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구약설교마당

14. 正義의 예언자 아모스

solomong 2024. 12. 28. 10:50

14. 正義의 예언자 아모스

(본문:암 5:21-24)

1). 서론: 이스라엘 왕국 건설 후, 1C. 내에 급속한 사회적 변천 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유목 생활에서 농경사회로 변화된 이스라엘의 경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제는 상인들까지 생기게 되어 경제적 층계와 아울러 계급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 II세 때, 북 왕국은 속 알이 없는 번영의 정점에 달했습니다. 이때 한낱 ‘드고아’의 목자에 불과했던 Amos가 그때, 역사적 현실 한복판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경제적 번영을 노래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유린 되는 정의를 보고 분연히 저들과 대결해 나갔습니다. 지금처럼 정의가 없이 도도히 흘러가는 물결을 보고, 우리 역시 성서적 정의감을 새롭게 인식해야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⓵. 본문의 개요(암 5:21-24)-절기와 제사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탄핵인바, 종교행사로 하나님의 호의를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제사나 찬양이 아니라, 정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절기란 3대 절기인 무교절, 칠칠 절 및 초막절을 의미하고, 제사는 번제와 화목제 및 소제를 뜻하며, 이는 제사 후에, 제물을 회식하게 되는데,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를 친밀하게 함이 그 목적입니다. 또한 예배에 수반되는 찬양도 하나님께서 거절하심은 하나님과 가까이하여 백성들의 욕심을 이루려는 계획이기에 거절하신다는 것입니다.

 

⓶. 오직 공의와 정의를 흐르게 하라. (암 5:24) -하나님께 겸손한 순종은 사람들 사이에 공의가 마르지 않는 물 같이 흐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 간에 공의를 요구하시니, 종교의식이 아무리 잘 지키더라도, 도덕적 의무를 등한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社會正義를 실현하라는 말씀입니다.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며, 하나님 목전에서 너희 백성들의 악업을 버리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신원하며, 과부를 변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장애를 많이 받아 온 공의는 거침없이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는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개울 물 같이 흐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3). 본론(Context): Amos는 이스라엘의 사회악을 구체적으로 고발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힘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 (암 2 : 6-7)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가 시종일관 규탄하려는 것은 종교 문제가 아니라, 社會正義가 유린 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정의가 유린 되어 있는 현실에 전율합니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듣습니다. 암 3:8.에,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냐.”라는 말씀은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으로, 이스라엘 신앙 문제와 결단코 유리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와 정의와의 관계입니다. 그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이 종교와 윤리적 삶을 갈라놓고 종교는 일상생활과 구별된 다른 영역에 속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종교는 오히려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화살을 바로 저들의 종교 생활을 겨누게 됩니다. 그래서 정의를 외면한 종교 행위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암 5:21-22에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암 5:24에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은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그는 代辯했습니다. 그때의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공의와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의를 무시한 종교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모스 때부터 시작한 새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본래부터 遊離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를 무시해도, 좋은 핑계가 될 바에는 그런 종교의식은 오히려 없어야 한다는데 그의 철저성이 엿보입니다.

이웃 사랑이란 추상적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결단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번영하는 경제 질서에서 이웃이 유린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종교를 일상생활과 성별 함으로써 正義에 둔감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과 유리된 종교 행위가 있을 수 없듯이, 소위 세속적인 삶을 떠난 종교적 삶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삶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사회문제를 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개혁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뜻의 선포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었습니다.

責任이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 즉, 지금과 결부되어있습니다. 현재의 과제를 외면하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내일은 그에게 심판이 됩니다. 오늘 책임회피는 내일의 심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모스는 폭탄적인 선언을 합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 5:18) 하였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구체적인 제 임무를 다하지 않고, 여호와의 날, 즉, 미래의 궁극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규탄하는 말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저들의 불의를 처벌할 것을 선언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부패에서 올 필연적인 결과와 그때의 국제정세(‘앗수리아’의 침입)를 앞당겨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시정할 것을 촉구한 것이 아니라, 이 민족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약속의 관계를 스스로 파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의 뜻은 포기된다는 말입니까? 아모스는 그 시대인에게는 너무나도 역설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립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報應하리라 하였나니”(암 3:2)라는 말씀은 죄악을 報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것은 당시 청중의 기대를 정면으로 부수는 선언(宣言)이었습니다. 택했기 때문에 모든 죄를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모스의 독특한 주장은 아닙니다만, 선택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와 保障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은 바로 책임 있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책임을 회피하면, 선택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결과를 추궁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은 책임을 종교적 의무에 局限시키는 것이 잘못이 있으며, 그럼으로써 종교가 그 구체적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상기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아모스의 핵심적인 주제는 다음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1). 그 첫째로는 이웃 형제의 아픔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만연했다는 사회윤리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입니다. (2). 그 둘째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를 무시해도 좋다는, 핑계가 될 바에는 그런 종교의식은 오히려 필요 없다고 하는 사회 정의관의 철저함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가 반성해야 할 문제 역시 사회윤리와 사회정의 실현의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20C. 초, 미국의 사회윤리 학자인 C.H. Mead는 인간 개체인 自我는 사회과정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自我가 된다는 것으로, 즉 나의 <몸짓>(Gesture)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서 나의 몸짓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Me>의 개념은 타인이 나에 대한 Image의 정신적 표현을 말한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 중요한 몇몇 관계자를 만나면 나는 몇몇 다른 <Me>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사회공동체가 만들어 낸 <社會 我>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타자의 눈을 통해서 비추어진 자아를 <Me>란 것이요, 객관화된 자아가 됨으로써 비로써 <We-Relation>이란 사회성이 형성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회윤리의 핵요, 기초라는 것입니다. We-Relation 속에서 사랑을 경험할 때, 인간 존재의 관계성이 사회윤리의 성실성이 실현된다고 하였습니다. 아모스의 외침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윤리의 책임을 성실히 실현치 못하고 부패한 것은 이 We-Relation이 형성치 못하고, 구구 각각으로, 뿔뿔이 개인의 이익만 추구했기 때문이란 것이었습니다.

 

또한 20C. 미국의 사회윤리 학자 R. Niebuhr의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1932) 라는 저서 속에서, 개인윤리의 원칙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그대로 사회윤리에 연장해서 개인윤리의 善과 義가 연속성을 가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값싼 감상주의와 낭만주의에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자기기만과 위선과 망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송두리째 부정하고 맙니다. 사회윤리는 집단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집단이기주의’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사랑과 도덕의 원칙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요, 죄인은 곧 이기적이기 때문에 사회는 탈법과 부정과 비리와 온갖 권모술수와 힘 있는 자의 힘의 남용과 악용, 그리고 악의 소굴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사회는 단순한 양심이나 이성에 의해서만 통제되는 것이 아니고, <힘>(Power)에 의해서 지배를 받기에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없이는 어떤 도덕적, 사회적인 제한도 불의를 완전히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해답은 권력의 분산(Distribution of Power)과 ‘힘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이 약한 집단이나 힘없는 개인이 권력의 소지자나 강한 집단에 대해서 <正義>를 호소해도 그것이 수용되지 않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압력을 가 할 수 있는 대등한 힘이 있을 때만, 그 호소와 주장이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Niebuhr는 ‘힘은 힘으로 도전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Power must be challenged by power.)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종교의식이 오히려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모세 율법이 생활 속에서 진실히 이행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와 제사의 예배가 사회 도덕적인 책임도 병행했더라면,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어 결국 <힘>과 <권위>가 있는 종교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으며, 부패한 왕족들과 상류계급을 견제하여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어, 공의는 거침없는 물처럼 흐르게 되고, 정의는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개울 물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상기와 같은 본문의 말씀이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020년 8.15 광복절에 서울의 한 교회가 시위 운동으로, 교인 중에 ’코로나‘ 누적 확진자가 8. 26.에는 933명이나 발생하였다는 보도가 나왔었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방역을 철저히 잘해야 해야 함에도, 자기들의 주장을 표명하기 위한 것으로 말미암아, 민폐의 상징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부 교인들은 반성은커녕 종교의 자유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폐기독교”, “적폐개신교”, 소리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간 우리가 수없이 설교했던 기본적인 말씀마저도 유아기적인 상태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너’ , ‘나라와 민족’이란 운명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과거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33인 민족 대표 중에 16명이 기독 신자로서, 조국과 국민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했던 선열의 얼이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 신자들에게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겠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이 ‘아모스’가 외친 종교와 삶이 유리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 형제의 사랑이 일치해야 하는 실례가 아닐까요.

Niebuhr 이론처럼, 아무리 기독 신자 개개인이 도덕적이고 양심적일지라도, 사회 윤리적 차원엔 <힘>이 없어서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없기에, 교회 공동체(교회, 노회, 총회, 기독교 연합회 등등)의 신앙과 삶이 일반 백성들에게 큰 感化를 줄 때, 우리 사회의 불의와 죄악을 규탄할 때, 교회 공동체의 소리를 국민이 귀담아듣고 잘못을 시인하면서 뉘우칠 것입니다. 이로써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 신자와 교회들이 사회윤리와 사회정의를 실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4). 결론: 현실 사회에 대한 우리 신자의 책임 이전에, 신앙과 삶이 유리된 것에 대한 오늘의 신자와 교회는 깊은 自省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구체적 삶의 현실이 바로 <지금과 여기>(Now and Here)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가장 구체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주의 종들은 아모스처럼 사회정의의 기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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