에서 말씀하는 신앙은 그 처음부터 신앙과 윤리가 끊을 수 없는 관계인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계명 정신이 그렇고, 예언자들의 삶의 양상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삶이요, 삶이 신앙이 되는 기독 신자의 확고한 정체성을 수립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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