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신앙과 행위의 조화문제
(본문: 롬4:2-3)
1). 서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楚나라에 ‘방패와 창’을 파는 장사꾼이 방패를 선전할 때는, “나의 방패는 몹시 튼튼하여 어떤 창이라도 뚫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또 창을 선전할 때는, “내 창의 날카롭기는 어떤 물건이라도 꿰뚫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라는 故事成語엔 동시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에 <矛盾>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2)고 하였습니다.
한편,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1)고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양자는 다 같이 창15: 6의 아브라함의 義認을 말하고 있으나, 바울은 단순히 해 구절의 믿음을 지적함에, 야고보는 이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행위(창22장)에 관련시켜 해석하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과 야고보는 신앙과 행위의 어느 한 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두면이 양립된 조화의 문제를 논해 보고자 합니다.
2). 본론(Text): 롬4:2-①.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라는 뜻입니다. 환언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그의 義가 행함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②. 롬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결정적인 가치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후사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으나, 그 언약을 초월하여 하나님 자체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 자체에 절대적인 신뢰와 복종을 하였고,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③. 약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친 것은 신앙의 극치를 표시한 것으로 보겠고,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 바친 속죄의 그림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행함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한 것이란 것입니다. 본 구절은 바울이 말하는바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과 정면충돌되는 감이 있어 많은 논쟁이 야기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결코 믿음을 떠난 것이 아니며, 그 믿음을 입증하는 의미에서의 행함인 것을 생각할 때, 양자는 조화 된다고 보겠습니다. 즉, 믿음은 행함을 도우고, 행함은 믿음을 완성시킨다는 뜻이라고 사료 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에서 난 것이지, 단지 율법이나 수양적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바울이 주장하는 신앙과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위에 대한 표현상의 부조화는 모순과 대립으로, 성서영감에 대한 부인을 한다든지, 하물며 튜빙겐 학파는 야고보의 행위란 바울의 믿음을 부인하기 위함이란 Hegel의 변증법적인 正反合의 범주로 진행된다는 극단적인 성서해석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극단을 떠나서 성서의 조화를 인정하면서도 바울의 입장에서 야고보를 거부하는 견해로, M. Luther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의 편지’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바울과 야고보 간의 상치는 표면적이고 사실에 있어서 양자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문제는 곧 신앙과 행위의 조화이며, 그 해결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개념상 정확한 이해에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신앙에 대한 이해로써, 신앙이란 관념에는 狹義(좁은 뜻)와 廣義(넓은 뜻)의 2가지로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 前者는 중심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 거듭나고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後者는 소위 단지 교회에 출석하며, 교리를 승인하고, 성례의식을 준행하는 등의 소위 교인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에 있어서는 신앙이란 언제나 전자를 말하고, 야고보는 혹은 전자(약2:22) 혹은 후자(약2:19, 26)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문제를 제기하는 ‘행함이 없는 그 믿음’(약2:14)이란 물론 후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자의 엄격한 견지에서 볼 때에, 후자는 신앙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참된 신앙에 행위가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지요. 참(眞)과 거짓(假)이 배치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둘째로>, ‘행위’(행함)에 대한 이해입니다. 신앙의 경우처럼 행위에도 2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에서 유리된 도덕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에 입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의 행위가 이런 도덕적 또는 단순한 선행을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앙을 떠난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그의 생각에 용납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행위란 신앙에서 출발하고(약2:5, 22-24), 그러므로 신앙을 입증하는데 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기본교리에 아무런 변동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야고보는 신앙을 전제하고 있을뿐더러 그의 서신에는 십자가의 구속, 의신득의, 속죄, 부활, 재림 등의 복음적 신앙의 체계가 저류하고 있습니다.(약1:18, 21, 25, 2:1, 8, 10, 22-24, 4:5, 5:7 등). 바울 역시 신앙에 올바른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서신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롬2:6-10, 고후9:8, 엡2:10, 살후2:17, 딤후6:18, 딛3:8 등)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이란 철두철미 신앙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이란 선한 행위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Calvin이 말한 바처럼 “홀로 신앙으로 구원 받는다. 그러나 구원하는 그 신앙은 홀로 있지 않는다.”(Faith alone saves, but the faith that saves is not alone.) 즉 신앙과 행위의 관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平行線的으로 생각할 수 없고, 垂直線的으로 관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행위란 그 신앙의 산물이며, 신앙을 위한 것입니다. 신앙을 떠난 천성적 또는 수양적인 선행은 구원에 참예할 조건은 될 수 가 없습니다. 기독자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또한 결정적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에의 동참자가 됩니다. 그러나 기독자는 이 사실이 이뤄진 후에 일생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향상된 생활에 노력해야 한다고 사료됩니다. 교리적으로 신앙을 義認(Justification)이라 하고, 행위를 聖化(Sanctification)라고 합니다.
이 2가지 사실 중에서 바울은 義認을, 야고보는 聖化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양자의 부조화란 표면적인 것뿐이고, 중심에 흐르는 사상은 완전한 조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문제의 마지막 해답의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보다면, 양자가 보낸 서신의 수신자(대상)의 성격을 규명해 보는데서 더 분명해 집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주로 이방세계(당시 헬라문화권)를 주행하면서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以信得義란 그의 복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반면에,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감독으로서 이미 종교인의 전통과 우월감 속에서 살면서 사실은 그와 반대적인 비행과 의식을 일삼아 왔던 유대인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는 행함(행위)이 신앙은 죽은 것이란 신랄한 규탄을 주어야만했습니다. 이 신앙과 행위는 교회발전사에서 필수적인 요건일 것입니다. 교회 건설 초기에는 바울이 以信得義의 교리를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 교회가 속화되고 타락하여, 교리의 핑계 아래 바리세적으로 퇴패하여 전 교회의 권위가 추락할 때는 야고보의 행위에서 警戒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4). 결론: 바울이 주장하는 신앙과 야고보가 강조하는 행위에 대한 표현상의 부조화는 모순과 대립으로 볼 수도 있으나, ⑴.신앙에 대한 이해로써, 신앙이란 관념에는 좁은 뜻과 넓은 뜻의 2가지로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 前者는 중심적인 것이며 그로 인해 거듭나고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後者는 소위 단지 교회에 출석하며, 교리를 승인하고, 성례를 준행하는 등의 소위 교인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에 있어서는 신앙이란 언제나 전자를 말하고, 야고보는 혹은 전자(약2:22) 혹은 후자(약2:19, 26)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문제를 제기하는 ‘행함이 없는 그 믿음’(약2:14)이란 물론 후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자의 엄격한 견지에서 볼 때에, 후자는 신앙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참된 신앙에 행위가 따라오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지요.
⑵. ‘행위’(행함)에 대한 이해입니다. 신앙의 경우처럼 행위에도 2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에서 유리된 도덕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신앙에 입각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행위란 신앙에서 출발하고(약2:5, 22-24), 그러므로 신앙을 입증하는데 그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신앙으로 구원받는다는 기본교리에 아무런 변동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의 신앙과 야고보의 행위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되는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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