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사울의 막다른 골목
(본문: 행9:1-22)
1). 서론: ‘막다른 골목’이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지경에 이르는 말의 뜻입니다. 이와 유사한 낱말인 進退維谷(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궁지에 몰림), 四面楚歌(아무에게도 도움이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고립된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을 이르는 말) 進退兩難(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매우 곤란한 상태) 등등의 말들이 있습니다.
지금 사울의 처지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였던 길리기아주의 수도 ‘다소’에서 베냐민 지파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나서, 헬라의 철학과 문화에 젖으면서 장성하였으며, 학식으로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엄격한 율법주의의 바리새교인이었습니다. 동시에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진 힘 있는 자로써, 기고만장하게도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열성적으로 기독교도들을 박해함에는 괴수가 되어, 의기양양하게도 다메섹 도상을 지나다가, 그만 막다른 골목에 당도하고 말았습니다.
2). 본론(Text): ①. 9:1- “등등하여”(ἐμπνέω) - ‘들이마시다’, ‘숨 쉬다.’ 호흡할 때처럼 어떤 것이 마음에 꽉 차고 또 그것이 밖으로 나감을 의미하는 것을 뜻합니다. ἐν과 πνέω의 합성어로써 ‘어떤 정신으로 가득 찬 것’을 말합니다. 즉, 사울의 마음속에 주님의 제자들(그리스도인에 대한 적대감정)에 대한 忿心을 말합니다.
②.9:2- “무론 남녀하고”-사울의 포악하고도 결연한 결심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당시 이방 땅의 회당들도 예루살렘 공회의 지시를 받았으므로, 사울은 대제사장의 권력으로 다메섹의 회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적발하여 잡아 오려는 결의를 뜻하고 있습니다.
③. 9:3- “다메섹”(Δαμασκόν) -예루살렘에서 동북 240Km지점(걸어서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4~6일 정도의 거리)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중간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각 국민의 시장이라고 할 만큼 저명하며, 정치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하고, 더욱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여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으며, 따라서 회당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의 수는 5만 명을 헤아릴 정도이었다고 합니다.
④. 9:4- “땅에 엎드러져”-오순절에서 탄생한 교회의 역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전도를 거쳐서, 이제 제 3단계인 복음의 세계화의 대과업을 앞둔 하나님의 준비로 ‘사울’을 降伏 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어떤 사실도 완강한 사울을 땅에 엎드리게 할 수 없었는데, 참 빛이신 그리스도시며(요일1:14),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시며(고전 15:8), 모세가 ‘시내 산’에서 본 것과 같은 하나님의 威嚴 앞에서 사울이 굴복한 것을 뜻합니다.
⑤. 9:5- “주여 뉘시오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울은 직감적으로 자기를 부르신 이가 초자연자란 것을 느꼈고, 존경과 두려움이 마음에 찬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이다.”(Ἐγώ εἰμι)는 강조적인 표현으로 神性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사울과 그리스도의 첫 對話요, 큰 대화라고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사울의 본명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그의 선조인 사울 왕을 따른 것이며, 동시에 로마 이름으로는 바울이라고 하였는데, 복음 선교에 헌신한 이후부터는 바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였던 길리기아주의 수도 ‘다소’에서 베냐민 지파의 명문가문에서 출생하였으며, 헬라의 철학과 문화에 젖으면서 성장하였으며, 학식으로는 다소와 아덴에서 기본학업을 수련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예루살렘으로 건너가서 유대율법과 신학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엄격한 율법주의의 바리새교인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져서 로마천지를 활보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권자들로부터 기고만장하게도 그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에는 괴수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도에 대한 그의 박해의 열정은 본문 말씀에서 언급했듯이, “殺氣가 등등하여”라고 표현할 정도이었습니다.
독살스러운 기운이 가득차서 그가 숨 쉴 때마다 독기가 서리는 忿心을 내뿜을 정도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엔 “무론남녀하고” 포박하겠다는그의 포악스럽고 결연한 결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방 땅의 회당들도 예루살렘 공회의 지시를 받았으므로, 사울은 대제사장의 권력으로 다메섹의 회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적발하여 잡아 오려는 결의로, 의기양양하게도 다메섹 도상을 지나다가, 그만 막다른 골목에 당도하고 말았습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은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는 오순절에서 탄생한 교회의 역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전도를 거쳐서, 이제 제 3단계인 복음의 세계화의 대과업을 앞둔 하나님의 준비로 ‘사울’을 降伏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이며 인간적인 어떤 사실도 완강한 사울을 땅에 엎드리게 할 수 없었는데, 참 빛이신 그리스도시며(요일1:14),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이시며(고전 15:8), 모세가 ‘시내 산’에서 본 것과 같은 하나님의 威嚴 앞에서 사울이 그만 굴복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여기까지 이르게 된 그간의 사울의 속마음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하십시다. 사울의 항복(회심)은 그간 스데반의 사건이 그의 뇌리에 도무지 살아지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나쁜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죽을 수가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그의 머리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사울의 내적투쟁 속에서 善惡에 대한 갈등이 요동치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때, 인간의 심리는 본래적인 선한 양심에로 돌이키지 않으면, 그 의심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기 초지의 정당성을 입증키 위해서는 더욱 열성적으로 강행하기 마련입니다.
이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사울의 Id(本能)는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 -전통적 바리새파의 율법으로는 죽여야 한다는 本能이었습니다. 그의 Superego(超自我)는 “스데반이 최후로 죽음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봐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면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의 미움을 오히려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얼마나 의로운 사람이었더냐!” 하면서 사울의 마음속에서 良心의 소리가 사울의 Ego(自我)에게 압박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Ego는 “아니냐! 스데반은 모세를 모독했어!(유대민족주의)그리고 하나님을 모독했어!(전통주의)”라고 외치면서, 더욱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인을 죽여야 한다면서 살기가 등등하게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울의 심경은 더욱 복잡산란 하였으며, 스데반이 위협, 고난, 죽임을 당하면서도, 용서하는 그 침착성을 보면 그 비결은 그가 정의롭기 때문이라는 Superego의 소리는 사울의 Ego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메섹 도상에 이르러,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위와 같은 사울의 내적 갈등이 예수님께 항복하는데 奏效했던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다메섹 도상의 막다른 골목이라는 통로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다보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을 四面楚歌, 進退維谷 및 進退兩難이란 표현으로 사면이 막혀, 出口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은, 절망과 불행의 시작이 아니라, 非常口가 열리는, 시작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도상에서 홍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당도하여 하나님의 인도로 비상구를 통해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다른 골목은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오는 경우가 전부입니다. 외부적 요인은 우리를 모함하고 넘어뜨리기 위한 사탄의 함정이라면, 내부적 요인은 우리들 자신의 욕심과 죄악으로 오는 경우입니다. 특히 이 내부적 요인은 하나님의 攝理에 의한 것입니다.
<사울의 막다른 골목>은 하나님께서 바울로 소명하여 복음의 특별하신 사명을 맡기기 위한 준비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큰 그릇의 회심이 복음 역사의 일대전환을 성취시킨 사건이었다는 것을 알고도 남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와 간증이 3번이나 반복하여 거론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본문, 22:3-21, 26:)
막다른 골목은 종착역이 아니라, 항상 주님께서 기다리며, 동참하시는 영역입니다. 원수의 모함에서 억울하게 오는 곳엔 은혜와 자비로 비상구를 열어 주실 것이며, 우리들 각자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면, 용서를 구하는 회심의 눈물로서 도약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게 하십니다. 사울의 경우처럼, 내적 요인의 <막다른 골목>은 전후를 다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주님께서 새 길을 인도하기 위한 Sign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4). 결론: 우리들 인생길에 있어서 가다금 <막다른 골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고요히 걸어 온 인생길을 정리하면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산 인생임에도 이런 절벽에 임했다면, 이는 주님께서 같이 아파하고 계시기에 비상구를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 살아온 내 인생 길이라면, 다소곳이 주님께 눈물에 젖은 기도로 뉘우쳐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내적 요인의 <막다른 골목>은 悔心을 기대하는 하나님의 Sign으로 알고, 즉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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