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너희도 가려느냐.”
(본문: 요 6:22-71)
1). 서론: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시저)가 로마인의 자유를 위협하고 로마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판단한 브루투스, 카시우스 무리에게 암살당할 때, 마지막 순간 카이사르는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에 브루투스가 있는 것을 보고,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카이사르가 이런 말을 하게 된 연유는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본토로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서 폼페이우스 일파를 제거하고, 브루투스는 카이사르 반대파에 가담되어 있었지만, 카이사르는 그를 살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의 애인인 세르빌리아(<Servilia)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브루투스가 종국에는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그를 암살하려는 무리에 끼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말은 관용과 믿음을 베풀었던 자가 背信하는 것에 대한 탄식하는 관용구의 하나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카이사르의 유언 아닌 유언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대사는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줄리어스 시저(카이사르)"에서 나오는 대사인데, 워낙 감명 깊은 표현이라 하나의 정설처럼 굳어서 내려오고 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시저는 斷定的으로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말했지만, 연민의 사랑을 베풀었던 군중들이 등을 돌리고 떠날 때,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意向을 물어보신 것이었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5병 2 어의 표적을 보고 육의 포식에만 열광하는 것 때문에 책망을 들었으며,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감행하신 도전을 본 무리를 장래가 무사하지 못할 것을 짐작하게 되었고, 또한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라는 말씀 앞에는 무리가 수군거리면서 어렵다고 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12.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Will you also go away?)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 담긴 깊은 교훈을 오늘날 우리들의 가슴에 한 번 照明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①. “이 튼 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는 무리가 (6:22).....”-5천 명을 5병 2 어로 먹이신 표적은 유대민족을 상대한 公的으로 주신 것이고(6:1-15), 물 위를 걸으신 표적은 그 직후 제자들에게 私的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6:16-21) 6장 22절에서 25절까지는 기적의 떡을 먹고 흥분된 군중이 예수님을 유대 왕으로 모시자고 찾아다닌 모습입니다.
②.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6:26)- 육의 떡을 먹은 군중들은 예수님에 관한 열광적인 환호 속에 있는 그들에게 생명의 떡에 대한 영적인 눈을 열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를 증언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意中에 담긴 眞意는 니고데모의 대화나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표명된 것과 같이 표적이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緖論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표적의 진의를 망각하고, 육의 포식에만 열광하는 것에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③. “썩을 양식.......영생하도록 있는 양식”(6:27) -표적의 본의를 깨달아 믿는 자는 영생의 양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어제 먹은 일시적으로 그치는 썩은 양식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떡을 먹이신 본의는 영생의 양식을 주시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④.“우리로.......믿게 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까.......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6:30-31) -표적을 통하여 믿으려는 유대인의 경박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며(마 16:1), 바리새인들은 5병 2 어의 표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막 8:11) 군중들은 광야에서 먹은(모세를 통해서) ‘만나’를 최대의 표적으로 생각하고 그와 같은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⑤.“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6:32-33)-유대인들의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2가지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밝히신 것입니다. 첫째는 ‘만나’를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둘째는 ‘만나’는 참 양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나’는 하루의 양식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永生이란 것입니다.
⑥.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6:35) -그리스도는 참 떡이요(32절), 하나님의 떡이요(33절), 생명의 떡이시란 것입니다. (35절) 그리스도의 떡은 性格, 하나님의 떡이란 그 起源, 생명의 떡이란 그 結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는 方法은 그리스도께로 와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란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은 外形이라면, 믿는 것은 內面的으로 마음에 머물러 있는 信念인 信仰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⑦.“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58) -십자가 위에서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의 贖罪가 없이는 참 생명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갈 2:20) <참 생명>이란 참으로 먹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을 말하며, 이는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믿어서 얻는 참된 삶을 뜻합니다.
⑧ “먹고”(τρώγων) -참으로 먹어서 나의 것으로 하여 同化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어렵도다.”(σκληρός) -심대한 비난을 내포한 뜻입니다. “물러가고”(ἀπῆλθον εἰς τὰ ὀπίσω) -그저 단순히 떠나갈 뿐 아니라, 자신의 옛 생활로 돌아가 버렸다는 뜻입니다.
3). 본론((Context):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이나 영적 지도자가 없이 메마른 군중들의 영혼 상태에다가, 정치적으로는 믿고 따라갈 흠모할만한 영도자도 없이, 그냥 Roma 식민치하, 굴종의 노예 생활에 지치고 한 많은 세월을 보내는 군중들이었습니다. 굶주리고 허기져 온 그들에게 5병 2어로 5,000명이 모처럼 배불리 먹고 남은 여분도 12 광주리나 되었을 때, 군중들의 여론은 “옳도다! 혜성처럼 나타난 이제 참된 지도자를 만났다.”라고 열광하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군중들에겐 예수님은 남녀 간에서 묘사되는 무리의 ‘첫사랑’의 대상자로 여겨졌고, 한 끼 배부름에 만족할 수 없다는 뜻에서 예수님의 뒤를 쫓아 Roma 나라를 쳐부수고 독립하여 등극(登極)할 왕으로 모시자는 여론이 들끓게 되었습니다. 마치 비탈길에서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두 발 없어도, 아니 길이 없어도 ‘예수’라는 당신에게로 갈 수 있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5병 2어의 표적을 보고서, 우리들의 환호(歡呼)는 방금 첫 꽃송이를 터트린 목련 나무와 같고,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의 한숨 소리 같았으며, 무수한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거대한 밤하늘 같았다고 고백하는 군중이었습니다.
첫사랑은 대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처럼, 추수를 하기 전까지 일찍 익은 곡식이나 여물기 전에 훑은 곡식으로 양식을 대어 먹는 일처럼, 예수님께 향한 첫사랑의 감정은 표적으로 배불리 먹고 난 이후,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의 떡에 대한 영적 안목을 열기 위한 근본적인 문제인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緖論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표적의 본의를 깨달아 믿는 자는 영생의 양식을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어제 먹은 일시적으로 그치는 썩은 양식에 불과하다는 뜻으로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責望하신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바리새인들은 5명 2어의 표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믿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광야에서 먹은(모세를 통해서) ‘만나’를 최대의 표적으로 생각하고 그와 같은 표적을 보이라는 것(막 8:11)에 대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6:32-33)라고 반박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그리고 ‘만나’는 하루 양식이기에 참 양식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참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永生이라고 하시면서, 挑戰狀을 바리새인들에게 던진 말씀에 군중들은 장래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셋째는“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6: 35) 라고 말씀하신 것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58)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로 와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며. 또한 <참 생명>이란 참으로 먹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을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의 贖罪가 없이는 참 생명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위의 3가지 사유로 군중들은 '수군거리며'(6:41), '어렵다'(6:60)라고 하는 그들이 말속에는 그리스도께 비난의 정서가 서린 말이었으며, 예수님 곁에서 물러간 것은 단순히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옛 생활 터전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뜻입니다. 한때는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여들어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으나(2:23, 4:1-3, 39-45, 6:2), 사정은 돌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원수들의 악의가 노골화하여 예수님을 십자가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벌써 독자로 말미암아 최후 비극을 내다보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정의 무상을 엿볼 수 있으며, 사람들의 예수님에 관한 태도도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사한 때만 따르는 군중들이요, 십자가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떠나버렸습니다. 더러는 예수님의 도전과 명령에 놀라서 떠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을 바라고 따랐기에, 고난의 빛이 보이자 떠난 것입니다. 좋은 때 따르고, 어려운 때 떠남은 이해타산에 민감한 인간 행동입니다. 그들은 이기심에 기반을 둔 추종자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얻기 위해서 따르는 자는 오래 가지 못함을 알 수 있겠습니다. 혹여 이 군중 속에 우리 자신들도 있지나 않은지 가슴에 손을 얹고서 냉정히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친위부대(親衛部隊)라고 할 수 있는 12. 제자에게 意中을 떠보는 의미에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어때!, 너희들도 역시 떠나가기를 원하는가?”(What about you, do you want to go away too?)라고 The Jerusalem Bible 성경 번역에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떠나든지 남든지 그것은 너희들의 선택이다. 만약 나를 버리고 떠나겠다면 지금이 그 適期이다.’(It is at your choice whether you will or no; if you will forsake me, now is the time.)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수사도 베드로는 그의 신앙고백인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니다.”(요 68-69, 마 16:16) 이런 12. 제자를 대표한 베드로의 답변은 주님께서 흐뭇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셨지만, 그러나 가롯, 유다가 배신자인 것을 예고하시며, 그래도 주님의 가슴 깊이 안고 끝까지 나아가시는 관대성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으나, 주님의 내심으로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리셨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베드로 역시 가야바 뜰에서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한 것에 우리는 그냥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신앙고백을 해놓고, 정작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에게 밀어닥칠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멀찍이 쫓아갔고, 주님은 심문을 받으시면서 온갖 수모와 곤욕 받고 계시는데, 춥다고 불을 쬘 때, 대제사장의 여종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라는 투로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부인하면서 예수님과 상관없다는 식으로 첫 번째로 부인했고, 두 번째는 다른 여종이 ‘예수의 일당’이라고 함에 또 부인했고, 세 번째는 ‘말씨로 보아 갈릴리 예수의 일당’이라고 할 때, 베드로는 ‘저주하면서 맹세’까지 하여서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마 26:69-75, 막1 4:66-72, 눅 22:54-62, 요 18:15-18, 25-27)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마자 뿔뿔이 옛터로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시인 괴테가 말한 바와 같이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否認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때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닭 울기 전 3번 주님을 부인한 그 실패의 쓴잔을 마신 베드로는 캄캄한 밤에 밖으로 나가서 통곡하면서 진심으로 자신을 부인하면서, 철저한 회개를 했던 것입니다. 이후의 베드로의 삶은 종래 주님을 위한 장엄한 순교로 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실패의 쓴잔을 마시면서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경험을 했기에, 베드로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과 신앙에 대해 쉽게 장담하는 소리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약한 갈대에 불과하지만, 생각하는 갈대가 되자면, 단련(鍛鍊) 받은 삶을 통한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할 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다 이런 자들이 되도록 노력 합시다.
4). 결론: 군중들은 무사한 때만 따르는 자들이었고, 십자가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떠나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을 바라고 따랐기에, 고난의 빛이 보이자 떠난 것입니다. 좋은 때 따르고, 어려운 때 떠남은 이해타산에 얄팍한 인간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이기심에 기반을 둔 추종자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군중심리에 동요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베드로처럼 한때의 감정에 들떠서 참 신앙자인 것처럼 큰소리는 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불 없는 난로 위에 끓는 주전자는 쉽게 곧 식기 마련입니다. 불타는 난로 위에 찬 주전자 물은 곧 끓을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聖靈의 불로 계속 타오르는 신앙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는 말씀에 확신적인 답변으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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