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61. ‘아나니아’ 부부의 不正直-저마다 진실한가를 살피자!

solomong 2025. 3. 27. 11:15

 

61. ‘아나니아’ 부부의 不正直- 저마다 진실한가를 살피자!

(본문: 행5:1-11)

 

1). 서론: 조직신학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二次元적인 존재라고 하겠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교회가 믿는 교리의 圓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십니다. 하나님을 중심하여 모인 기독자들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기적이고 남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기의 생을 완전히 통제하는 생활원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생활의 방향은 언제나 위로 향하는 것입니다.

 

즉, 垂直的으로 하나님과 自我와의 믿음의 관계가 先行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면을 가지지 않는 교회의 모임은 절대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독자는 교회라는 平面的인 관계를 가진 교회공동체의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불신자와 어울려서 사는 더 큰 사회공동체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자는 사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회는 믿음의 훈련장이요, 복음의 증인 노릇을 하면서 사는 생의 터전입니다.

 

본문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교회가 탄생되어 물질생활에 有無相通하는 초대교회 共産生活을 하는 중에, ‘바나바’와 같은 영예를 얻으려는 허영과 僞善에서 재산의 소유를 팔았으나, 사도들을 不正直하게 속이고, 더 나아가서 성령을 속여서 죽음이란 참혹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동기는 믿음이 아니요, 사욕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 가장 가증된 동기에서 감행되는 그 본보기에 대해서 他山之石의 교훈으로 묵상해 보십시다.

 

2). 본론(Text): ①.본문의 배경(행2:1-13, 2:43-47)-‘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소수의 무리가 합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강림하여 초대교회가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말씀 가르침, 성도간의 교제, 함께 먹는 애찬과 성찬, 및 기도가 교회 신앙생활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물질의 내 것과 네 것을 가리지 않고 有無相通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재산을 팔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의 共産生活은 K. Marx가 주창한 공산주의와 비교해 보건데, ⑴.초대교회의 공산생활은 신앙적 열정에서 출발했으나, 공산주의는 정치적 이념에서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⑵.초대교회 공산생활은 내적이며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공산주의는 외적이며 강제적이라는 것입니다.⑶.초대교회 공산생활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며 이를 위해 많은 순교자가 있었으나, 공산주의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피의 역사이었다는 것입니다.

 

위 양자는 다 같이 붉은 피로 상징되고(대속의 보혈과 혁명의 피) 종국적으로 복락을 주장하나(천년왕국과 공산왕국), 그 방법과 양상은 정반대로 대조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공산생활은 순수한 신앙에서 출발한 자연발생이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교회에만 한한 것이었고, 다른 지방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교회가 얼마 못가서 핍박을 받음으로 이 생활도 임시적인 것으로 그쳤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의 청교도 중에서 공산생활 체제를 실행한 적이 있었으나, 곧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도의 理想이요, 천국생활의 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세생활에서 이런 이상을 문자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②. ‘바나바’의 事例(행4:32-37)-초대교회가 유무상통한 공동생활 체제를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연스런 결과요, 어떤 법체제로 강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공동생활 체제에 모범적인 인물이 ‘바나바’이었습니다. 행 4:35의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더라.”라는 말씀은, 행2:45(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에 비해서 구체적으로 발전된 내용입니다.

 

행4:36의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 그 자신이 선지자이었으며(행13:1), 여기에 ‘바나바’가 소개된 것은 초대교회의 유무상통 행위의 대표자란 의미에서 언급되었으나, 그 이상의 의미는 ‘바나바’는 12사도 이외의 가장 특출한 인물이며, 놀라운 신앙인격을 갖춘 교회에서 師表의 대상이 되는 지도자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태생의 헬라계 레위파 유대인이었습니다. 포로기 이후에는 이 제도가 준수되지 못했고, 레위인도 사유재산을 가졌습니다.(렘32:7 이하)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모인 집 주인 ‘마가’가 ‘바나바’의 생질이므로(골4:10), 그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안디옥 교회에서 봉사하던 중, 주의 부르심을 받아 제1차 전도여행을 했으며(행13:2), 바울과 더불어 예루살렘 총회에도 참석했었습니다.(행15:1)

 

그 후 생질인 ‘마가’ 때문에 바울과 결별하기도 했으며, 그 후에 ‘바나바’의 행적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훗날에 바울과 화해한 것은 분명합니다.(골4:10, 딤후4:11) ‘바나바’ 성격의 특징은 그의 관용성과 정직성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바울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정당하고 단호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경건하여, 그는 실로 초대교회 共産生活하는 공동체의 보배로운 존재이었습니다.

 

③. 행5:1-11-‘아나니아’ 부부의 부정직-빛이 있는 곳에 그늘이 있듯이, 성령의 역사가 충만한 곳에 사탄의 활동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바나바’와 같은 영예를 얻으려는 허영과 僞善에서 재산의 소유를 팔았으나, 사도들을 不正直하게 속이고 더 나아가서 성령을 속여서 죽음이란 참혹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동기가 믿음이 아니요, 사욕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 가장 가증된 동기에서 감행되는 그 본보기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공산체제의 무리한 점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의 충만한 곳에도 물질문제에 있어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구제의 불공평성이 문제가 되어 사도들은 물질문제에서 손을 떼기에 이르렀습니다.(6:1-2) 그래서 초대교회의 공산체제는 폐지되었던 것입니다.

 

④. 5:1- “소유를 팔아”- 아나니아의 잘못은 그의 소유를 판데서 출발하였습니다. 소유를 팔고서 그 代價가 생기니, 見物生心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중 얼마를 숨겨 놓고, 사도들에게는 자발적으로 구제행위에 써 달라는 僞善的인 허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도들을 속이는 것일뿐더러, 종국적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씻지 못할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⑤. 5:2- “얼마를 감추매(ἐνοσφίσσατο)- “일부를 떼서 따로 둔다.” 는 뜻으로 여호수아 7:1에도 사용된 낱말로서, 구약의 ‘아간’의 사건과 좋은 짝이 되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다 같이 물욕 때문에 멸망한 것입니다. 신약성서엔 이 곳 외에도 딛2:10에 한 번 더 보이나, 거기에서는“떼어 먹고”(영역엔 ‘도적질 하고’)로 되어 있습니다. 아나니아의 잘못은 구제를 적게 한 것에 있지 않고, 속인데 있었습니다.

 

저는 구제의 명성을 바나바처럼 얻고, 물욕은 억제하지 못하여 속이는 僞善의 수단을 쓴 것이었습니다. 교회 회중의 눈에는 칭찬과 존경스러운 부부로 보였지만, 하나님의 안목에는 僞善者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아닌데 그런체하면서 우쭐대는 것을 주님께서는 가장 큰 죄로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부가 공모하여 인류의 첫 범죄의 공모자인 아담과 하와의 전철을 밟게 되었던 것입니다.

 

⑥. 5:8-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삽비라’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결심이 서기 전에, 회개 할 기회를 부여 한 것입니다. 최후로 살아 날 수 있는 즐거운 순간임에도, 그러나 그녀는 방자한 태도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증스런 위선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비록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의 긴장된 표정과 언성이 무슨 의미인지 예감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묵살하고 끝까지 방자한 태도로 일관하고 말았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말씀의 배경(행2:1-13, 2:43-47)을 먼저 살펴봅시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심에 따라서,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의 무리가 합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강림하여 초대교회가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의 주님 말씀에 대한 가르침, 성도 간의 교제, 함께 먹는 애찬과 성찬, 및 기도가 교회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특히 물질생활에 있어서, 내 것과 네 것을 찾지 않고 有無相通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재산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재산을 팔아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의 共産生活은 K. Marx가 주창한 공산주의와 비교해 보건데, 초대교회의 공산생활은 신앙적 열정에서 출발했으나, 공산주의는 정치적 이념에서 제정 되었으며, 초대교회 공산생활은 내적이며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공산주의는 외적이며 강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초대교회 공산생활은 사람을 구원하는 복음이며 이를 위해 많은 순교자가 있었으나, 공산주의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피의 역사이었습니다.

 

위 양자는 다 같이 붉은 피로 상징되고(대속의 보혈과 혁명의 피) 종국적으로 복락을 주장하나(천년왕국과 공산왕국), 그 방법과 양상은 정반대로 대조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공산생활은 순수한 신앙에서 출발한 자연발생이었습니다만, 단지 예루살렘교회에만 한한 것이었고, 다른 지방에서는 이런 현상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교회가 얼마 못가서 박해를 받음으로써, 이 생활도 임시적인 것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초기의 Puritan 중에서 공산생활 체제를 실행한 적이 있었으나, 곧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도의 理想이요, 천국생활의 한 그림자이었기에, 현세생활에서 이런 이상을 문자적으로 실행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탄의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바나바’와 같은 영예를 얻으려고 허영과 僞善에서 재산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산생활을 위해서 바친다고 하면서, 일부는 감추고 전부를 헌금하는 모양으로 不正直하게도 사도들을 속이고, 결국 성령을 속이는 것이 되어 죽음이란 참혹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기가 믿음이 아니요, 사욕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 가장 가증된 동기에서 감행되는 그 본보기라고 하겠습니다.

 

저들은 구제의 명성을 ‘바나바’처럼 얻고, 見物生心의 물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속이는 僞善의 수단을 쓴 것이었습니다. 교회 회중의 눈에는 칭찬과 존경스러운 부부로 보였지만, 하나님의 안목에는 僞善者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아닌데 그런체하면서 우쭐대는 것을 주님께서는 가장 큰 죄로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부가 공모하여 인류의 첫 범죄의 공모자인 아담과 하와의 전철을 밟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말한 것은 최후로 ‘삽비라’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결심이 서기 전에, 회개 할 기회를 부여 한 것이었습니다. 살아 날 수 있는 즐거운 순간임에도, 그러나 그녀는 방자한 태도로 가증스런 위선을 회개하면서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베드로의 긴장된 표정과 언성이 무슨 의미인지 예감할 수 있었음에도,이를 묵살하고 끝까지 방자한 태도로 일관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他山之石의 교훈을 삼아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속에도 이런 不正直한 면이 있다면,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린 후, 즉시 正直하고 眞實한 삶으로 전환해야 하겠습니다. 인간 공동체의 삶속에서 부정직한 생활의 양상은 결국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다.”(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말은 모든 덕목의 출발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시51:4 말씀에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目前)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義)로우시다 하고 심판하실 때에 순전(純全)하시다 하리다.”라는 말씀은 다윗이 ‘밧세바’ 사건으로, 하나님께 회개한 내용입니다. 인간에게 부정직한 것은 하나님께 부정직한 것이 되며, 하나님께 정직하면 사람에게도 정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전제조건은 그의 신앙이 진실할 경우에 限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나단’ 선지자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회개한 말씀입니다. 정직에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을 하나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두 사람의 다윗으로 갈라져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로 모아진 것은 진실 된 자기에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진실 된 다윗과 거짓 다윗! 즉, 본체인 다윗과 그림자인 다윗의 양면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심리학의 용어로는 참 자기(Real Self)와 공적자기(Public Self)로 나누어집니다. 언제나 공적자기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입니다. 가면을 "배우"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됩니다.

 

시나리오 상의 역할(Role)을 잘하는 배우가 명배우가 됩니다만, 배우의 연기는 공중 앞에서의 그 역할이 거짓된 자기이지, 참된 자기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기독자와 교계 지도자들이 참 자기와 공적자기가 일치하는 삶을 살 때, 참 기독자요, 교계 지도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과 교계는 날로 사회의 못된 것만 배워서 타락의 근원적 문제는 부정직한데서 모든 죄악이 좀먹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자는 항상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을 하시겠는가.”의 질문을 먼저 해 보아야 합니다. 일본 '다게다'란 사람이 독일 관광여행을 단체로 갔습니다. 관광 명소에 버스로 내리자, 독일 소년들이 싸인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중에 Karl이란 소년이 다게다에게 Sign을 부탁하여, 다게다는 자기 만연필로 Sign을 해 주고서, 不知中에 종이와 만연필까지 소년에게 주고 떠났습니다.

 

이 소년은 몇날 며칠 그 만연필 주인을 찾기 위해서 노력 중, 관광회사를 통해서 일본의 다게다라는 사람의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너무 좋아서 아침을 먹고 급히 그 만연필을 부쳐주기 위해 우체국으로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싸늘한 시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일본 다게다 주소로 한 장의 편지와 만연필이 배달되었습니다. 거기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Karl의 어머니인 제가 귀하에게 부셔진 만연필을 전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내 아들이 귀하의 Sign을 받을 때, 만연필까지 갖게 되어서 주인을 찾기 위해 여러 날 고심 중에, 결국 귀하의 주소를 알고 우체국으로 급히 가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인 제가 귀하에게 부셔진 만연필을 전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라는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정신 때문에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일강의 기적을 이룬 근본적 동력은 이 같은 정직에서 기인했다고 봅니다.

 

정직해서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함을 택하고 손해를 보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Christian의 Life Style입니다. 이익을 보거나 출세하기 위해서 정직을 버리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만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돈 좀 벌어보려다가 진실을 잃고, 출세 좀 해보려다가 정직을 내동댕이친다면, 그 때는 양심도 인격도 없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교계나 정계에 잘 살아 오다가, 부정직함으로 불행한 결말로 종지부를 찍는 군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거울로 삼아서, 우리들은 有終의 美를 발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4).결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바나바’와 같은 영예를 얻으려고 허영과 僞善에서 재산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산생활을 위해서 바친다고 하면서, 일부는 감추고 전부를 헌금하는 모양으로 不正直하게도 사도들을 속이고, 결국 성령을 속이는 것이 되어 죽음이란 참혹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동기는 믿음이 아니요, 사욕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見物生心의 물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속이는 僞善의 수단으로, 교회 회중의 눈에는 칭찬과 존경스러운 부부로 보이기 위함이었지만, 하나님의 안목에는 僞善者들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말한 것은 최후로 ‘삽비라’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방자한 태도와 가증스런 위선을 회개치 못하고, 결국 슬픈 종말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不正直을 거울로 삼아서, 우리들의 인생을 정직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정직해야 하겠습니다. 정직의 내 현주소는 진실 된 마음(Real Self) 속에 있어야 하고, 그 표현은 공적자기(Public Self)의 삶 속에서 솔직하고 진실 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假面의 탈은 흉내라도 내지 맙시다! 그리고 終局的으로 하나님께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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