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8)

53. ​기미년 3.1운동과 한국교회

solomong 2025. 3. 1. 11:18

53. ​기미년 3.1운동과 한국교회

(본문: 눅4:16-19)

 

1. 서론: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읽으시며, 당신 자신의 때-메시야의 사명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말씀하시는 뜻으로, 은혜의 해의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즉, 가난한 자, 잡힌자, 피압박자 등의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불쌍한 약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이 글을 올리는오늘은 78주년의 광복절입니다만, 또한 1919. 3. 1. 기미년 독립만세를 부르던 104주년을 회고하게 됩니다. 우리 선열들은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허여 본문에 나타난 <자유의 정신을 절규한 날>입니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한 한국교회와 기미년 3. 1.독립운동과의 상관관계를 신앙적 차원에서 묵상해 볼까합니다.

 

2. 본론: 먼저 요약해서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배경부터 생각해 봅시다. 1783년에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이승훈이가 가톨릭 신자로서 처음 영세를 받고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 첫발걸음이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을 상류층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서학”으로 받아들여 하나의 학문으로 출발했습니다. 당시 “남인”들이 정치적으로 “서인”들에게 실권(失權)한 처지에 하나의 서양문명의 힘을 의지하기 위해 점차 믿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에, <황사영백서사건>있었습니다. 대원군이 1801년에 가톨릭 종교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가톨릭 신자로서 북경에 주재하고 있던 서양 가톨릭 신부에게 흰 비단에 이왕조의 박해를 중단하고, 포교를 자유로 할 수 있도록 서양함대가 우리나라 서해안에 와서 협박하도록 쓴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중도에 발각되었고, 그 후 대원군 박해는 더 극심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첫 수치스런 사대주의사상의 그 단면을 보여 주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천주교 대박해가 1866년에 대원군에 의해서 비참하게 야기 되었고, 영국에서 온 장로교 목사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1885년 4월 정식으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라 목사가 인천항에 도착함으로 한국교회의 신교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아시아 주변의 정세와 역사적 상황은 20C.에 들어서자, 일로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에 한일합병이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게 되고, 1919년 1월 20일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33인이 모여서 한말의 비운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을 얻어 결국 1919. 3. 1.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민족적 독립투쟁의 피 맺힌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이리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급속도로 우리민족에 마음에 쉽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문화를 진작시키고, 주권을 읽은 나라의 자주독립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일로전쟁, 청일전쟁에서 우리민족이 비로소 정신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간 쇄국정책으로는 나라의 힘을 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제국주의를 쳐부수고,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문명을 받아들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일어났고, 이 때 한국의 기독교가 이 민족의 요구에 부응하는 충족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민족의 지도자요 기독교인이었던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이상재, 안창호 제씨 등이 사회적, 정치적 근대화에 앞장을 섰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기독교가 어떤 개개인의 종교적 구원을 가져오는 그런 성격의 신앙이라고 하기보다, 혁명적이고, 행동주의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기독교의 사회적 관심에 매력을 느껴 기독교 속에서 나라를 개화하고, 근대화를 재촉하는 정신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이지, 기독교는 언제나 2가지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인데 이는 마치 불교의 <소승(小乘)불교와 대승(大乘)불교> 비슷한 면이었습니다. 이때의 기독교는 사회구원이 더 강했다고 봅니다.

 

19C. 동양의 상황과 한말의 비운과 더불어 기독교를 사회적 정치적면에서 이해하려고 했기에 기독교가 종교적 제도나, 집단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제도나 집단으로 이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가 근대적 가치관을 도입해 들이는 매개체(대리기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유와 인권사상이 도입되고, 교회를 중심해서 봉사와 박애사상, 남녀 평등사상, 민주주의 제도 및 선교학교(Mission School)를 통한 민족의 가슴 속에 서서히 기독교가 파고 들었던 것입니다.

 

1919. 기미년 3. 1. 운동은 개신교의 정치적 관심의 그 절정에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교회는 독립운동의 온상(溫床)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 초창기 신앙 양상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특이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곧 개화사상과 애국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말과 동일시(同一視)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이런 배경 하에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개화하기 위해서 관심을 갖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한국교회가 이 민족 역사 앞에 크게 공헌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미년 독립운동이 실패하자, 그 정반대 현상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날로 심해지는 왜정의 압제와 핍박 속에서 교회는 어쩔 수 없어, 사회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사회와 국가를 향한 교회의 관심은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통적인 토속신앙인 샤마니즘(Shamanism)이나, 불교적인 사상과 타협해서 개인주의적이고, 타계적(他界的)인 피안(彼岸)의 교회신앙으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천당이나 가자!”라는 구호가 먹혀들어 갔고, 미국선교사들은 나라를 잃고 서러움에 복받쳐 울고 있는 민족의 절망감과 좌절감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한국교회를 종교적 환상(幻想)의 나라로, 의식적으로 끌고 갔다고, 기독교사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한 한국교회 신앙의 잘못된 방향의 틀을 잡고 말았다고 하겠습니다. 현실의 삶을 외면한, 신앙과 삶이 유리되는 한국적 신앙의 양상을 형성하는데 그 전환점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기미년 3. 1. 운동전후해서 교회신앙이 영향 받은 명암(明暗)이라고 하겠습니다.

 

해방과 더불어 출발한 자유당 정권의 실세이었고,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기붕)의 독재정치, 그리고 6. 25. 동족상잔 속의 위기가 몰고 온 한국교회의 각성, 신앙의 열성(기벽기도 시작),부흥회, 피난민에 대한 교회의 배려, 및 군부독재정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갈구에서 일어난 군사문화 타도(구교가 더 신교보다 국민에게 호응을 얻었음.) 그리고 지금의 시장경제체제의 교회의 배금사상 등을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2008년 현 시국은 장로 대통령을 탄생시키기 위한 한국교회 강단이 다소 정치적인 ‘케리그마’가 있었다는 점도부인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 중심의 정치적인 정당도 생겼고, 기미년 3. 1. 운동 실패 이후의 신앙양상과는 정반대 현상으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량주의적인 양상의 신앙 때문에 목회자들의 타락상은 그 극(極)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금 통합 장로교 총회 홈피 자유게시판엔 다음과 같은 글로 댓글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2008. 2. 25자로 올린 <목사된 것이 이렇게 후회될 수가 있을까?>라는 글입니다. “그냥 평신도로 지낼 걸 괜히 자격도 없는 사람이 목사 되어 고민만 늘어나나 보다.

 

목사 되어 몇 군데 <노회>에 들어가 보니 온갖 불법과 죄악이 정당시 되고,사회에서 통하지 않는 상식적인 일도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잘도 통하는 곳, 참으로 초등학생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의 집단, 야비한 범죄가 조직적으로 가득하고, 편싸움에 눈이 멀고, <돈이면 환장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양심도 지키지 못하면서 말로만 믿음, 믿음,,,,,,참으로 못 볼 것을 너무 많이 본다. 도대체 목사들인지 먹사들인지 배만 부르면 큰소리 치고, 큰 교회만 들어가면 마치 제 잘난 맛에 선후배도 없는 무법천지의 곳, 정의와 진실은 없다.

 

오직 편당 지어 무조건 자기편이면 정의고 감싸주지만, 반대편이면 무조건 짓밟는 행위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장돌뱅이보다 못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의 집단......자기 편 수만 많으면 무조건 힘으로 밀어 붙이며, 법이고 질서도 없는 비인간적인 집단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라고 한탄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마음껏 향유되고, 등 뜨시고 배부르니, <먹어 본 자가 맛을 안다고, 더 먹자>고 야단인 이 타락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신앙의 양상들을 보면서 “주여! 굽어 살피소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결론: 한국기독교회의 신앙 양상은 단순히 육적인,사회적, 정치적관심과 운동만이 아니고(기미년 3. 1. 운동), 그렇다고 단순히 현실을 외면한 도피주의적인 피안의 신앙만도 아니고, 영육이 동시적으로 현세와 내세가 구원을 받아야 할 전인격적(全人格的)인 라는 것을 차제에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공로와 과오에 좌우되지 말고, 현재의 민족교회로서, 아직 남아 있는 한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의 그날까지 전인격적인 구원의 소식을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혜의 해와 자유가 방임>으로 추락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인 목사들이 주님의 그 소명에 뼈를 깎는 각고(刻苦)의 아픔을 새롭게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필을 놓습니다. 끝.

 

2008년 3월 1일

山下 연구 원장: 양 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