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신약설교마당(135)

65. ‘좁은 문’

solomong 2025. 4. 4. 10:43

65. ‘좁은 문’

(본문: 마7:13-14, 눅13:24-30)

 

1). 서론: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1909년에 발표된 장편소설은 너무나 유명해서 여러분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앙드레 지드의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을 그린 것으로, 사랑이란 얼마나 복잡한 감정인가를 그린 작품입니다. 남주인공 ‘제롬’이 14살 때, 두 살 위인 외사촌 누나인 ‘알리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리사’의 여동생 ‘줄리에트’가 ‘제롬’을 사랑하면서 일은 꼬이게 되지요. 여주인공 ‘알리사’는 사촌 동생 ‘제롬’을 사랑하면서도 현세적인 사랑을 눌러버리고 맙니다.

 

이 ‘알리사’의 행위는 어머니의 불륜에 대한 괴로운 추억과 ‘제롬’을 마음 속으로 사랑하고 있는 여동생 ‘줄리에트’에 대한 마음씨 고운 모습 등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결국 ‘알리사’는 제롬의 청혼을 거부하게 되지요. 단지 ‘알리사’의 ‘제롬’에 대한 사랑은 낭만적 플라토닉 사랑 그 자체뿐만 아니라, ‘알리사’의 청교도적 기질의 사랑이 바로 ‘좁은 문’이었습니다. 행복을 원하고 서로 사랑하면서도 결국 비련으로 끝나는 스토리이지요.

‘좁은 문’의 소설은 앙드레지드가 외사촌 누이인 마들린느(뒷날의 자기부인)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고뇌 속에 감미로운 청춘의 정서가 감도는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앙드레지드는 ‘좁은 문’을 통해서, 19세기의 합리주의 만능사상을 지양(止揚)하고, 인간적인 정당한 욕구까지 희생하면서 기독교적 신앙에만 몰두하는 인생관에 회의를 제시한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어찌했던 제롬과 알리사 간의 사랑이 인간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길은 <좁은 문>이었던 것처럼, 생명으로 인도되는 기독자 신앙의 여정(旅程)도 <좁은 문>임을 본문의 말씀은 교훈하고 있습니다.

 

2). 본론(Text): 마태복음의 본문은 산상보훈의 결론적인 부분으로써 <좁은 문과 넓은 문>,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인 가시나무), 및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을 대조하여, 참과 거짓을 갈라놓으면서 극히 경계적(警戒的)인 교훈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에 대한 구약의 말씀은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다.”(신30:9),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으니”(신21:8)라는 교훈을 먼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빛과 어두움의 길이요, 선악(善惡)의 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를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계적(機械的)인 순종을 원치 않으셨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넓고 쉬운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길이지만 생명 문을 선택하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고등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되는대로 사는 자의 길은 우선 안일하여 군중의 길을 따라 가지만, 천국에로 가는 길은 어렵고 좁은 문이지만 생명에로 가는 길을 주님께서는 원하셨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13:24엔“힘쓰라”=άγωνίζεσθε(아고-니제스데)는 말씀은 영어의 ‘고뇌’(苦惱, Agony)란 말의 어원입니다. “정직하고 성실성 있는 노력을 하라.”는 뜻으로 공관복음엔 여기만 나옵니다. 바울서신엔 ‘투쟁한다, 경쟁한다, 노력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고전9:25, 빌1:30, 딤전2:2)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은 너무나 격심하여, 영혼과 마음의 고뇌로 묘사되었습니다. 본문인 눅13: 23-30에서는 천국에 대한 4가지 진리의 말씀 나오고 있습니다. 문이 좁다, 시간이 짧다, 편애가 없다, 세상의 가치판단에 반대되며, 자기부인(否認)의 노력이 요청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동안은 그 문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인생은 모든 행동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역사상의 위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서 좁은 길을 택했고, 그리고 종래 승리했습니다.지금 우리들 앞에 2가지의 길인 어렵고 쉬운 길과 위대함과 생명으로 인도되는 길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땀과 피를 흘린 대가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본문 말씀에 “힘쓰라”라는 말씀은 우리 기독자들의 인생길에 ‘좁은 문’을 선택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상보훈에서 처음으로 대면한 많은 군중을 향하여 “나를 믿고 따르는 길은 어려운 길이다.”라는 것을 다짐하면서 철저한 각오로 따라와야 한다는 것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힘쓰라’라는 낱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정직하고 성실성 있는 노력을 해야만 생명으로 인도되는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Justification), 그 구원은 생명력이 있고 칭찬 받으며 장차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성화(聖化)의 좁은 길의 문으로 들어 가야한다고 했습니다.(Sanctification)

 

좁은 문이 어떤 것인지를 안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감수해야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길도 애쓰고 단련해야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운동선수의 길, 과학자의 실험, 의사의 인턴, 기타 전문 분야는 다 그렇습니다. 가치 있는 길은 포기하기는 쉬우나, 얻기는 힘이 듭니다. 우리들의 인생길, 신앙의 길엔 수많은 유혹, 장애,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날마다 순간순간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하는 고독한 결단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내 뜻대로 방종하면서 사는 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포기하고 결단하여 돌이키는 길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결단과 변화가 요구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생명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무릎을 굽히고 겸손하게 들어가야지, 다리를 곧게 세우고 서서 들어가려고 하면 문에 부딪쳐서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의 표현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 짐을 모두 벗어 버려야 좁은 문에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두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길은 의인의 길이고 또 한 길은 악인의 길입니다. 먼저 의인의 길에 대해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4)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이요.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끝까지 좁은 길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길에 대해서는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시 1:4-5)라고 하시며, 이 두 가지 길에 대한 결론은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좁은 길 가기를 기뻐하고 좁은 길속에서 행복과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의롭고 진실한 사람은 결코 세상과 짝하여 살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모택동 통치시대 때, 중국에 있는 지하교회 성도 한 분이 망명해 왔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와 찬송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있는 세계를 갈망한 나머지, 자동차 튜브에 몸을 싣고 사선을 넘어 ‘홍콩’으로 망명해 왔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 진영의 여러 교회들을 돌아 다녀 본 그 성도가 어느 날, 다시금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되돌아가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었다고 합니다. 이 지하 교회 성도는 대륙으로 돌아가면서 이런 말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자유세계는 의식주와 생활의 염려는 없으나, 이런 상태에서의 신앙생활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내세의 영광을 위해서는 다시 기근의 땅 중국으로 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말 뒤끝에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지하 교회 시절의 그 뜨거웠던 믿음과 목숨을 건 철저한 신앙생활이 그립습니다."라고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그렇습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은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통의 길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생명을 가진 사람은,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처럼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났을 때, 그는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묵상해서 잘 알 것입니다.(마13:45-46)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으며 마태복음 5:10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지, 그 뜻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할 때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4). 결론: 왜 예수님께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은 넓은 길입니까. 좁은 길입니까. 자기 부정의 길입니까. 자기 방종의 길입니까. 지금 내가 가는 길은 생명의 길입니까. 멸망의 길입니까. 육신이 원하는 대로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변화와 결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고 있습니까. 좁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언제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대는 사탄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핍박과 오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오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좁고 험한 길,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신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