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57. 삶으로 드리는 예배

solomong 2025. 3. 10. 11:31

 

57. 삶으로 드리는 예배

(본문: 롬12:1-2)

 

1). 서론: 예배를 단순히 하나의 신앙공동체가 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여서 함께 드리는 儀式으로만 이해하지 말고, 각자가 흩어져서(διασπορά) 살아가는 기독자의 매일매일 삶 자체를 가리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뜻으로 이해함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률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이 윤리적인 말씀의 설교를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강단에서 그런 설교는 사라지고, 축복의 설교가 넘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기독교 윤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어야 한다는 것에 基礎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활의 종교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삶이 遊離되는 것에 오늘날 우리들의 고뇌가 있습니다.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을 본문을 통해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2). 본론(Text): ①. (본문의 중요성)-실천편의 시작으로서 원리적이며 개인적인 교훈입니다. 그것은 기독자의 기본 원리를 밝히는 것입니다. 즉 본문은 실천 편 전체의 서론이요, 대강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활의 종교’입니다. 기독자의 삶이 곧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②. 12:1- “몸”(σῶμα)-지난날 더러움의 기계가 되었으나,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기계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6:15), 성령의 전으로서(고전6:19)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③. “산제사”-구약의 죽은 제물, 즉 레위기의 규례를 따라 제단에서 죽여 바친 제물에 相對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자의 삶(생활, 생애)가 그대로 하나님께 제사(예배)가 되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한번 순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일생을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산제사(예배)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눈은 악을 보지 않으며, 혀는 비루한 말을 하지 않고, 손은 죄를 짓지 않으면 번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이상으로 우리 신자는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손으로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고, 입은 우리를 향하여 욕하고 비웃고 저주하는 자를 상대하여 오리려 관용하면서 축복하는 것이고, 귀는 때에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기도하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자기의 삶을 반성해 보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④. 12:2- “세대”(αἰὠν) -時間的인 세상을 뜻하며, 보통 세상은 κόσμος로 표현되나, 그 동의어로 οἰκουμένη(사람이 사는 場所)로 표현됩니다. 時空의 차이점을 엿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몇 세대(αἰὠν)로 나누어지고(한 세대는 보통 30년), 각 세대는 그 특색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기독자들은 할아버지 세대, 아버지 세대, 아들 세대의 저마다 특색이 있지만, 신앙의 세계엔 세대를 초월한 불변의 진리가 있기에, 세대의 흐름 속에서도 변절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⑤.12:2- “본받지 말고(συνσχηματίζεσθε),변화를 받아(μεταμορφοῦσθε)- 대조적인 두 낱말입니다. 전자는 이 세상의 원리와 실천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기에 외부적인 세상의 유행과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고전7:31,요일1:17, 고후6:17) 후자는 가장 깊은 본성의 恒久的인 변화를 뜻합니다.(마17:2,고후 3:18)

 

전자의 헬라 원어의 語根은 σχῆμα로서 눈에 보이는 외형(fashion)을 가리키고, 후자는 μορφὴ로서 본질적인 형체(essential form)를 뜻합니다.(빌2:6) 결국 전자는 보이는 모양을 시대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본질적인 형체를 변화하라는 뜻입니다.(그리스도께서 변화하심을 표현한 낱말) 외적이며 지나가는 이 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내적 본성에서 변화를 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악을 본받거나 선을 따르거나 한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로마서의 내용을 크게 두 가지 주제로 분류한다면, 11장까지를 교리 편으로, 12장부터는 교리에 준한 실천 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교리와 실천은 밀접한 상호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실천에 반영되지 않는 교리는 거짓이며, 교리에 입각하지 않는 실천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바울서신엔 이 구분이 명백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교리편의 강령은 “믿음”이며, 실천편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12장 1절의 시작이 “그러므로”(ούν)라는 것은 교리편의 전체를 指目하는 접속사입니다. 환언하면 교리에 입각해서 실천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윤리도덕을 말하고 있습니다. 윤리도덕이라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너와 나>의 상호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상호관련 된 수 많은 인간관계가 마치 하나님과 관계된 신앙처럼 진실하고 信義로 행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몸은 사람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몸을 가진 것도 아니라, 사람이 곧 몸입니다. 몸은 전체로서만 존재합니다. 몸을 어떤 형식으로든지 분리시키면 이미 몸이 아닙니다. 이유는 몸은 곧 사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은 곧 삶입니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함은 肉이라고, 靈이라고, 精神 또는 行動이라고도 하지 않고 <몸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몸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독특합니다. 히브리 전통에도, 희랍의 전통에도 그의 개념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인간 이해와 직결 된 개념입니다. 그는 사람을 二元論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선 당시의 풍토는 극단의 二元主義가 지배했으며 그것은 각기 분화되어 독주했습니다.

 

당시 희랍의 靈知主義(Gnosticism)가 깊이 침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靈과 肉을 철저히 갈라놓고, 靈만이 참이고 肉은 모두 물질과 더불어 그것에 대립된 악마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본질은 靈이라고 하면서, 어떤 偶發的인 일로 사람이 肉이라는 것에 捕虜가 되어 그 監獄에 갇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구원은 이 肉의 監獄에서 탈출하여 그 본래적인 靈에 환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思考는 사실상 역사적 삶을 <肉>에 내맡기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기독교 교리해석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부활 사건도 역사적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假顯의 사건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사회의 풍조는 극단의 肉의 찬양과 향연이었습니다. 이러한 풍조에서 기독자들도 靈과 肉을 갈라놓고, 靈은 하나님께, 肉은 방종의 자유에로 내맡기는데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풍조와도 싸워야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肉>에 낙착시킴으로써 비역사화 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삶이요, 삶은 전체인 것입니다. 이 삶은 思辨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몸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삶은 人格의 영역이며, 그래서 인격은 사변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몸으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너와 나의>관계는 삶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랑도 예배도 인격과 만남의 관계입니다.

 

그간 우리 교계도 서구의 헬레니즘 후예들의 영향을 받아서 이원적인 사고에 물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신앙과 일상생활을 유리시켰으며, 따라서 신앙행위를 자연적인 삶과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二重人格者의 信者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에 따라서 <몸>!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몸은 그리스도 사건의 실현 장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몸에서 예수의 흔적’(낙인=στίγμα, 갈6:17)을 가진다고 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골1:24)

 

그리하여 바울은 “너희 몸”, 매일의 과업, 기타 모든 것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예배인데, 참 예배, 곧 영적 예배는 자기 몸과 나날의 생활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예배당에서 거행하는 것이라기보다, 온 세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聖殿으로 보고, 모든 범상한 행위를 다 예배행사라는 의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예배가 성소도 아니요, 주일날 정한 시간에 드리는 예배도 아니요, 평범한 매일매시마다 하나님께 부끄럼이 없이 진실하고 신실한 관계(대인, 대물, 사건 등등)로서의 생활(사람)이 살아 있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 스승이신 靜流 이상근 목사님께서 늘 하신 말씀은 “주님을 위해서 한번 순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일생을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라는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산제사(예배)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눈은 악을 보지 않으며, 혀는 비루한 말을 하지 않고, 손은 죄를 짓지 않으면 번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삶이 온전한 예배가 되기 위하여, 즉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려면,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받지 말라는 것과 변화를 받으라.’는 것은 대조적인 두 낱말입니다. 전자는 이 세상의 원리와 실천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기에, 외부적인 세상의 유행과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고전7:31,요일1:17, 고후6:17) 후자는 가장 깊은 본성의 항구적인 변화를 뜻하고 있습니다.(마17:2,고후 3:18)

 

전자의 헬라 원어의 語根은 σχῆμα로서, 눈에 보이는 외형(fashion)을 가리키고, 후자는 μορφὴ로서 본질적인 형체(essential form)를 뜻합니다.(빌2:6) 결국 전자는 보이는 모양을 시대의 유행에 따르지 말라는 의미이고, 후자는 본질적인 형체로 變化하라는 뜻입니다.(그리스도께서 변화하심을 표현한 낱말) 외적이며 지나가는 이 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내적 本性에서 변화를 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악을 본받거나 선을 따르거나 2가지 중에 하나를 행하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선해 지려는 마음이 없다면 벌써 악한 것이 그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선한 마음이라야,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무엇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를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려면, 매일 매시마다 우리 마음이 분별력이 있어야 <삶이 예배>가 될 수 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와 생활환경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엄청난 위협과 압력으로 순간순간 도전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별하다.’(δοκιμάζω)는 헬라 원어의 뜻은, <金을 製鍊하여 純金>으로 만든다는 것으로, 삶 속에서 무수한 試鍊을 이기고 순전한 믿음 과 마음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 다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의 보살핌이 있으니, 염려 말고 행복한 일생을 생활로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살아갑시다.

 

4). 결론: 우리의 몸은 지난날 더러움의 기계가 되었으나,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기계입니다. 또한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6:15), 성령의 전으로서(고전6:19) 거룩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은 삶이요, 삶은 전체인 것입니다. 이 삶은 思辨으로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몸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삶은 人格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너와 나>는 삶의 관계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사랑도, 예배도, 인격과 만남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간 우리 교계도 서구의 헬레니즘 후예들의 영향을 받아서 이원적인 사고에 물들어서, 신앙과 일상생활을 유리함으로써, 二重人格者의 信者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젠 본문의 말씀에 따라서 <몸>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몸은 그리스도 사건의 실현 장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몸에서 예수의 흔적’(낙인=στίγμα, 갈6:17)을 가진다고 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골1:24) 그리하여 바울은 “너희 몸”, 매일의 과업, 기타 모든 것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예배이므로, 참 예배, 곧 영적 예배는 자기 몸과 나날의 생활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참 예배는 예배당에서 거행하는 것이라기보다, 온 세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聖殿으로 보고, 모든 범상한 행위를 다 예배행사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삶이 온전한 예배가 되기 위하여, 즉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려면,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본받지 말라는 것과 변화를 받으라.’는 것은 대조적인 두 낱말입니다. 전자는 이 세상의 원리와 실천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기에, 외부적인 세상의 유행과 풍조를 따르지 말라는 뜻이고(고전7:31,요일1:17, 고후6:17), 후자는 가장 깊은 본성의 恒久的인 변화를 뜻합니다.(마17:2,고후 3:18)

 

이 세대와 생활환경이 ‘삶으로 드리는 예배’에 엄청난 위협과 압력으로 순간순간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려면, 매일 매시마다 우리 마음이 분별력이 있어야 <삶이 예배>가 될 수 가 있습니다. ‘분별하다.’(δοκιμάζω)의 헬라 원어의 뜻은, <金을 製鍊하여 純金>으로 만든다는 것으로, 삶 속에서 무수한 試鍊을 이기고 순전한 믿음과 마음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헤아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드려지는 우리의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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