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67. 바울의 律法論

solomong 2025. 4. 9. 10:04

67. 바울의 律法論

(본문: 롬7:1-25)

 

1). 서론: 로마서의 중심명제가 以信得義라는 것은 구약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律法主義에 대한 강한 반박이 로마서 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롬7:4),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라는 강한 표현들 속에 율법과 신앙의 대조는 분명합니다.

 

특별히 로마서의 저자 바울 자신이 한 때 ‘사울’로서 율법에 충실 할뿐만 아니라, 율법에 미쳐서 그 반대자들을 무참히 생명을 앗아갔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철저히 굴복하고서, 悔悟에 찬 그의 진실한 고백인 로마서의 율법관은 그 정체의 정곡을 더욱더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무능성과 그림자를 통해서 참 진리와 빛의 정체인 복음의 도리를 재확인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롬 7:1-6(율법과 그리스도의 비유)-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신. 구약에는 신앙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자주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선민과 하나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했고(사62:4, 5, 호2:2, 3:1), 신약에는 신자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3:29, 엡5:22-23, 계19:9) 본문에서도 여인이 남편이 죽음으로 그의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여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인은 신자, 전 남편은 율법, 그리고 새 남편은 그리스도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②. 롬7:7-13(율법의 본질과 무능성) -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은 본질적으로 죄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범죄 하지 못하도록 막지 못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를 조장하여 살게 하고, 죄인을 죽이게 합니다. 살게 하려는 율법이 도리어 죽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롬7:9의 말씀은 바울이 비참한 율법생활을 돌아보는 그의 自敍傳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유대인의 과정을 따라서 6세경에 율법공부를 시작하여, 12세 경부터는 그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여 소위 “혼에 새기는 율법의 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과정은 끔직스럽게 삶을 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모든 아이들처럼 그는 天眞爛漫하게 살았으나, 율법을 공부한 이후부터는 그 많은 誡命을 지키느라고 고민하던 바울에게는, 그 계명들만이 활개를 치며 살아나고, 바울 자신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는 살고”(άνέζησεν) -“다시 살고”의 뜻입니다. 계명에 이르기 전에도 죄는 있었지만 그때는 잠재했던 죄가 계명에 준해서 다시 활기를 띈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③. 롬7:14-25(율법에서의 파국)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14-20까지 율법에 비추어 본 자아의 무능성은 율법을 시인하면서도 율법이 요구하는 선을 행치 못하니, 자아의 모순이 있고 동시에 율법의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安住하는 자는 언제나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순 속에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죄가 머무는 것은 육체이며, 그 도구는 율법이란 것입니다.

 

롬7:21-25에 바울은 드디어 律法의 破局을 선언하게 됩니다. 즉 선과 악의 2가지 법이 자아 속에서 서로 싸우게 되고, 그 결과는 언제나 악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의 사람의 마지막 절규가 절망의 심연에서 용솟음칩니다. 즉, 2가지의 사람, 2가지의 법의 투쟁은 내 속 사람의 패전과 포로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포로에게 당연히 있을 고민이요, 구원을 위한 호소인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본문 서두에서 율법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남편이 죽음으로써 그의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여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비유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원래 율법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에 새긴 율법이 있었으며(롬2:15),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질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롬1:1:32)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롬7:12, 14)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2가지 목적 하에 주시 것이었습니다. ⑴. 구약시대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임시적인 방편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갈3:24) 율법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히10:1), 참 형상이 오시기까지 임시적인 제사 법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⑵. 이와 같이 임기적인 용도로 수응(酬應)하였지만, 불완전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좇아가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며(롬9:31), 따라서 그 축복보다는 저주를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갈3:10)

 

결과적으로 율법은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두게 되어(롬4:15), 살게 할 율법은 도리어 죽게 함으로(롬7:10) 그 무능성이 露呈(노정)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율법은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임시적인 수요에 응하노라하면서, 도리어 그 무능성이 입증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불완전한 율법은 완전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사람을 인도하는 蒙學(몽학)선생의 역할만 하는 것뿐이었습니다.(갈3:24) 그것이 율법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또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롬3:20), 그 죄를 贖하지는 못하므로 贖罪 주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케 하는데, 그 의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율법이 무엇 때문에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되었습니까. 무슨 이유로 바울은 격렬하게 율법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⑴. 그 첫째 이유는 교회 밖에 있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의 사명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도 아직 율법에 집착되어 그리스도를 배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불완전성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으로 義를 완성할 것으로 믿고(롬9:31), 참 형상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율법은 폐기 될 것(갈4:4)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⑵. 둘째로는 교회 안에 있던 율법주의자 때문이었습니다. 과도기적인 당시, 교회 안에는 믿는다 하면서도 율법의 구속을 벗어나지 못한 율법주의자들이 많았으며, 그것이 초대교회에서 큰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행15장 참조) 믿음은 자아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통해서 자아의 義를 세우려고(롬10:3),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독립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에는 진정한 믿음이란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율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를 반대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반대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도덕을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성결의 교리를 말하는 롬7장 전후에서, 바울은 성결이란 이름하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의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律法主義와 聖潔은 상극적 관계인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스스로 믿음과 대치되어 구원에 이르는 방도가 되려고 하나, 성결은 믿음으로 구원(의롭게) 받는 자들의 당연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구원의 원인은 되지만, 후자는 그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전자는 외적인 조문에 그 표준을 두지만, 후자는 중심의 동기에 중점을 두게 되며, 전자는 인력에 의거하거나, 후자는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율법주의는 첫째 믿음과 정면대적이 됩니다. 둘째로 율법주의로는 율법의 요구에도 영원히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을 떠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순수한 믿음만이 義롭다 하심을 얻게 해 주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만이 성결의 생활에 나아가 율법의 요구까지 완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5:17)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신약당시 유대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를 따라 온갖 형태로 나타나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믿음의 적인 것이었습니다. <오직 믿음>이란 나와 주님 사이를 직통하는 밝은 은혜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흐리게 하고 가로막는 율법주의를 우리는 항상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결론: 원래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에 새긴 율법이 있었습니다.(롬2:15), 율법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히10:1), 임시적으로 부여 된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율법은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두게 되어(롬4:15), 살게 할 율법은 도리어 죽게 함으로(롬7:10) 그 무능성이 露呈(노정)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롬3:20), 그 죄를 贖하지는 못하므로 贖罪 주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케 하는데, 그 의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또한 드디어 바울은 律法의 破局을 선언하게 됩니다. 즉 선과 악의 2가지 법이 자아 속에서 서로 싸우게 되고, 그 결과는 언제나 악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의 사람의 마지막 절규가 절망의 심연에서 용솟음칩니다. 즉, 2가지의 사람, 2가지의 법의 투쟁은 내 속 사람의 패전과 포로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포로에게 당연히 있을 고민이요, 구원을 위한 호소인 것입니다.

 

바울이 격렬하게 율법을 경계한 이유는 교회의 外部와 內部의 있는 律法主義者들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의 사명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도 아직 율법에 집착되어 그리스도를 배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에는 진정한 믿음이란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이란 自我와 주님 사이를 직통하는 밝은 은혜의 길인 것입니다. 이 길을 흐리게 하고 가로막는 율법주의를 우리는 항상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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