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66. 하나님의 義

solomong 2025. 4. 5. 10:41

66. 하나님의 義

(본문: 롬1:17)

 

1). 서론: 일반적으로 ‘義’에 대한 개념은 매우 다양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의’보다 ‘善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습니다. Platon에 있어서 의란 지혜, 절제, 및 용기와 더불어 4대 덕목으로 헤아렸습니다. Greek의 義의 관념은 관습적, 행위적, 법률적, 도덕적 및 종교적이었습니다. 현대철학에서 實存主義는 의가 개인의 주체적 자세와 결단이 행해지는 전체적인 시간적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는 狀況 倫理的 견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으로 유교에서는 의가 국가나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공통규범에 합치하는 행동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불교에서는 의가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이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義>란 그 본성이 인간 구원에 나타난 義란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적인 의나 율법을 행하는 의도 아니요, 하나님의 屬性인 公義도 아니라, 義認(justification)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죄의 상태에서 은총의 상태로 옮기는 행위, 그럼으로써 생기는 인간 상황의 변화, 특히 우리 Protestant Church에서는 하나님이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내리는 사면 행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以信得義)

 

義에 대한 漢文의 ‘義’字를 분석해 보면, <我>字 위에 <羊>字를 올려 놓은 합성어가 옳을 <義>字입니다.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代贖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 각자의 ‘나’(我) 위에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를 올려놓는 자(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義롭다고 稱義하는 것을 하나님의 義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세부사항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다,

 

2). 본론(Text): 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하나님의 義의 顯現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롬 1:17은 ‘마르틴 루터’를 몰아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구절입니다. M. Luther가 로마의 법왕청에서 빌라도의 층계를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홀연히 본문 구절이 그의 머리를 밝게 하였을 때, 그 고행을 중지하고 내려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때 나는 새로 탄생하였고, 열린 문을 통하여 홀연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②.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ῡ)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義, 하나님은 그것을 요구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이 없으며, 또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은혜로 주어지는 은사로서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옳다고 인정받는 <稱義>를 말하는 것입니다. ③. “나타나서”(άποκαλύπτεται) - ‘숨어 있는 것’을 ‘나타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屬性으로서의 義는 구약에서도 이미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는 특수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義는 福音에서 비로소 계속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④.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ἐκ πι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 - ‘믿음에서부터(ἐκ, from, by) 믿음으로 향하여'(εἰς,to), 즉, <from faith to faith>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義와 관련시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義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義의 계시가 계속적인 것처럼, 거기에 응답하는 인간의 믿음의 진보도 계속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처음 믿는 신앙에서부터 견고하고 확실한 신앙을 가진 신앙에로, 신앙의 단계를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하박국 2:4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불의가 강성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이스라엘이 범죄 하기에, 더 악한 바벨론을 통해서 징계하심에 대한 하나님께 항의 할 때에 받은 계시입니다. 요컨대 육적인 고난이 過重해 질 때, 義人의 마음은 믿음에 기울이게 되고,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원하시어서 불의의 강성을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구절은 M. Luther가 <오직 믿음(sola fide)>을 표방하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구약의 어두운 율법시대에서, 하박국은 믿음의 봉화(烽火)를 높이 들었고,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바울에 의해 계승되어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가 되었으며, 또 다시 그것이 ‘마르틴 루터’에 의해 갱생하여, Protestantism의 대강령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박국-바울-루터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보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義人. 信仰. 永生의 3가지의 큰 사상으로 구성되고, 또한 그것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義人으로 인정하시는 사람은 믿음에서(ἐκ) 살고, 또한 영원히 삽니다. 믿음을 떠난 의인이 없고, 또한 믿음이 없이 영생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길은 시대를 따라서 온갖 적들을 만나서 신앙이 희미해지고 무시를 당하고 혼돈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의 적이 하박국 때는 악인의 폭력이었고, 바울에게는 율법주의였으며, 루터에게는 Catholicism의 교권과 전통이었습니다.

 

3). 본론(Context): 義(옳음, 正義)란 모든 사회 계층에서 높임을 받는 美德이지만, 그 관념은 꼭 같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어가 표현하는 의란 도덕적 소질을 가리키고, 헬라어의 의에 대한 개념은 생활 습관이나 관례에서 나온 말로서 행위의 법칙을 의미하고 있습니다.<義(δικαιοσύνη)를 이해함에 있어서 흔히 이 낱말의 어근인 ‘δίκη’(‘바른’)와 그 동의어인 ‘δέμις’를 비교하는데, ‘δέμις’는 보담도 神的이고, ‘δίκαιος’는 인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義’보다 ‘善’이 최고의 덕목이었습니다. Platon은 의를 4대 덕목 중에 하나의 의미로 생각하였으며, Greek 세계의 義의 관념은 관습적, 행위적, 법률적, 도덕적 및 종교적이었습니다. 現代 實存主義 철학에서는 의가 개인의 주체적 자세와 결단이 행해지는 전체적인 시간적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는 狀況 倫理的 견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동양 유교의 義에 대한 견지는 다분히 도덕적이지만, 義보다 仁을 삼강오륜의 근본적인 덕목이었고, 의는 이 도덕률에 비쳐진 단지 ‘옳은 것’이라는 개념이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 義의 관념은 廣義로 사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욥은 완전한 義人이라고 하였고(욥1:1, 8), 에스겔은 노아와 욥과 다니엘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고(겔14:14, 20) 또한 모세와 다윗은 의인으로 간주하였습니다.(민12:6-8, 왕상11:4)

 

그러나 이런 義人은 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졌기에 그들의 의란 상대적인데 불과하였습니다. 구약에서도 결국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의의 표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시51:4) 그리고 구약에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公義와 결합한 것이었습니다.(시98:2, 사45:21-25) 즉 하나님의 義의 출현은 하나님 구원의 성취를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엔 義란 하나님에게나(1요 1:9), 그리스도에게(1요 2:1) 다 같이 사용되어 성부와 성자의 동등을 표시하며, 또한 사람에게 적용되어 그와 하나님과의 정상적 관계, 즉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를 성취하는 것이나(롬6:13, 엡5:9), 사람에 대한 정당한 행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눅1:75, 엡4:24)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엔 감추어진 것이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義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에 첫째로는, 하나님의 屬性을 생각할 수 있고( 롬3:5), 둘째로는, 하나님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약속 이행(롬3:3-4), 죄의 심판(롬2:5),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을 용서하심에서(롬3:25-26)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1:17)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속성적인 의도, 율법을 준행해서 얻는 율법적인 의도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以信得義)

 

한편, 인간 편에서 義를 생각할 때는 윤리적인 의(正義)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 여기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신앙적인 극치의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方法的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롬3:25),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이 다시 결합하여 親子의 관계를 수립하신 것이요(롬8:15, 골1:20), 內容的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그리스도)과의 신비로운 일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義를 채 받은 인간의 의인 것입니다. 이 경지에서 사랑으로 下降해 오는 하나님의 義와 믿음으로 승화되는 인간의 義가 渾然一體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지에서 하나님의 義와 인간 믿음의 義를 交叉的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롬3:21-22, 4:13) 그를 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 인간은 의로운 것이고, 그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依信義認)

 

이 義가 믿음의 의라고 할 찐데, 그 媒介體는 철두철미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4:3, 6, 9, 22) 이런 믿음을 위해서는 그 先行條件으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처럼, “아버지여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라는 단순하고 진실한 고백이 요청되고 또한 그 고백만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터득한 M. Luther의 고백을 소개합니다.“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싫어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말을 철학적으로만 배워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죄인들과 불의한 자들을 벌주시는 분으로 배웠다. 내가 비록 신실한 수도사로서 살았지만, 언제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죄인으로 무거운 양심의 가책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고, 나는 나의 만족만으로는 편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분을 증오했다.

 

그래서 나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나의 양심으로 인해 분노했다. 그리고 나는 타오르는 지식욕 속에서 점점 더 바울에게 집착하였다. 바울은 이 상황에 대하여 무어라 말을 했던가! 밤낮으로 명상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로움으로 말씀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즉 바로 이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로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는 바로 다음과 같은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즉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의인은 살게 되며, 그리고 그것은 믿음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며, 그리고 복음을 통하여 그로인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수동적’인 의가 드러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 나는 제대로 내가 거듭나게 됨을 느꼈고 천국 문으로 들어가는 나 자신을 보았다.”

 

이처럼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속성적인 의도, 율법을 준행해서 얻는 율법적인 의도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以信得義) 그 媒介體는 철두철미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위해서는 그 先行條件으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 죄인들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 그 은혜, 두고두고 滿腔에 넘치는 감사를 드리면서, <오직 믿음>으로 살면서 날마다 聖化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4). 결론: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屬性的인 公義도 아니요, 모세의 율법적인 의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義의 옷을 우리가 입은 것(믿음)을 보시고, 주님 때문에, 예수님을 보시고,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우리 인간 중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됨으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진노를 푸시고, 그냥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진실 앞에서 聖父聖子님께 그 은혜! 그 사랑! 길이길이 감사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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