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70. 부활 신앙의 의식화

solomong 2025. 4. 21. 10:39

70. 부활 신앙의 의식화

(본문: 행 1:3-4)

 

1). 서론: 러시아는 러시아정교회[희랍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1년 중 봄과 여름은 짧고, 늘 겨울철입니다. 그래서 춥고 눈이 많이 오곤 합니다. 그런 자연환경에서 ‘tundra’지대에 봄이 오면 파릇파릇한 새싹이 대지의 언 땅을 치밀고 생명이 탄생합니다. 그래서 러시아정교회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중심 교리는 '부활 신앙'이라고 합니다.

 

금년도 부활절을 기하여 한국교회는 좀 더 새롭게 움트는 교회개혁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역사적 시점에 당도했습니다. 요 21장 3절엔 시몬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하는데, 이미 요 20장에 훌륭한 경험(부활의 주님을 뵌 것.)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아직 자기들의 새 방향을 찾지 못하고, 할 일이 없어서 3년 전 고달픈 어부 생활을 청산했던 그 갈릴리 바다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1장 3~4절을 통찰력 있게 분석해가면서 상고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행 1:3- “확실한 증거(τεκμηρίοις)”- ‘필연적인 증거’라는 뜻으로,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확고 불변한 표적’이란 뜻으로, 주님 부활의 표징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행 1:3- “나타내사”(ὀπτανόμενος) -주님 당신 자신을 실제로 제자들의 눈에 나타내 보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의 몸은 본래의 몸에서 변화된 몸이었으나, 그러면서도 본래의 특색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요 20:27)

③. 행 1:3- “40일 동안”-부활에서 승천까지의 기간이 40일이란 기록이 이곳 밖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 기간에 하신 일은 주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④. 행 1: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및 회회교 등 성지로 되어 있고, 이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신앙의 터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신 것은, 그 첫째로는 신앙적 환상을 堅持하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신앙적 환상과 열망에 이끌려 주님을 따라 나셨고,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주님 실패의 죽음으로, 이 환상을 잃어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생생한 Vision을 가지라는 유훈이었습니다. 둘째는, 제자들 서로가 단결하라는 교훈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제각기 자기의 갈 길을 간다면, 제자들의 단결은 瓦解되고 교회는 설 수 없기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아야 단결을 굳건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라는 뜻입니다.

 

3). 본론(Context): 추억도 생생한 그 바다로 돌아간 베드로의 가슴엔 희비가 교차했습니다. 그때 지난날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이 귓전을 스쳐 가는 듯했습니다. 베드로·요한·야고보 등의 제자들은 부푼 기대를 안고 예수님을 따르면 정치, 경제적 속박과 빈곤에서 해방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물 위를 걸음,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에서 그들의 기대를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하던 예수께서 유대인의 음모를 받고 로마 권력에 의해 체포되어 십자가에 무참히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메시아적 행운의 시기가 도래했는데,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것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골고다 석벽 십자가를 향해 둘러섰던 무리가 한때 쟁쟁한 명성을 떨치던 예수께서 이제 하잘것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고,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관한 원망과 로마 병정들에게 비난을 퍼부으면서, 도피한 제자들이었습니다. 다른 면에서는, 삶의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어떤 기적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도 품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는 비난을 받는 스승이 되었습니다. 희미하지만 한 가닥 희망조차도 산산조각이 났다고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무력한 예수님! 영원한 실패자 스승님!'이라고 깊은 실망과 좌절에서 방황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가만히 앉아 굶주려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했습니다. 3년 전 예수님을 따라가던 그때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허우적거리는 걸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4장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요한복음 16장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라는 등 여러 차례 부활에 대한 예고와 가르침을 주었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그 무덤은 우주의 새 생명을 죽여서 가두고, 큰 돌로 영원히 폐쇄하려고 했지만, 그 무덤은 그 생명을 영원히 가두지 못했습니다. 그 생명은 돌을 떠밀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생명의 부활 사건을 말합니다.

 

이 봄 계절이 지나간 설한풍에 앙상하던 나뭇가지에, 꽁꽁 언 대지에 새 생명이 움트고 있습니다. 1년 내내 소식이 없던 친척과 친구들 사이에 우의를 또다시 부활시키는 뜻에서 서신을 교환하고, 부활절 주일에는 말쑥한 새 옷으로 단장하여 교회에 나오는 전통을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춘절은 소생과 부활의 계절이긴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생명의 저항 계절이기도 합니다.

 

앙상히 굳은 목피(木皮)를 뚫고 뾰족하게 내미는 그 연하다 못해 액체 같은 새싹 끝을 보면 생명의 저항이 보입니다. 땅 위의 오솔길을 거닐면 마구 짓밟혀 돌처럼 굳어진 대지를 뚫고 돋아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약 2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 나사렛 예수님의 무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체념과 절망을 영원히 추방하고 영원한 숙명의 죽음에서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절망이 있을지 모르나, 예수님에게는 절망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기독 신자의 모든 가치관이 변화를 받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기독교회는 영원한 실패자로 전락하는 것 같으나,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독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또 그것이 튼튼한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의 부활은 “확실한 증거(τεκμηρίοις)” 즉, ‘필연의 증거’라는 뜻으로,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확고 불변한 표적’이란 뜻으로, 주님의 부활 표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교회는 그 지체이며, 그리스도의 구주 됨이 그 생명의 요소라고 하겠습니다만, 그의 구주가 되심에는 그가 만민을 위해 속죄의 죽음으로 돌아가신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이 부활이 없었던들 그의 신성도, 십자가의 속죄도, 모두 허사가 될 뻔했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증명된 그리스도의 구주가 되심에 교회는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핵심이기에 그래서 '부활 신앙에 대한 의식화'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요, 내용입니다. '의식화'란 용어의 개념은 원래 남미 교육철학자인 바울로 프레리(Paulo Freire)가 의식화(意識化) 개념을 "부활절의 경험"(Easter Experience)과 "고통스러운 탄생"(Painful Birth)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란 작품에서, 주인공 네프르도프 백작은 여주인공 카츄샤의 정조를 여지없이 짓밟아 놓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네프르도프의 그 행위로 인해 타락하여 살인까지 하고, 결국 재판을 받고(네프르도프는 배심원이 됨) 시베리아 유형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카츄샤가 시베리아로 떠나는 날, 저 멀리 러시아정교회의 부활절 종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즈음, 네프르도프의 양심에 부활의 움이 터서 시베리아로 같이 유형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경험은 죽고 사는 경험입니다. 일본의 작가 '엔도 슈샤크'의 <내가 버린 여인>이란 소설작품이 있습니다. 주인공 남자와 주인공 여자는 잊지 못할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남자는 무슨 일회용 종이 '컵'처럼 그녀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후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나병이라는 소위 천병(天病)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수도원'에 들어가 요양을 합니다. 다시 진찰을 받은 결과 오진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떠나려고 생각하다가, 그냥 거기 살면서 봉사하기로 하였습니다. 봉사의 일은 ‘계란'을 시장에 가서 팔아 오는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 날 그만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이 소식이 수녀원에 알려지고, 한 수녀가 현장에 달려와서 그녀의 시신을 처리하는 중, 그녀의 가슴에 있는 일기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일기장엔 옛날 자기를 버린 그 남자의 첫사랑에 대한 흔적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수녀는 그녀를 버린 남자에게 우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잊어버렸던 그녀는 죽고, 일기장만 그 남자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그녀의 첫사랑에 대한 고통스러운 흔적을 기록한 감동적인‘러브스토리'이었습니다. 남자 주인공은 그 일기를 보면서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육신은 죽었지만, 남자의 가슴속에서 다시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부활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매년 맞는 기념식 정도로 생각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매년 부활절마다, 새봄과 더불어 새 생명이 탄생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부활절 이후 그간에 아무렇게나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기성 교인들이나, 신앙과는 전연 담을 쌓고 지나던 불신자들이 새로운 생명 의식으로 부활절을 기해 신앙의 움이 터서 교회로 나오거나, 교회나 교계가 타성에 젖어 무력하던 자리에서 훨훨 털고 일어나는 그런 동기가 되는 이 생명의 계절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계는, 교회는, 주의 종들은, 기독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이 '의식화'되어서 참신한 모습으로 새롭게 출생한다는 말입니다. 몇 해 전에 장로교 총회 자유게시판에 어느 목사님이 이런 글을 게재한 적이 있었습니다.<목사 된 것이 이렇게 후회될 수가 있을까>라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맞춤법과 토씨는 수정해서 적어 봅니다. “그냥 평신도로 지낼 걸 괜히 자격도 없는 사람이 목사가 되어 고민만 늘어났나 봅니다. 목사가 되어 ‘노회’(老會)에 들어가 보니, 온갖 불법과 죄악이 정당시 되고 있었습니다.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 상식적인 일도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잘도 통하는 곳이 노회였습니다.

 

참으로 초등학생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의 집단, 야비한 범죄가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편싸움에 눈이 멀었고, 돈이면 환장을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참으로 못 볼 것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큰 교회만 들어가면 제 잘난 듯이 선후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법천지의 노회, 정의와 진실은 간곳없고, 오직 편당 지어 무조건 자기편이면 정의라고 감싸주고, 반대편이면 무조건 짓밟는 행위들이 난무합니다. 그래서 장돌뱅이보다 못한 행동을 서슴없이 감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자기 편 수만 많으면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며, 법이고 질서도 없는 비인간화 된 집단들을 보았습니다.........”(생략)

 

주의 종들부터 먼저 이 부활절에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모든 교회와 기독 신자들은 부활절을 기념하면서도 우리의 삶이 예수를 잊어버리고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계속 생각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가슴에 늘 품어 왔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에 대한 의식화는 말이나 언어의 유희(遊戱)가 아닙니다. 확실한 실천적(Praxis) 행위가 그 전제 조건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사셔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들의 '부활 신앙에 대한 의식화'가 되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에 대한 의식화'는 초대교회의 터전이 되는 '케리그마'(선포)가 예수 부활에 대한 의식화 작업이었고, "약속을 기다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굉장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고통 없이, '능력 있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는 탄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인종(忍從)과 연단을 위한 '기다림의 고통'을 경험해 보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부활 신앙의 의식화'는 <고통스러운 탄생(Painful Birth)의 체험>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영역입니다.

 

4). 결론: '부활 신앙에 대한 의식화'는 '고통스러운 탄생'을 체험한 자일수록 현실에 마구 몰아치는 좌절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천여 년 전에 제자들의 가슴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는 실패자, 스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의 빛 하에서는 회개하고 용감히 일어서서 사도 요한 외에는 주님의 부활의 Kerygma를 증거 하다가, 장엄한 순교의 생으로 마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문자답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쉽고 넓은 길로만, 지름길로만, 우리 삶의 방향을 향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연의 모든 생명은 굳어진 대지를 뚫고, 저항하면서 새 움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그간 우리는 신앙 때문에 오는 고뇌와 고통을 얼마나 오래 참아 왔습니까. 부활한 주님은 지금도 우리 마음의 문을 노크하면서, 우리를 연민의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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