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예수의 흔적(痕迹)
(본문: 갈6:14-17)
1). 서론: 얼굴에 화상이 있는 어머니를 둔 초등학교 학생이 학교 다닐 때, 부끄러워서 어머니와 함께 외출하거나, 친구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겁낸다는 일화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어머니의 화상(火傷)은 밤중에 불이 나서 그 어린 자식을 구출하다가 생긴 화상이었습니다. 훈장과도 같은 것이지요. 어머니는 자식의 그런 마음을 알고도 <자식의 상처>처럼 오히려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과 一體가 되는 일입니다. 참 사랑하는 상대자는 내가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떼어내는 아픔, 그 때문에 계속 상처를 받고 수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가 내안에서 생생해 지는 법입니다. 어머니 화상의 흉한 상처 때문에 어린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멀어져도, 어머니는 자기얼굴의 상처를 자식의 烙印처럼 흐뭇해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박해자 사울이 방향을 선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생을 바치되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바울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도취 할 수 있었을까. 허구 많은 유대주의자들의 비난과 조소 및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할 만큼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비결(秘訣)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2). 본론(Text): ①. 본문 6:14-17-십자가의 자랑-바울은 율법주의에 대한 마지막 일격을 가한 후에, 그것과 대조하여 ‘十字架의 道’를 높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십자가의 도는 서로 절충할 수 없는 것으로, 전자를 배격하고 후자를 천명하는 것이 갈라디아서 전체에 흐르는 主題입니다. 진실로 십자가의 도에 투철할 때만이 율법주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단호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십자가의 도> 중에서 바울은 단호하게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십자가를 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 외에는 傳하지 않기로 作心하였던 것입니다.(고전2:2) 이와 같이 십자가의 구속의 道理에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랑하는 그에게는 할례와 같은 것은 분토와 같이 내어버린 것이었습니다.(빌3:4-5)
②. 본문 6:17-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στίγματα)을 가졌노라. -"흔적(στίγματα)이란 낱말은 신약성서에서 본문에서만 나타나는 말이며, 소유권을 표시하는 烙印을 의미합니다. 옛날 노예들에게 찍는 낙인으로, 모든 노예들에게 烙印(쇠로 만든 인장을 불에 달구어서 노예들의 몸에 火印함으로 소유주를 표시한 것)하는 것은 아니며, 악한 노예를 징벌하기 위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는 노예의 경우에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바울의 <예수의 흔적>은 무엇인 말하는 것입니까. 이 낱말이 복수형인 것은 바울의 몸에 찍힌 낙인이 많았던 것을 표시합니다. 그의 몸에 낙인처럼 받은 상처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의 眼疾로 고생한 것(행9:18, 갈4:15), ⑵.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는 것(행14:19), ⑶. 유대인의 태장과 로마인의 매를 여러 번 맞은 것(고후6:5,11:24), 이런 상처들은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못 자국”(고후4:10, 빌3:10)이 그의 “몸”뿐 아니라, 그의 “몸속”까지 배어 있었다고 하겠으며, 이는 바울이 모든 교회를 위하여 애쓰는 그리스도의 무거운 짐을 졌을 때, 날마다 자신이 소멸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를 위한 흔적으로 생각했으며, 또한 그 자신을 훼방하던 반대자들에게 도전할만한 사도직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하면서, 주님께 대한 감사와 반대자들에게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3). 본론(Context): 사도 바울의 전반부 삶은 예수님의 적(敵)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 정통주의 자이었던 그는 율법에 반하는, ‘예수의 복음’은 율법을 무의미하게 하고, 유대 사회를 붕괴시킨다고 생각해서 나온 바울의 복음주의 기독자들에 대한 敵愾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전향해서, 예수의 복음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를 위해서 죽기까지 그의 몸을 불태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선교 외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내의 유대주의자들로부터 갖은 시달림 속에서도, 특히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만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痕迹’을 지니고 있노라.”고 단언했던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입니까. 흔적인(stigma)이란 육체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표시하는 烙印이었습니다.
옛날 희랍 로마시대엔 자기 가축을 구별(區別)하기 위해서, 쇠 인장을 불에 달구어서 엉덩이에 지져서 표시하는 것을 Stigma라고 합니다. 또는 노예, 전쟁 포로를 영구히 소유물로 하기 위해서 그 이마나 팔에 ‘흔적’을 만들었습니다. 고대 중동 아시아 지방에는 자기들의 공동체의 일원을 표시하기 위해서 종족 또는 군대의 손바닥에 낙인을 찍어서 그 소속임을 표시함과 동시에 의무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것입니까. 한 설은 실제로 바울이 <쇠 인장>으로 자기 몸에 표시했다는 것이고, 어떤 학자는 그의 복음전파가 육체적 병약한 몸으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의 내적 고뇌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Stigma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고, 너무나 생생한 구체적이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 23-33절에서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고도 많이 했고, 유대인에게 40에 감한 매 즉, 39대씩 5번이나 맞고, 유대 율법에 태형 규칙은 40대까지 허용되었으나(신25:1-3, 실수를 고려하여 39대씩 때리는 것이 관례가 됨.), 돌로 맞고, 3번 파선, 강도의 위험, 육체의 가시(두통, 말라리아 병, 간질, 안질, 등), 동족의 위험, 등등의 것 보다, 내적으로 교회를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찌했던, 바울의 Stigma는 너무나 구체적인 화육(化育)된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바울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예수의 흔적’을 직접 찍힌 것인데(from some one who to Paul), 갈라디아서에는 할례로부터의 이야기와 사도 권으로 배척을 당한다는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이런 면으로 보아서, 자기 유대 동족의 손에 의한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Stigma를 자기 몸에 짊어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관념적이 아니고, 사랑하는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테니슨(Tennyson)의 장시(長詩) <이노크 아덴>(Enoch Arden)이란 서사시가 있습니다. 주인공 필립(Philip)은 항해 도중 난파를 맞이하여 고도에 10년간 갇혀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한편 고향에는 자기 아내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필립의 친구가 10년간 남편의 소식이 없는 여인에게 접근하여 사귀는 중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필립은 10년 만에 구조되어 자기 고향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너무나 감격하여 바로 대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 창문을 통해서 자기 집 응접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뜨개질을 행복한 듯이하고, 자기 아들은 바닥에 뒹굴고 있고, 자기 아내의 남편이 된 친구는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필립은 들어가서, “여보 내가 왔소!” 할 것이냐, 아니면 돌아 갈 것이냐. 에 갈등을 했습니다. “10년 만에 본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그냥 돌아 갈 수는 없다! 아니다!, 저렇게 행복한 아내와 자식인데, 내가 들어감으로 모두의 행복을 깨는 것이다!” 이 양자 사이의 고투하다가, 종내 그는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고향 마을 어느 여관방에 들어가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는 거기서 죽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인간사의 사랑을 종교적으로, 거룩한 차원으로 승화(昇華)시킨 작품이었습니다. 바울도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흔적은 어쩌면 억울한 상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가 초래한 필연적인 상처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Stigma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변적(思辨的)이거나, 심미적(審美的)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고난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중국 당태종의 정관의 치(貞觀의 治)를 쓴 ‘오긍’ 저서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보면 “봄은 부르지 않아도 온다. 그러나 봄이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봄이 찾아오지 않는다. 봄이 온 것을 아는 자만이 봄이 온다.”라는 대단히 함축성 있는 의미의 말을 우리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즉, 희망도, 행복도, 누구에게나 노크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자에게만 체득(體得)되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오늘의 기독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인간적이든, 신앙적이든, 예수를 따라간다는 것은 은혜와 축복만이 아니라, 고통과 고뇌가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핍박이든, 시간적 손해든, 물질적 손해든, 예수를 믿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병행해서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정말 손해>입니다. 그러나 “봄이 온 것을 아는 자만이 봄이 온다.”는 의미와 같이, “내가 예수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는 이것을 아는 자들이나, 느끼는 자들에게는, 예수의 Stigma를 가진 자들에게는恩惠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남의 아들을 업고 가는 것은 굉장히 무겁고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업고 가면 땀은 날지라도, 고통은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Stigma가 문제가 아닙니다. 청춘 남녀 사이의 사랑도 서로 주고도, 더 못 주어서 안달을 합니다. 이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라.”(고후12:10)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뇌와 사랑, 고통과 은혜란 것은 二律背反的인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의 역설(Paradox)이라고 합니다. 이런 恩寵을 체험해 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2000여 년 전의 예수님의 그 Stigma를 어떻게 현실적으로, 사실적으로 경험하게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비한 체험으로, 문학적으로, 예술품의 매개물(媒介物)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화가 ‘반 고호’는 그의 작품 중에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기도>와 <나사로의 부활>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2가지 작품 중, 다 그 그림에 예수님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는<겟세마네>를 구상할 때, 예수님의 의복색은 푸른색이나 오렌지색으로 하고, 천사는 황색으로, 올리브 나무와 땅은 적색으로 하기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구상을 하고나서, “이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감정이 격동한다. 우선 중단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을 태양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술로도(그림) 예수의 고난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진실하게 고백(告白)한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그리스도 고난의 체험과 십자가의 아픔의 경험) 觀念으로도, 敎理로도, 審美的 상상이니, 信仰的 환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이는 오직 내 몸으로! 내 몸에 어떤 형태로나 예수의 낙인을 받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참 사랑하는 이는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내 살을 떼어내는 아픔, 그것 때문에 계속 상처를 받고, 수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가 내 안에서 생생해 지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를 위한 수난은 구체적으로 형제를 위해, 정의를 위해서, 이런 문제는 후퇴하거나, 타협이 없을 때,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것은 억울함, 오해, 장기간의 고통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같이 고난의 현실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습니까. 모략을 당하고, 가롯 유다처럼 예수를 팔 작정을 미리 모의했으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서는 “랍비여! 안녕하십니까.”식의 二重人格의 소유자로부터 위장을 당하는 일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배신당하고, 박해를 받고, 투옥되고, 재판을 받아 처형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과 담을 쌓고 밀폐된 분위기 속에서, 위험한 것은 다 피한 안일한 자리에서 십자가를 아무리 노래한들 그것이 어떻게 <예수의 흔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야 어떤 불의가 난무(亂舞)하든, “내 영혼아 평안 할지어다. 나는 구원받은 자로다”하는 식(式)의 기독교적 낭만주의자나, 신앙적 이기주의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어떻게 <자기와 관련 된 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런 십자가는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몸에, 예수의 낙인을 자기 몸에 痕迹을 남김으로써만, 알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참 기독자처럼 살려고 할 때, 주님 때문에 손해도 보고, 수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항상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수의 흔적>이란 뜻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당하는 현실의 고통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결과라면, 그것은 참으로 숭고합니다. 그리고 그 숭고함이 내 삶에 지속적으로 <예수의 흔적>임을 의식(意識)하게 될 때, 비로소 그 뜻은 변질되지 않을 것이고,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체험을 ‘예수님의 고난주간’만 아니라, 매일매일 삶에서 우리가 맛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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