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의 Agape에로 근사적 접근
19. 니버의 사회윤리(6)
니버는 '힘의 균형'(The Balance of Power) 속에서 세계평화, 사회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적 윤리관이요, 인간관이라고 하겠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한 집단이 그의 본성(집단 이기주의)에 의해서 힘을 독점하게 되면, 자기 집단 및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힘의 남용'을 하기 마련이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막는 길은 힘을 분산하고, 그 분산된 힘이 균형을 유지 함으로써, 상호 견제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니버는 사랑의 사회적 차원에 있어서의 실행은 힘의 의한 강제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문제가 다름 아닌 사랑과 정의의 문제인 것이다. 사랑의 사회적 실현은 정의로운 사회제도와 사회정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소홀히 할 때, 기독교 신자들이 말하는 소위 '개인이 중생(重生)하면 정의로운 사회가 자동적으로 온다는 것'은 하나의 기독교 낭만주의요, 감상주의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니버는 기독교 현실주의를 주장하게 된 그의 논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의 윤리'가 현실적 타당한 논리일지라도, 집단 이기주의나 어떤 강력한 정치적 힘도 그것이 죄로 오염된다고 했다.
이 사실 앞에서, 니버의 '인간관'에 심사숙고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사료된다. 그것은 인간이란 피조물로서의 유한성과 한계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죄인이요, 그것들이 인간의 모든 활동과 성취를 오염시킨 것을 인정함으로써 니버는 진보주의적 기독교의 함정인 Utopianism을 극복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의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공정한 평가를 하며, 그것이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길을 개방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예리하게 보는 현실주의적 통찰력을 가진 그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만, 그것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는 합리적 능력이나 창조적 능력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적 현실 속에서는, 인간의 모든 성취는 제한된 것이며, 뿐만 아니라, 죄로 물들었지만, 인간은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미 언급한 대로 니버에게 있어 '약간 더한 것'(a little more)과 '약간 덜한 것'(a little less) 사이의(집단과 집단간의 어느 집단은 약간 윤리적이고, 어느 집단은 약간 비윤리적인 것) 상대적 차이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다. 니버의 이러한 입장은 그로 하여금 문화적 패배주의(cultural defeatism)나 도덕적 냉소주의를 극복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간이 피조물이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적 건설적 활동을 통해서 생의 궁극적 윤리적 원리인 그리스도의 'agape'의 사랑에로 일보 '근사적 접근'(Approximate approach)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또 그것을 주장함으로써('아가페'로 근사적 접근 가능성) 기독교의 문화적 패배주의를 극복한다. 동시에 그는 상대적 성취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보다 좋은 것을 선택함으로써 도덕적 냉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다.
결론을 맺자! 지금까지 언급한, 사회윤리의 힘의 논리, 집단 이기주의 및 계층 간의 대립에 대해서, 니버는 1). 사랑에로 '근사적 접근'을 해결의 한 방법으로 제시했으며, 2).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코자 노력하는 방법이 바로 민주주의."라고 했다. (-니버의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끝.
2012. 7. 29.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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