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8)

51. 바울의 간곡한 형제애

solomong 2025. 2. 22. 11:15

51. 바울의 간곡한 형제애

(본문: 고전8:7-13)

 

1). 서론: 기독자는 자기 지식을 세우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비록 자기 지식의 내용이 성경에 비추어 옳고, 그 지식으로 자유 함을 누릴 수 있다 해도, 그것이 동일한 지식과 자유 함에 있지 못하는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유는 限界 안에서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하면, 기독자의 자유는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의 證票가 되지만, 그것이 남용(濫用)될 때 형제들을 실족케 하는 빌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형제에 대한 사랑 결핍이 되는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인 대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인 것입니다.(마25:45, 골3:23)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간곡한 형제애를 엿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들의 정황에서 살펴보십시다.

 

2). 본론(Text): ①. 우상의 제물문제-고대 고린도는 당시 세계적인 현상이었던 우상숭배가 그들의 사회생활의 중심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우상 숭배는 우상의 제물 문제가 뒤 따르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바치는 막대한 제물은 祭祀 후에 시민들에게 분배되었고, 그것은 다시 市中에서 판매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상의 제물을 성도들이 먹을 수 있느냐는 문제가 야기되어, 성도들의 신앙양심 문제에까지 비약되었던 것입니다.

 

②. 근본 원칙인 지식보다 사랑의 문제-우상 제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하기 이전에, 바울은 근본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우상의 存在까지도 否定하는 것이기에, 그 제물 먹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로 인해 실족하는 약한 형제를 위해서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헬라문화는 ‘지식과 지혜를 사랑’(哲學)하는 문화 환경에서 볼 때, 고린도 교인들도 지식을 사랑하는 知性人으로, 우상 제물에 대한 知識(認識)은 고전8:4~6의 말씀내용처럼, 정당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바울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는 최근까지 우상을 섬겨오던 자들이 개종하여 단순한 신자가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상 제물에 대한 양심의 꺼림칙한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불안을 느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형제들을 위해서 지식 있는 자들의 우상 제물에 대한 無害 주장은 그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이니, 형제의 건덕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즉 <지식보다 사랑>이 월등하기에, 지식은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본문(8:7-13): 약한 자를 돌보는 사랑- 고린도교회내의 지식 있는 自由主義者들은 ‘우상은 없다.’는 생각에 우상제물을 먹어도 좋다는 思考는 올바른 인식판단이었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지식이 있었으면, 우상제물도 문제시 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렇지 못한 ‘단순하고 어린 신자들’은 우상 제물에 대한 미신적인 의구심이 생겨 있으며, 더 나아가서 양심마저 더렵혀질 가능적 존재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른 지식이 있고 믿음이 강하다는 자들이 우상의 집에 태연히 앉아서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서, 지식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마음의 해결도 없이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따라서 먹으면, 죄를 짓게 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롬14:23) 신앙의 세계에서, 이 사람에게 안전한 것이 저 사람에게는 해로울 수가 있고, 우리에게는 전연 시험될 것이 없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큰 시험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고린도교회는 우상숭배가 그들의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당시 헬라문화권 속에 있었던 ‘아덴’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이름붙인 제단(행17:23)도 있었으니, 우상숭배가 얼마나 편만해 있었다는 그 단적인 實例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우상숭배에 뒤따르는 문제는 우상 제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시민들이 우상에 바쳤던 막대한 제물은 司祭들과 시민들 간에 분배가 되었고, 그것은 다시 시중에서 판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상의 제물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먹을 수 있느냐는 양심의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1950년대까지 우리 한국에서도 제사 음식을 먹느냐, 마느냐가 교회 내에서 提起 되었던 문제와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여기에 근본적 원칙인 ‘지식과 사랑’에 대한 상관성을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상 제물에 논란은 결국 지식과 사랑에 대한 기본자세가 확실해 지면, 쉽게 해결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상 제물에 대한 고린도교회내의 知識 있는 자유주의자들은 ‘우상은 없다.’는 생각에 우상제물을 먹어도 좋다는 思考는 올바른 認識判斷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는 최근까지 우상을 섬겨오던 자들이 개종하여 단순한 신자가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상 제물에 대한 양심의 꺼림칙한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불안을 느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형제들을 위해서 지식 있는 자들의 우상 제물에 대한 無害 주장은 그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이니, 형제의 건덕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즉 <지식보다 사랑>이 월등하기에, 지식은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에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원칙하에, 고린도교회내의 지식 있는 자유주의자들은 ‘우상은 없다.’는 생각에 우상제물을 먹어도 좋다는 생각은 비록 올바른 판단이었지만, 한편으로 고린도교회 내부엔 ‘단순하고 어린 신자들’은 우상 제물에 대한 미신적인 의구심이 생겨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양심마저 더렵혀질 가능적 존재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른 지식이 있고 믿음이 강하다는 자유주의자들이 우상의 집에 태연히 앉아서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서, 지식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마음의 해결도 없이 양심에 거리끼면서도 따라서 먹으면, 죄를 짓게 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롬14:23) 신앙의 세계에서, 이 사람에게 안전한 것이 저 사람에게는 해로울 수가 있고, 우리에게는 전연 시험될 것이 없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큰 시험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약한 형제의 존재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위하여 죽으신 형제이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고전 8:11-12) 사랑 없는 지식은 이런 중대한 결과를 초래케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 대상은 언제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란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형제들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주님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범죄 행위인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단언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마25:40,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형제를 돌보는 사랑을 간곡히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는 것은 바울 자신의 형제애를 표현한 강한 결심이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이웃 형제를 구원하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형제를 돌아보는 사랑이 缺한 知識, 理念, 및 神學까지도 결국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바울의 이 간곡한 형제애의 본보기를 실천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주는 자에게는 흐뭇한 보람의 정서가 서리고, 받는 쪽은 큰 감동의 파장이 그의 가슴을 울리게 합니다. 필자가 근래 경험한 실화입니다. 지난 주간에, 5년 만에 대구 시내 Bus(북구 칠곡)를 타게 되었습니다. 버스에 올라 운전기사에게 요금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1,500원이라기에 5,000원 짜리 지폐를 내밀었더니, 자기는 거스름돈도 없고, 운전하기에 처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쳐 잔돈을 준비 못한 것이 내 불찰이었습니다. 그 순간 난감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탑승자들에게 잔돈으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사정을 지켜보던 앞선 동승자 40대로 보이는 여성 한분이 자기 교통카드로 단말기에 찍어서 代納해 주었습니다. 어찌나 고마운지 “감사합니다.”인사를 하고 난감한 순간을 모면해 본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분도 내 사정을 익히 잘 알고 人間愛를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고마운 그분의 마음씨와 행동이 그날 하루 종일, 그 이튼 날도 이따금씩 생각이 났습니다. 형제애의 사랑을 베푼 지극히 작은 일도, 사랑의 도움을 받은 자는 그 고마움의 뭉클한 정서가 쉽게 살아지지 않고, 자기도 남의 어려움을 도와야 한다는 결의가 굳어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연쇄적인 형제애 사랑의 물결이, 특히 ‘바울의 간곡한 형제애’가 우리 교회생활에서, 다시 사회로 뻗어가는 운동이 계속 전개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바울의 간곡한 형제애는 고린도교회의 지식 있는 자유주의자들이 비록 ‘우상은 없다.’는 생각에 우상제물을 먹어도 좋다는 생각은 올바른 인식판단이었지만, ‘단순하고 어린 신자들’은 우상 제물에 대한 미신적인 의구심을 버리지 못해서, 그들의 양심마저 더렵혀질 가능적 존재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식보다 사랑>이 월등하기에, 지식은 형제에 대한 사랑 때문에 節制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한 형제의 존재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 위하여 죽으신 형제이며, 지적자유의 한계를 넘게 되면 지식과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케 하여 죄를 짓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고전 8:11-12) 사랑 없는 지식은 이런 중대한 결과를 초래케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궁극적 대상은 언제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형제들에게 죄를 짓는 것은 곧 주님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범죄 행위인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단언하시기를,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마25:40,45)이란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리라.’는(고전8:13), <바울의 간곡한 형제애>를 천명했던 것입니다. 교회 형제를 돌아보는 사랑이 缺한 知識, 理念, 및 神學까지도 결국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