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59. 종과 사도

solomong 2025. 3. 17. 15:29

59. 종과 사도

(본문 딛1:1-4)

 

1). 서론: 바울 서신의 첫 머리에 나오는 문장의 공통점은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δοῦλος) 혹은 사도(ἀπόστολος)라는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특별히 로마서에서는 종(노예)이라는 단어가 47차례나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종(노예)이란 개념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주로 법률적인 의미인 주인의 권력에 종속된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는 곧 로마법이 인정하는 자유인과 대비하여 사용되고 있는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또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는 대부분 주인과 종(신하에서 노예까지)이라는 종속적 관계로 설정되어 왔습니다. 바울은 당시 사회적으로는 자유인이었지만, 그의 서신서의 모두(冒頭)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 1:1) 혹은 그리스도 예수의 종(빌 1:1)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선 통상적인 이해에 의하면, 신하나 종은 자신의 자유를 왕이나 주인에게 일정기간동안 일부만 위탁한 사람이고(봉건사회의 군신관계처럼),노예는 선천적이던 후천적이던 자신의 자유를 어떤 이유에서든지 박탈당한 자(태생적 노비처럼)입니다.

 

본문말씀의 핵심은 자유인이었던 바울이 하나님의 종(노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자신의 정치적 혹은 종교적 자유를 위탁하거나 박탈당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노예가 된 것을 생애 최고의 <영광>으로 여긴다는 것이었고, 그 당시의 노예제도 하에서 사용했던 종(노예)이란 용어를 구사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표현한 것이라고 사료 됩니다.

 

또한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호칭한 것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으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도직을 직접 받았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종’은 비천 비하의 신분을 표시한 것이라면, ‘사도’는 존귀한 신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서 절대적인 순종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자란 영광스럽고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말씀의 뜻을 좀 더 세밀히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하나님의 종(δοῡλος)이요”-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의 종”(롬1:1 빌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1:1), “주의 종”(딤후2:24)이란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만 ‘하나님의 종’이란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종’이란 참혹했던 그 당시의 노예제도 하에서 사용했던 용어를 구사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표현한 것이라고 사료 됩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그리스, 로마시대)의 노예들은 중죄를 범한자이거나, 전쟁에서 패전하여 포로로 잡혀 온 자들로서, 인격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를 ‘살아있는 재산’, ‘살아있는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노예는 어느 시대이든지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최악의 취급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 로마시대엔 정복전쟁으로 야기된 노예들의 인권은 전폭적으로 박탈당한 정황이었습니다. 모든 인격이 유린된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요구된 덕목은 주인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뿐이었습니다. 또한 노예상인들의 노예교역은 조직적 인간약탈이었으며, 노예들을 시장에서 물건처럼, 사고파는 일을 중개한다는 것은 노예제도가 확장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ἀπόστολος)인”-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원어의 뜻으로 성부는 성자를 보내셨고, 성자는 12사도를 보내셨습니다.(요20:21) 고전어에서는 “전권대사”란 뜻이었고, 신약성서에서도 이 뜻은 농후합니다.(엡6:20, πρεσβύω)

 

사도는 원래 ①.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같이 한 자 중에서(행1:21), ②.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이며(마3:14), ③. 이적을 행하고(마10:1), ④.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행1:22)이었으나, 그 후 이 범위는 넓어져 바울과 바나바(행14:4, 14), 야고보와 주의 형제(고전15:7, 갈1:19), 실루아노(살전2:6) 등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갈2:8, 고전15:8-9)

 

바울은 다른 12사도들처럼 地上의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의 경험으로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직접 받았다는 그의 신념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기본 자세였던 것입니다. 하여간 앞부분의 “하나님의 종”이란 표현과는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종’은 비천 비하의 신분을 표시한 것이라면, ‘사도’는 존귀한 신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면, ‘사도’는 주인의 대리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이 상반된 개념이 바울의 신앙인격에서 조화되고, 결실하여 그의 위대한 전도자의 생을 유감없이 마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3). 본론(Context): 바울의 제1차 로마 옥중생활은 2년간(AD.61-63) 고생을 격은 후에, 일단 석방되어 그의 숙원이었던 서반아를 방문하고, 발길을 돌려서 일직이 그의 심혈을 기울인 헬라의 땅과 소아시아지방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때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와 디도가 그를 동반하였으며,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에 머물게 하여 복음을 전도케 하고(딤전1:3),디도는 ‘그레데’에 남겨두어(딛1:5)복음증거를 하게했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바울은 ‘에베소’와 ‘그레데’에서 목회하는 두 제자에게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보냈고(AD.64-65), 계속 여행 중에 ‘니고볼리’로 향하던 무렵(딛3:12) 官憲에게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어 제2차로 투옥 되었던 것입니다.(AD.66-67) 바울은 제2차 로마 옥중생활에서 고요히 그의 최후를 기다리면서(딤후4:6-8), 디모데후서를 기록하여 디모데에게 2번째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를 바울의 ‘목회서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롬1:1, 빌1:1), 디모데 후서엔 “주의 종”(딤후2:24)이라고 하였는데, 유독하게 ‘디도’에게 “하나님의 종이”이란 칭호를 쓴 것은 잘 알 수 없으나, ‘종’(노예)이란 참혹했던 그 당시의 노예제도의 배경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표시함으로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면서 고생스럽게 목회하는 제자에게 犬馬之誠을 하나님께 다 바치라는 간곡한 부탁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당시의 그리스, 로마사회의 노예제도에 대해서 위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좀 더 상술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노예제도는 인간간의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가장 극단적 형태이었습니다. 주인은 노예의 인신과 인격을 전적으로 지배했으며, 노예는 자신의 인신과 명예를 지킬 힘이 전혀 없는 무력한 존재이었습니다. 노예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인격적으로 ‘죽은’ 존재이었기에, 주인은 노예를 물건처럼 다루고 소유할 수 있게 되어서, 주인재산 중에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노예의 ‘무력함’은, 그가 속한 사회에서 자신 외에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어떤 사회적 유대(紐帶)관계가 전부 단절 된데서 비롯했던 것입니다. 노예제도의 발생원인을 본다면, 그 첫째로는 당시 사회의 공동체가 살인이나 반역 등의 중죄를 범한 자에게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일시적이거나 종신적으로 박탈하거나 정지하는 것에서 야기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전쟁포로가 그 원형으로써, 포로들은 자신들의 인격은 고사하고, 생존의 대가로 ‘사회적 죽음’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포로는 본질적으로 그 첫 번째 노예제도의 원인인 중대 범죄자보다도 대규모로 노예제도가 확장되는 중요한 경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출생 시부터 공동체의 귀속과 그 속에서의 권리를 완전히 상실한 채, 주인에게 무능력한 노예 조건이 된다는 것이 더 근원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노예상인들의 노예교역은 조직적 인간약탈이었으며, 노예들을 시장에서 물건처럼, 사고파는 일을 중개한다는 것은 노예제도가 확장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종일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였습니다. 신약 시대에 <사도>라는 말은 파견한 사람의 직접적인 대리자의 자격으로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는 사절을 부를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었습니다. 신약 성서의 맥락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께로부터 파견되어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신약 성경 안에서 이 표현은 구체적으로 예수님 자신과 주님의 열두 제자 그리고 바울과 다른 복음 선포 자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을 묘사하는 데 한 번 사용되어 진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파견되신 분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명을 주어 파견하신 열두 제자를 사도라 하였으며, 열두 사도들은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시는 예수님을 수행하면서 직접 교육과 훈련을 받았던 것입니다. 12사도들은 예수님의 삶, 교훈,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언한 최초의 증인들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본문뿐만 아니라, 그의 서신에서, 그는 열두 제자의 그것과 동일한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부활의 증인으로서, 다메섹 途上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라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사도 베드로도 인정했던 것입니다.(갈2:9, 벧후3:15) )

 

바울은 자기 자신을 즐겨 호칭하기를 <종과 사도>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개념의 낱말은 너무나 이질적인 양면성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종’은 비천 비하의 신분을 표시한 것이라면, ‘사도’는 존귀한 신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면, ‘사도’는 주인의 대리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이 상반된 개념이 바울의 신앙인격에서 조화되고, 결실하여 그의 위대한 전도자의 생을 유감없이 마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울 자신이 즐겨 호칭하기를 좋아 했던 ‘종과 사도’의 개념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示唆해 주는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 역시 죄로 말미암아 사탄의 소유가 되어, 사탄의 노예(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십자가로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탄의 소유에서 구원해 주신 그 크신 구속의 은총을 익히 잘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이제는 구원 받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사탄의 종이 되었던 지난날의 신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종입니다. 그것은 ‘주님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한다면, ‘주인이 함께 하는 자’만이 주인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주인이 함께 하는 것’은 ‘주인, 곧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하나님의 영이’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사항들을 아무 걸림돌이 없이 마음껏 행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실현할 ‘하나님의 종’의 신분이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인간을 위한 구원사역, 곧 ‘신적사역’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내 ‘죄에서 自由를 선포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읍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면서, 진리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同時에,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사도)란 것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보냄을 받은 자"의 중요한 사명과 책임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보낸 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사도로 보낸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확신이 그의 삶 앞에 펼쳐 진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괴롭히는 수많은 공격자 앞에서 그는 인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지만, 그의 사도직을 공격하는 것에는 결코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던 것입니까. 그를 불러 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이 허물어지는 순간, 그의 사역은 무의미하디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께서 <불러 주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질문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각자를 불으셔서 저마다의 삶의 목적을 부여 해 주셨단 것을 앎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의 인생과 매일 매일의 삶의 목적을 '그냥 될 대로 되겠지'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하여 쓸모 있는 인간으로 다듬어 주시고, 내 인생을 의미 있게 살도록 考案하기 위하여 피 흘려 죽기까지 해 주신 그리스도시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원하는 생각을 해야 하고, 행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를 바꾸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변모시키고,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서 우리들 각자를 지금 여기에 보낸 것이다. 이 때에 여기에 보내진 것입니다. 삶을 통한 복음의 향기를 뿜어내야 함은 물론이고, 복음 전파의 전권대사의 직임을 짊어 진 자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구원사역’의 계승자임을 뿌듯한 감격으로 그 사명을 유감없이 감당해 나아갑시다.

 

4). 결론: 바울이 하나님의 종(노예)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가 복음을 전파하여 세운 교회를 위해서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긴다는 고백입니다. 그 당시의 노예제도 하에서 사용했던 종(노예)이란 용어를 구사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표현한 것이라고 사료 됩니다. 또한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호칭한 것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으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도직을 직접 받았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종’은 비천 비하의 신분을 표시한 것이라면, ‘사도’는 존귀한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의 종으로서 절대적인 순종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자란 영광스럽고 존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의무를 강조한 것이라면, ‘사도’는 주인의 대리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종과 사도>라는 상반된 개념이 우리들의 신앙인격에도 조화되고, 결실하여 유감없는 성직자의 <有終의 美>가 되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죄에서 自由를 선포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에 감읍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면서, ‘진리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同時에,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사도)란 것을 다시 한 번 확고한 결의를 다짐하면서, 우리 삶의 前途에 펼쳐지는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거나 타협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구원사역’의 계승자임을 뿌듯한 감격으로 그 사명을 유감없이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