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18. 눈동자처럼 지키소서!

solomong 2025. 1. 24. 10:54

18. 눈동자처럼 지키소서!

(본문: 시 17:1-15)

1). 서론: 본문에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라는 히브리 원어로 <이숀>이라고 하는데, 이 원어의 의미는 “작은 사람”, “눈 속에 작은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상대자의 눈동자에 비취는 인간의 형상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사랑스럽고 귀여운 사람이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하지요. 이는 母性愛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데,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보면서 천진난만한 그 눈동자를 보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라고 말하지요.

 

엄마가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가만히 아이의 눈과 마주치면 아이는 또렷하게 엄마를 주시합니다.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또한 할아버지가 자기 손녀를 보면서,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내 손녀딸!”이라고 하지요. 이 글을 쓰는 때는 마침 2020.10.9.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님의 한글 창제하시느라고 애쓰신 그 보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글의 아름답고 애정 어린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고 그리운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사모하는 심정으로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하다고 말을 하지요.

 

오늘 본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의 박해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눈동자 같이”라고 지켜주시기를 애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 안에 있을 때, 이 인생을 지킬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시고, 시인은 자기 자신을 詩的 표현으로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존재>의 의미로 사랑해 주시고 보호해 달라는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존재로 하나님의 귀여움을 받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이 시인은 악인과 원수들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위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의 수난과 위험을 말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그이 생명의 위험을 눈앞에 두고 있는 긴급한 사태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의 수난은 그의 죄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경건( 敬虔)과 외로운 생활임을 독백(獨白)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직한 사람”, “거짓이 없는 사람”,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시험하고 감찰해 보았으나, 아무러한 흠을 찾을 수 없는 순진한 사람”(1-3), 그는 범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4절)

 

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길을 굳게 지키며, 탈선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5) 하지만, 그는 자기의 정의(正義)를 지키며 하나님의 얼굴만 쳐다보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무죄, 정직, 진실,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재 견딜 수 없는 수난 중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의 원수는 강포한 자요(4), 짓밟는 자요(9), 위협하는 자요(11), 넘어드리려는 자요(11), 사자와 같다. (12) 라고 합니다. 하여간,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래서 시인 자신의 형상을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로 여겨 달라고 호소하면서, 또한 자기 기도를 응답해 주실 하나님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15)

 

3). 본론(Context): 17:2에 “주께서 나를 판단.......”이란 말씀이 나오는데, 사실은 내가 나의 내심(內心)을 잘 모르는 인간 존재입니다. 인간은 정신분석적으로 id(원초적 자아)가 있는데, 이것은 억압된 욕구, 본능이 자리하고 있는 곳, 쾌락의 원리라고 합니다. (Pleasure Principle) 그다음은 ego는 원래 id의 일부로서 사람이 성장함에 따라서 현실과 접촉하는 동안 id로부터 분리되어, 출생 후6-8개월에 형성되어, 2, 3세에 충분히 성장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Superego는 인간 마음의 도덕적 규제, 심판자로서, Superego는 id와 ego가 발전한 것입니다. 대부분 무의식, 의식도 포함, 도덕적 양심, 종교적 가치관 등이 여기에 속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가치관이 그대로 내면화,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원리(Morality Principle)라고 합니다.

 

자기도 이중적 자기가 있기에 즉 참 자기(Real-Self)와 공적 자기가 (Public-Self)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아도 자기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아는 것은 외형(外形), 행위, 사귐을 통해서,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의미가 되고 싶다”라고 하지만, 이것도 열린 마음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속은 모른다.” 우리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나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내 마음과 행위를 보시고 계십니다. “사캐오야 내려오라!”(눅 19:5), “나다나엘이 주님께로 오는 것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하나님의 승리란 뜻)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요 1:47-48)라고 한 주님이 십니다.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 하지 아니하리다.”(17:3), ‘내 마음에 악한 생각이 일어날지라도 이를 억제(抑制)하고, 입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새가 내 머리 위를 나르는 것은(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 내가 어쩔 수 없지만, 그 새가 내 머리에 앉아 집을 지으려는 것(그 나쁜 생각을 행동하는 것)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Moody가 말했습니다만, 본문의 시인은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표준에 미급하지만, 적어도 바리새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눅 18:9에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 기도가 나옵니다만, 위선의 기도와 회개의 기도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개하는 눈물이 범죄의 핑계는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기도는 自己否定의 행위입니다. 내 능력, 지식, 방법, 경험 등 내게 관한 것을 모두 否定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솔직하게 자문자답해 보십시오. 나로 인하여 가능성(可能性)을 조금이라도 인정하고 신뢰(信賴)하는 상태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기도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는 하나님을 긍정(肯定)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否定의 자세를 취한 다음, 그 즉시로 갖게 되는 적극적인 행위가 기도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시오."라는 절대신뢰(絶代信賴)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려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 기본은 먼저 나를 변화시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본문 17:8에 눈동자처럼 지켜 주소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동자(“작은 사람”)는 상대자의 눈동자에 비취는 자기의 향상을 가리킨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비취인 나를 보호해 주소서의 뜻입니다. 얼마나 떳떳했으면, 하나님에게 비추어진 자기의 모습을 보시고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듯이, 구원을 호소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시 전체의 교훈은 어려운 시련 자가 구원을 간청하는 시라는 것입니다. 야웨여! 의로우신 분이여! 내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거짓말이 아닙니다.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라는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그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 현실에서 그는 야웨 하나님께 애원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 하나님은 항상 죽음에 직면한 경건한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홍해의 절망한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은 항상 '인간의 가능성이 다 두절(杜絶)될 때 일어났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한 예수님 교훈의 진실성(眞實性)은 이스라엘의 긴 신앙사(信仰史)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좀 짓궂은 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낭떠러지 끝, 단애까지 끌고 가십니다. 절벽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말입니다. 이삭의 제물,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을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라는 말씀들을 볼 때, 하는 말입니다.

 

삶의 절벽 같은 위기의 상황 속에도 마지막 주님의 구원이 손길을 감지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서론에서 언급한 은혜로운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해봅시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라는 히브리어로 <이숀>이라고 하는데, 이 원어의 의미는 “작은 사람”, “눈 속에 작은딸”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상대자의 눈동자에 비취는 인간의 형상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말로는 “눈 밖에 나다.”는 미운 짓을 해서 신임을 잃은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사랑스럽고 귀여운 사람이면 흔히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母性愛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데,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보면서 천진난만한 그 눈동자를 보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라고 합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젖꼭지를 물리고 가만히 아이의 눈과 마주치면 아이는 또렷하게 엄마를 주시합니다.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또는 할아버지가 자기 손녀딸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내 손녀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글을 쓰는 때는 마침 2020.10.9.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하시느라고 애쓰신 그 보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글의 아름답고 애정 어린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고 그리운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고 사모하는 심정으로 “눈에 삼삼, 귀에 쟁쟁”하다는 말이나, “눈에 밞히다.”라는 말은 모두가 잊을 수가 없이 자꾸 눈에 떠오른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하나님께 원수의 박해에서 보호해 주시기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기를 애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 안에 있을 때, 이 인생을 지킬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시고, 시인은 자기 자신을 詩的 표현으로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존재>의 의미로 사랑해 주시고 보호해 달라는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존재로 하나님의 귀여움을 받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인간의 절망적 상황이라도, 우리가 낙심치 않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편으로 넘어가는(공은 하나님 쪽으로 넘어간 순간) 하나님께 소망을 기대하는 시간이란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절벽은 끝이 아니요,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나기 전에 순교한 <본헤퍼>는 옥중에서 형장으로 끌려 나가면서, 옥중의 친구들에게 한 유명한 말, " 이것이 마지막이지요, 그러나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인간의 절망 그곳에 새로운 하나님의 희망 놀이 뜨고, 悅樂의 새가 노래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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