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50.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

solomong 2025. 2. 17. 10:39

 

50.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

(본문: 빌2:12-18)

1). 서론: 어느 날 영국 스코틀랜드 한 시골에서 아프리카인을 위한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헌금을 담는 그릇은 우리의 주머니 모양과는 달리 조금 작기는 하지만 보통은 마치 우리가 사용하는 세수 대야처럼 생긴 것이어서 헌금을 넣으면 다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헌금 그릇이 쭉 돌아가면서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그러는 중 한 소년 앞에 이르자, 이 소년이 대뜸 그 그릇 위에 올라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슨 짓이냐며 놀라서 묻자, 그 소년의 대답인즉 “저는 돈이 없으니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가 바로 맨 먼저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된 저 유명한 Livingstone 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는 거의 전부가 개신교를 믿는 지방이며, 그의 이름도 ‘살아있는 돌-산돌’(生石) 뜻처럼 자기 삶 전체를 복음 선교에 바쳐진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들의 몸이 제물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2). 본론(Text): ①. 본문의 요지는 빌립보교인들의 각자가 자기 구원의 완성에 힘 쓸 것을 바울은 권면하면서,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둘 때, 원망과 시기심이 생겨서 교회가 분열된다고 하면서, 각기 자기 개인구원의 문제에 돌아가서 경건한 두려움 속에 살 때에 교회는 고요해지고, 단합된 모습이 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 17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경건한 ‘믿음의 제사’를 하나님께 바친다면, 바울 자신은 빌립보교인들의 믿음으로 드리는 산제사의 제물 위에 구약성서의 ‘전제’(奠祭)처럼, 자신은 순교의 피를 붓겠다고 엄숙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②. 이는 빌립보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라면, 바울 스스로가 각오하고 있는 것은 ‘전제(관제)로 드릴지라도’(σπένδομαι-“쏟아버린다”는 뜻), 즉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제사처럼(민15:5, 28:7,24), ‘죽음의 제사’(딤후 4:6)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이 말을 하는 뜻은 믿음의 제물과 봉사하는 삶 전체의 책임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자는 믿음으로 값없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기독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가 되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삶 전체를 드리는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그러니 바울이 순교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죽음의 제사’이고, 빌립보교인에게 권면하는 것은 삶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바울은 순교의 죽음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빌립보교인들처럼,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를 들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심심히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은 순교의 죽음으로서, 죽음의 제사를 드릴 터이니, 너희 빌립보교인들은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숙연한 마음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일직이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라고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권고한바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몸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어떤 것을 말씀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구약의 죽은 제물, 즉 레위기의 규례를 따라 제단 위에 소나 양을 죽여서 바친 제물에 반하여, 상대(相對)되는 삶의 몸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 자체가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가 되라는 뜻입니다. ‘육’(肉)이라는 말도 아니고, ‘영’(靈)이란 말도 아니고, 정신 또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고, ‘몸’(σώμα)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인의 전통에도, 그리스인의 전통에도 이런 표현은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몸>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봅시다.바울 당시 초대 그리스도교회를 위협하던 풍조는 극단적 이원주의(二元主義)로서, ⑴.유대인 단체에서 온 에비온주의(Ebionism)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고 율법주의를 고조했던 것이고, ⑵.희랍적 영지주의(Gnosticism)이었는데, 영(靈)과 육(肉)을 철저히 분리시켜 영(靈)만이 참이고, 육(肉)은 물질과 더불어 악마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비역사화(非歷史化)한 가현설(Docetism)을 주창하였습니다. ⑶. 그레코 로마사회의 풍조로서, 극단의 육의 찬양이었습니다. 이런 풍조들은 당시 기독교인들도 영과 육을 갈라놓고, 영은 하나님께, 육은 자유와 방종으로 흐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혼탁한 사상적 풍조들을 사도 바울은 이원주의(二元主義) 사조들을 배격하고 싸워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란 ‘몸’은 곧 ‘인간’이며, ‘인간’이 곧 ‘몸’이란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영과 육의 분리된 이원론(二元論)이 아니라, 인간실존은 인간의 삶으로서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환언하면, 바울이 말한 <몸>은 과거에는 더러움의 기계가 되었으나(롬1:24),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기계란 것입니다. 이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6:15), 성령의 전으로서(고전6:19),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자의 몸은 삶이고, 삶은 기독자의 전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기독자의 인격(人格)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은 사변(思辨)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몸으로! 그의 삶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니라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온 당시는 일제 강점기시대이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을 선교할 때, 일제치하에서 삶의 영역이 완전히 약탈당한 것을 보고서, 한민족의 삶을 2 갈레로 나누어 놓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영역은 영적(靈的)인 삶만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피안적(彼岸的)인 내세(來世)만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세요!”라는 선교의 구호였습니다. 차안(此岸)의 삶인 현실은 일제폭압 속에서 자유와 행복, 선행과 소망이 모두 박탈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잔재의 신앙의 양상이 지금까지 영향되어 표리부동한 이원구조(二元構造)의 신앙생활을 우리는 지금도 자주 보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일편단심으로 단번에 죽는 것(순교)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일생을 바치는 삶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우리들의 생애가 그대로 하나님께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몸이 산제사가 되기 위해서, 소극적으로는 우리 지체 중, 입은 비루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손발은 죄를 짓지 않으면 산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입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손발은 어려운 자의 아픔을 달래주고, 구제하는 것이며, 우리의 귀는 여가 있는 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지금 육의 포만과 향연 속에 살기를 욕심 부리는 시대 풍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속된 세상에서 도피하여 신비한 영적 세계를 갈구하는 유혹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양극단을 배제하고서, 이 세상이란 시공(時空)안에서, 우리들의 삶 전체를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써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인 것입니다. 바울처럼 단번에 주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도 위대한 것이지만, 이것보다 더 위대한 한 것은 우리의 전 생애가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로써의 삶을 산다는 것은 거룩한 일생인줄 압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