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내가 목마르다.”
(본문: 요19:28-30)
1). 서론: 1970년대 김지하 시인은 유신 체제하에서 민주주의에 목이 말라 <타는 목마름>이란 시를 썼습니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라는 詩지요. 유신 체제하에서 자유를 잃고 억압을 당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깊이 갈망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여기 ‘탄다.’라는 말은 불(火)과 관계된 말이고, '목마르다'는 것은 물(水)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물이 불에 타서 갈증이 극심해서 입안에 불이 훨훨 타들어 가는 것처럼 목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7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날이 어둡기 전에는,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보라! 네 어머니 이니라!”(요19:26-27), 어둠 중에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막15:34), 어두움의 마지막 즈음엔 “내가 목마르다!”(요19:28), “다 이루었다!”(요19:30) 및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고 소위 <架上 7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중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극한 아픔은 버림받은 상태에서 절규로 인해서 피곤함과 동시에, 육체적으로 피와 땀을 흘리셨기에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2). 본론(Text): ①. "내가 목마르다.”(διψάω) -시편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를 응함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영적 고통을 표시 한 것이라면, 이는 많은 출혈로 인한 극한 육적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②.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막15:23) 이는 마취제로서 드시기를 거부하시고, 본문의 신 포도주는 이 최후의 순간에 가벼운 호의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선언을 하시고 주님은 운명하셨습니다.
3). 본론(Context): 예수님의 목마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같이 되더라."(눅22:44)고, 초반의 고통에서부터 생리학적으로 주님께서 피 같은 땀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의학자의 말을 빌리면, 극도의 감정적인 과로 상태에는 작은 모세혈관이 땀샘에서 파괴되어 피와 땀이 섞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어서 2% 정도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철야기도 후, 체포당하시어 가야바와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면서 받으신 정신적인 고통,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시면서 흘리신 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일을 보면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에만 이 엄숙하고 긴박한 순간에 하필이면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을까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많이 흘렸으니 목이 갈한 것은 당연하시기에 사실 그대로 전한 것이라고 보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요한복음서의 위대한 선언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가 그 主題인 것입니다. 이 주장대로 예수님은 초인적인 면을 가진 반면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시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서 눈물을 흘리시며, 죽음을 앞에 두시고 고민 중에 결단을 못하여 절규하셨으며, 아픈 것을 알고 물과 피가 흐르는 육체를 가지셨습니다. 어떤 성경해석자는 영지주의(Gnosticism) 자들의 주장 때문에 당시 기독자들을 혼란케 해서,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였다고 합니다.(요한1서 4:2-3, 5:1, 5,)
그러나 본문의 但書인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 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사.......”(요19:28) 라는 것은 시편 69편을 지적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편의 눈으로 당신의 죽음의 최후를 이해한 것입니다. 이 시편에는 ‘무고한’ 의로운 자가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머리털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아 집안 식구들에게까지 소외되어 쫓겨난 후, 고난이 ‘홍수’처럼 몰려와 그를 죽음에로 몰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그를 학대하여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초로 마시었사오니”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런 역경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갈구하여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목이 마르며 하나님을 바라므로 눈이 쇠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범죄자나 되듯이, 비참한 모습으로 고통 받는 그의 모습 때문에 失足할 수 있는 자들을 염려하여, “주를 바라는 자가 나로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를 찾는 자가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인간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수난자로서의 고통이며, 동시에 자기의 억울함보다 ‘주를 바라는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앞선 대속자의 모습입니다.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사53장)의 모습과 흡사하나, 이사야서는 보는 자의 서술이라면, 시편은 수난자 자신의 말로 되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목마르다!” 이 한마디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와 먼 거리에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버림받은 상태에서 절규로 피곤하여 목이 마른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뜻대로라면 하나님은 끝끝내 침묵하여 이 수난자에게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시며, 내게 돌이키소서!”라고 애원처럼, 주님의 절규에도 철저한 암흑, 냉혹한 현실, 하나님의 일관된 침묵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내가 목마르다!”애절한 부르짖음의 메아리치는 것은 <기다림의 극치>의 소리로 들려집니다. 우리나라 말에 ‘목이 탄다.’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을 때, 곧 바로 ‘사막’을 연상하게 됩니다. 아무도 없이 끝도 보이지 않는 사막, 거기서 길 잃은 나그네는 목이 타서 오아시스를 갈급히 찾아 헤매게 되고, 엄마를 잃은 어린애는 엄마를 찾아 부르고 또 부름으로 목이 마르게 됩니다. 꼭 와야 할 이를 기다리다 지쳐서 목이 탑니다. 단순히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 목마르고 주리는 자도 있지만, <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있습니다. <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不義와 모순의 한 복판에 있는 뜻이며, 죽어도 불의와 타협할 수 없을 때 목이 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목마른 한 장면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향하는 도중 ‘예수님은 행로에 피곤하여’ ‘수가 성’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宿敵關係 때문에 그 여인은 물 한 그릇 드릴 것을 거부했습니다. 지난 역사에 얽힌 인간관계, 우월감과 배타심이 人情의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편 다섯을 바꿔가며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삶을 살아온 장본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목이 말라 물을 청하던 예수님께서는 ‘삶에 대한 갈증’ 문제로 화두를 바꾸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는 말씀에, 마침내 그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막힌 담이 문어지고, 여인은 참 삶의 생수를 만난 환희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渴症은 육체적 원인뿐만 아니라, 주님을 원수로 恥部하고 증오에 찬 인간들 때문에도 목이 말랐으며, 바로 그런 현실에서 참 삶, 참 하나님을 찾아 목이 말랐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목말라하신 것은 육체적 갈증으로 인한 고통의 호소였지만, 그것은 곧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대신 겪으신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사야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하셨을 때, 목마름의 고통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렘 2:13). 예수님께서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그 생수의 근원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한 사전 조치이기도 합니다.
1년전, 우리는 목이 말라 갈증으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대구의 OOO으로부터 감염된 전염병이 전국으로 환산되어, 우리들은 창살 없는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살아가는 생활 터전도, 배움의 학원도 죄다 닫혀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은혜로운 말씀도, 형제간의 나누는 사랑의 교제도 차단된 상황에 당도해 있습니다. 하루 빨리 이 전염병이 박멸되도록 타는 목마름으로 주님께 메어달려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고 일직이 선언하신 주님이셨습니다.
때마침, 고난주간의 최정상인 오늘 금요일에, 우리들의 이 갈증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 친히 먼저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을,이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st. Augustine은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에게로 돌아가기 전에는 평안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목말라하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무엇에 갈증을 느끼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인격과 신앙 여하를 말하는 영적 수준입니다. 다윗이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치 않고서는 결코 바르게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먼저 갈증을 느껴보시면서, 우리의 타는 목마름을 구원키 위해서 고통 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기독자란 하나님을 향해 <내가 목마르다> 고백하면서, 그 고백에 상응하는 삶을 실천하는 우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우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초인적인 면을 가졌음에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면을 보여 주시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위대한 결단을 위한 기도로 땀이 피 방울처럼 떨어지셨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태에서 절규로 피곤하여 목이 마르셨고, 육체적으로는 살을 찢는 십자가상의 형틀로 물과 피를 쏟으셔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모진 고통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근원적으로 구원키 위해서, 우리들의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주님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의 “내가 목마르다!”는 이 애절한 부르짖음의 메아리는 <기다림의 극치>의 소리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말에 기다림에 ‘목이 탄다.’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유한적인 인생살이 삶속에서, 애타며 간절하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며 찾아야 하겠습니다. 진정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진정한 평안이 없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연민에 찬 사랑의 손길을 감지하면서, 우리들의 인격과 신앙의 삶을 매일 매시 하나님께 보여 드리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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