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초로인생(草露人生)
(시 90:1~17)
1). 서론: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는 한자성어는 "풀 위의 이슬 같은 인생"이라는 의미로, 인생의 덧없고 허무한 인간실존을 비유적으로 니타낸 것입니다. 이 표현은 인생이 짧고 변덕스러움을 강조하며, 이슬이 아침에 생기고 금방 사라지듯 인생도 잠간 동안만 존재한다는 블가항력적이고 순간적인 존재인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초로인생의 구체적 문헌적 유래는 명확하게 밝혀진바는 없으나, 이 개념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불교사상과 유교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한자성어는 시적인 표현과 문학적인 묘사를 통해 인생의 짧음과 그 속의 쓸쓸함과 허무함을 함께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사용 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문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 존재의 덧얿음과 사람의 진정성을 탐구 하는데 활용됩니다. 본문 시를 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급 시키서 광야 40년간 해메다가 하나님께 불신앙 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고독히 생을 마감한 한(恨) 많은 생을 묘사한 듯 합니다. 이제 우리 역시 허무하고 유한한 인생인지라, 본문을 통해서 덧없는 인생살이에서 의미 있는 교훈을 터득했으면 합니다.
2). 본론(Text): 본문은 모세의 시이며, 따라서 시편 중에 최고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인생의 허무성을 강조하며, 그 원인이 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광야 40년동안 그들의 불신앙과 죄로 인해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광야에서 죽은 사실을 배경한 듯합니다. 예배 때 많이 사용되며, 1. 하나님의 영원성(1~2), 2. 인생의 무상(3~11), 3. 기도(12~17)를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 영광, 권능, 두려움, 그의 진실, 공의, 평화, 섭리 등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인간을 위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인간이란 웃고 슬퍼하고, 찬송하고 안타까워하고, 감사하고 불평하고, 복을 빌고 저주하고, 사모하고 미워하고, 기다리다가 지루하여 짜증을 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개 하시고, 그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만물을 지배하는 능력있는 존재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시 8:4~5) 그러나 "나는 벌레입니다."(시 22:6)라고 함에 인간의 존재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의 세계에서 그의 축복과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인생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 시인이 생각하는 인간은 수명이 제한되었고 그 본질은 흙이요, 그의 운명은 자기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상한 것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 영구적이 되지 못하고 모두 다 자기의 죽음의 날을 조만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靈長)으로서 만물울 지배하는 자랑스런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의 수명은 제한되어 있습나다. "우리의 수명은 칠십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년이다."(10절)
본문의 시인이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 또는 80세로 보고 있는 것은 인간의 수명을 상당히 길게 잡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평균 수명이 40세가 못되는 나라가 많이 있습니다. 70 또는 80이라면 오늘 선진국의 평균 수명과 거의 같다고 하겠습니다. 오히려 이만하지 못한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한 연수가 비록 70, 또는 80이라도 그것은 일정한 한계를 가진 것이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한 생명이 땅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곡예사와 같이 위험한 고비들을 넘고 또 넘어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이 70 또는 80이라고 해도 그것은 순탄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시인은 연로한 사람으로 인생의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같이 70세, 80세를 살아도 그의 삶이란 것은 고생과 슬픔을 겪고 지내는 것밖에 없다고 합니다.
근대화와 산업화된 오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70, 80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수고와 슬픔이며 또한 우리는 하루의 삶이라도 무사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인간들입니다. 물론 권력과 재력(財力)을 가진 사람 중에는 하루하루를 오락과 즐거움과 만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특수층이 누리는 호화스럽고 사치한 삶에 불과합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사람은 모두 수고와 괴로움, 슬픔과 안타까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 수고와 슬픔의 인생도 오래 살지 못하고 목숨의 한계를 가자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70, 80년의 삶도 지내고 보면 "날아가는 것 같이"(10절) 빨리 지나갑니다. 유수(流水) 같은 세월이란 말, 또는 살같이 빠른 세월이라는 우리나라의 표현과 비슷합니다. 붙잡을 수 없습나다. 이것을 시인은 "우리의 한 평생이 일순간같이 지나간다."(9절)고 했습니다.
이런한 삶은 결국 인간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렇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당신의 진노로 지나갑니다."(9절)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바로 알고 깨달을 사람은 없다."(11절) 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온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진노 대신 긍휼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목숨이 15년이나 더 연장을 받았습니다.(사38: 5~8)
그러나 이러한 제한된 목숨을 가진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는 것입니까? 인간의 본질 문제를 생각하는 시인은 창조의 기사에서, 흙으로 만들어지고, 또 목숨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돌이나 쇠로 된 것이 아닙니다. 흙으로 되었습니다. 먼지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진토이다."(시 103: 15)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의 피조성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을 흙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 "사람을 흙으로 돌아가라 하신다."(3절) 인간은 스스로 난 것이 아닙니다. 책상이 사람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듯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인간의 목숨이 끝나면 그 근본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 숨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간다."(시146:4)고 했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본질이 이렇게 약한것이기 때문에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입니다.(시32: 12)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바람 앞에 티끌같이 부숴지고 거리의 진흙처럼 쏟아진다."(시 18: 41~42)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본문의 시인은 사람의 운명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홍수처럼 밀리어 간다."라고 했습니다. 밤새 내린 비로 말미암아 홍수가 나서 마을과 들판을 쓸어가듯 인간은 자기가 생각지도 못한 순건에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죽음도 일정한 기한이 있어 허무하고 무상하지만, 그보다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죽음으로 밀려간다는 허무한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풀에다 비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돋아나는 풀처럼 아침에는 싱싱하다가도 저녁에는...시들어 마릅니다."(5~6절) 37편 시인은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보고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다."(2절)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운명이 허무함을 103편 시인도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광은 들의 꽃과 같다. 바람이 불어올 때 그 있던 꽃도 찾을 수 없다."(시103:15)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도 인생은 풀과 같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 40:6~7) 본문의 시인은 꽃보다 더 허무한 "꿈"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 90:5) 원어는 "꿈"이라기보다 "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석가들이 이 "잠"을 "꿈"으로 읽습니다. 이 귀절에 "아침에 돋아나는 풀 같다."는 말이 인간의 허무성을 잘 설명합니다.
인생의 본질은 흙이요, 그 수명은 70년이며, 근력이 좋아야 80년이라도 유수같은 인생으로 홍수처럼 밀려가고, 또 인생을 풀과 꽃에 비유해서 허무하기만 하다고했습니다. 결국은 "풀 위의 이슬 같은 인생" <草露人生>으로 잠간 동안만 존재한다는 블가항력적이고 순간적인 존재인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본문의 시인이 인간의 유약성, 무상성, 허무성을 노래한 것은 결코 비관론자나 허무주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나다. 시인이 의도하는 바는 이렇게 약하고 순간적이고 또 믿을 것이 못되는 인간이라도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노래합니다. 여기 시인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천년은 하나님의 한순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4절)
하나님의 존재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다고 합니다. 존재 이전의 존재,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당신이 만드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1~2절) 성서의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존재 이전의 존재, 영원 속에 사시는 분임을 이 귀절이 가장 적절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이렇게 분명하게 말해 주는 본문의 시인은 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즉 전도자가 말하는 대로 사람은 헛되고 또 헛된 존재이지만, 그에게 있는 한 가지의 자랑은 그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전 3:11) 사람은 영원을 자기 집으로 한 존재라 합니다. (전11: 5) 본문의 시인이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된다."라고 함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인간의 본향이고, 이 영원한 하나님과 맺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자신은 결코 유약하거나 무상하거나 또한 허무한 존재가 아님을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순간적인 인간 존재, "바람 앞에 겨와 같은 존재"(시 35:5), "입김보다 가벼운 존재"(시 62:9)이지만, 이런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성에 접붙어서 영원에로 향하고 있는 존재임을 본문의 시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에 접붙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 인간의 일생이 즐거울 수 있다는(14절) 낙관론을 가진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나고 이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분양되어 있다고 합나다.(16절)
그러므로 풀과 같은 존재지만 하나님의 영원이 약속되었고, 시들고 마르는 꽃과 같으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마냥 즐겁습니다. 겁낼 것 없습니다. 불안할 것도 없습니다. 허무하지도 무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본문의 시인처럼 올릴 수 있습니다.
"야웨 우리 하나님이여
당신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오게 하소서.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을
굳건케 하소서.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을
굳건케 하소서" (17절)
우리의 사는 삶이 흔들리지 않고 씩씩하게 전진하고 무너지지 말게 해달라는 이 기도는 풀과 꽃과 같은 인간이 그 목숨의 마지막 순간까지 드릴 기도입니다.
이상과 같이 본문을 좀 더 쉬운 글로 풀이 해 보았습니다. 모세가 작시한 본문은 먼저 하나님의 영원성과 창조에 대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1~2) 그 다음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대조되는 인간의 유한성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티끌로 창조하셨고, 일정한 기간 후엔 다시 티끌로 돌아가는 풀의 일생 같은 허무한 인생임을 술회하고 있습니다.(3~11)
본문의 시인은 인생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끝으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12~17) 기도의 첫째 조목은 인생의 무상을 절실히 깨닫게 하는 <지혜>의 마음을 구합니다. 두번째 기도는 인간 자신의 무상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찿으리니, <긍휼>히 여겨 달라는 간구입니다. 세번째 하소연은 일평생을 허무의 삶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즐거움>의 인생살이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네번째 소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자손손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미막으로 인생의 일상생업이 <안정되고 번창>케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본문의 시인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허무한 인생살이를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수가 없어서, 위의 5종목의 기도를 하는데, 제가 보기엔 현대적 인생의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면 다른 4가지는 긍휼 속에 포괄적으로 함축된다고 생각이 듭니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라함'(רַחַם) 이라고 하고, 신약 헬라어로는 '엘레에몬'(ἐλεήμων)이라고 한는데, '라함' (רַחַם) 이라는 낱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의 생명이 자라고 양분을 얻어 먹으며 양수 속에 떠 있으면서, 태아가 가장 안전하게 생명을 유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긍휼의 의미입니다. 뱃속에서 태아는 어머니의 탯줄로 생명을 유지하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어머니의 뱃속 아기처럼, 하나님의 연민에 찬 얼굴 빛 하에서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히 여기심 속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니까 하는 말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자궁입니다. 태아를 품고 있는 자궁처럼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이 우리를 감싸주시면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돼 그분의 향긋한 사랑이 우리를 어머니 심정처럼 돌보시면 이에서 더 든든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종적(縱的)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긍휼로 평안히 살게 되면, 우리 또한 횡적(橫的)으로도 그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로 형제를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4).결론: 본문 시인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허무성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5종목의 기도를 드리지만, 지금의 우리들은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입으면 풍족하다고 사료됩니다. 흔히들 허무하고 무상한 인생살이를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도 합니다. 이 낱말은 중국 남송의 시인 양만리(楊萬里)가 지은 납전월계(臘前月季)라는 시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뜻이고, 내면적으로 좁게 보면 '젊음, 아름다움은 찰나'라는 뜻이 됩니다.
더 넓게 보면, '한번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하기 마련'이라든지, '영원한 왕자는 없다.' 라고 하거나, '외형의 화려함은 오래 가지 못한다.'란 의미로도 쓸 수가 있습니다. 종종 미인박명으로도 쓰이나 아무래도 유명한 것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고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라는 의미의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十年)및 "풀 위의 이슬 같은 인생"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 인생의 초점을 맞추면 인생이 허무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력은 넘어가고, 해는 바뀌고 우리들은 나이를 한 살 더 먹겠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 성공의 비결입니다. 2025년에도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의 손을 붙잡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끝.
2025년 1월 3일
山下연구원: 양 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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