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제목설교는 어떻게 디자인할까.
-인간정황에서 묻고 성서에서 답변한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곽안련 선교사는 「신학지남」(1918-1940)과 그의 저서「설교학」등에서 제목설교에 관련된 글 발표에서 ‘제목설교’라는 언어적 표현을 했고, 현대는 ‘인간상황’을 강조해서 ‘상황설교’라고 부르기도 한다.(박근원 박사의 저서 「오늘의 설교론」에서는 이 양자를 다르게 본다.) 강의자가 제목설교라 함은 인간상황에 근거해서 도출한 제목일진데 반드시 성서 본문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으려고 할 때, 제목설교와 상황설교를 거의(다른 면은 뒤에서 다루겠다.) 같은 의미로 쓰기로 한다.
(이 글 뒷편에) “외로움과 홀로움”이 그 예이며, 또한 “제목설교는 어떻게 디자인 할까.”의 범례(範例)로 하겠다.
1). 제목에 대한 것을 뒤로 미루자고 했는데, 이왕 ‘제목설교’에 대한 논제라면 먼저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전 강의에서 제목은 문패와 간판과 같다고 한바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설교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성명’과 같다. 사람에게서 성명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말해주듯이, 설교에서 설교제목이 회중(會衆)에 회자 되어 평가를 받게 된다.
제목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명사형과 ②.문장형이 그것이다. 명사형은 “사람을 보는 시각”, “님이 떠난 빈자리와 같은 한국교회”, “느보산의 모세”, “우연한 화살” 등이다. 명사 앞에 형용사나 형용적인 수식어가 있는 것이다. 문장형은 “갈릴리에서 만나자”,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강요된 사랑은 사랑의 모독입니다.” 등으로 한 문장으로 주어(어떨 때는 함축되어 있지만 주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와 술어가 있는 명제(命題)적인 것을 말한다.
제목의 내용적인 면에서 분류를 한다면, ①. 은유적 제목(설교내용을 압축해서 제시하는 것) “목자와 양” 같은 것이다. ②.상징적 제목(설교의 대상을 가리킨다) “미디안 광야의 모세” ③. 역설적 제목[역설(Paradox), 역설을 통해서 설교를 심화시키는 것] “가난한 자의 행복”(산상보훈의 8복이 다 역설적인 것이다.), ④.기원적 제목(소망과 염원을 제시하는 것)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2).형상적 제목(친근감 있는 소재를 통해 새로운 의미부여) “들의 백합화”, “숨겨진 진주”, “옥합을 깨트리는 여인”, 조어적(造語的) 제목(단어와 단어를 결합하여 새 의미를 만드는 조어법이다)- “세미한 소리”, “급하고 강한 성령의 바람”, “성령의 바람 부는 날의 은혜” 등이다.
3). 복합 명사적 제목(단순하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하여 복합명사를 쓰는 것)-“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목사님, 목사님, 당회장 목사님”, “민들레, 민들레교회 이야기”, “베드로여, 베드로여”,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복합적이면서 본문내용상 역설적 표현) 등이다. 한 설교자의 목회적 과정과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사를 압축시킨다는 의미에서 설교제목은 이처럼 다양하고 매우 중요한 것이다. 대략 설교제목만 보아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설교제목을 어떤 것으로 할까를 생각할 때 이런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어감(語感)이다. ‘어감’이란 무엇인가. 언어의 생명력이다. 어감 없는 말이 개념으로 자주 취급되는데, 개념적인 것은 너무 딱딱하고 읽기도 골치 아프다. 즉, 설교제목이나 본론에 있어서, 어감 없는 말은 ‘언어의 시체’와 같다. 그 언어의 뉘앙스는 생동감이 없다.
어감은 언어생활에서 생동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흔히 목사들의 설교제목을 보면, 대부분이 어감이 없이 맨송맨송한 감이 난다. 한 사상을 전달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로 잘 전달하는 힘(능력·은혜)이 있어야 한다. 언어활동은 정서를 이입(移入)함으로써 표출자의 표현효과를 훨씬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강의자가 설교에 자주 적합한 시를 인용하는데, ‘댓글’로 다는 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의 능력으로 하면 되지, 무슨 시(詩) 나부랭이냐.”고 말하는 것을 이따금 보았다. 설교도 말씀의 전달로써 일종의 예술이다. 시를 모르고 어찌 인간상황을 논할 것이며 ‘시편’을 어찌 읽고 알 것인가!
“시인은 단 한 줄의 시를 읊조리기 위해 많은 도시를 거닐어야 하고, 죽은 사람과 하루 밤을 지새워 봐야 한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강의자의 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서 나온 글).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고뇌를 모르고서는 좋은 설교를 전달할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시는 인생 고뇌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뇌를 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감의 정체(正體, Identity)는 무엇인가. 대개 언어에는 의미 즉 ‘뜻’과 음성인 ‘소리’ 두 방면이 있다. 발음은 형식이요, 의미는 말의 내용이다. 이 형식과 내용에 서로 다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 발음의 고저·강약·경어·비어·정감 어린 내용의 낱말 선택 여하 및 그 정황에 적중하는 의미 있는 낱말의 선택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면 ‘명사형의 설교제목이냐, 문장형의 설교제목이냐’ 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 옛날에는 명사형의 제목이 많았다.
근래에 와서는 문장형 제목도 즐겨 사용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문장형이 너무 길거나, 비속(卑俗)하거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은 좋지 않다. 일종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어감(情感)이 있는 제목은 울림(감동)이 그 만큼 클 수도 있기에, 그때 정황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뜻에서 세계명작 소설·시·수필·수상집을 많이 읽으라고 권장하고 싶다. 제목에서 어떤 분은 제목부터 정하고 제목설교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을 완성 후에(설교목표를 분명히 가진 채) 제목을 쓰는 사람도 있다.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하면 제목을 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고, 제목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면, 보류하고 글을 다 쓴 후에 깊이 생각하고 제목을 붙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제목설교하면 '곽안련' 선교사를 생각한다. 강의자가 신학교 다닐 때는 곽안련 선교사가 지은 ‘설교학’을 가지고 배웠다. 그 후 도미유학에서(1970-1980년대) 설교학 분야도 공부하면서 곽 선교사의 공로도 크다고 생각하면서, 문제점을 비교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예를 들면 ①.성서 본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해서 오해할 수 있다는 것 ②.본문과는 전연 관계가 없는 방향으로 자기 설교 목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오류가 가능하다는 것 ③.성서 구절을 적당히 택해 놓고, 설교 내용은 전연 다른 것을 구사(驅使)하고 있다는 것 ④.결국 본문과는 전연 관계없는 설교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설교를 자주 읽고 듣는다.
그래서 강의자는 곽안련 선교사의 제목설교의 단점과 박근원 박사(한국신학대학 교수)의 인간상황에서 도출된 문제나 사회적 이슈(Issue) 등에서 질문된 것을 성서에서 해답을 얻는 것이 ‘상황설교’라는 개념을 인정한다. 그러나 ①.어찌하다 보면 지나치게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근접한 메시지가 기울어질 수 있는 경향성을 우려한다. ②.인간상황에서 자아낸 것이 아니더라도 성서에서 인간상황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인간의 타락·범죄·욕심·교만 등의 ‘문제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③. 제목설교란 반드시 인간상황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성서 본문에서 제목을 도출할 수 있는 여유도 있기에 강의자는 이런 위의 사유로 ‘제목설교’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4). 자, 그러면 인간상황에 대한 강의자의 착상은 만추(晩秋)때이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고, 포도(鋪道) 위에 낙엽이 우수수 질 때면 인간들은 우수(Melancholy)에 빠지기 일쑤다. 실존적인 고독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동지가 있다고 해도 나의 병, 나만이 갖는 고민·고독· 죽음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이럴 때, 강의자는 인간의 상황인 고독에 대해서 질문이 생겼다. ‘고독을 극복할 수는 없을까.’ 이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외로움’(Loneliness)이었고, 그‘외로움’에서, 철학자요 신학자인 폴. 틸릭히(Paul Tillich)의 ‘Solitude’(홀로움)의 발상이 나왔다. ‘외로움’은 대칭어로‘홀로’(막 6:46-47)에다가 ‘움’자를 붙이면 명사화되니, 그래서 ‘외로움과 홀로움’이란 제목을 생각해냈다. 이런 인간의 실존적인 만추의 계절에 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성서의 해답을 구하게 됐다.
5).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을 두루 묵상하고 성서와 참고서적을 찾아보았다. 첫째로 본문인 마가복은 1장 12-13에 예수님께서 공생애로 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써 성령께서 광야에서 홀로 고투하게 하셨다. 40주야 투쟁이었다. 그것은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키 위한 혈혈단신 필수적인 혈투였던 것이다. 이 외로움과 투쟁하여 홀로움으로 승리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께서 그 첫 번째의 ‘탭’을 끊은 것이다.
그래서 인간 실존으로 ‘홀로움으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신을 가지고, 한편의 시를 음미할 때,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 할 때, 중요한 사상(성서 말씀, 신학사상 묵상, 기타 사상)을 명상할 때,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자기 일에 전념할 때, 지금도 연구실에서 주야로 인류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결혼도 잊고 홀로 연구에 몰두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은 ‘홀로움으로 외로움’을 벗어던진 자들인 것이다.
6). 이제 위의 인간상황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얻은 것을 가지고 차례대로 기술(記述)하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이런 골격을 가지고 어떻게 본론을 논리적으로(귀납법이냐, 연역법이냐, 이후에 다루겠음), 사건 순서적으로, 낱말 선택(국어사전을 항상 책상 옆에 두고 찾아보는 습관이 필요.)과 의미 있는 문학적 표현 구사(교훈, 의미)와 예화로 잠시 쉬면서 비유로 그 의미를 더 구체화하면서 기술하면 되는 것이다.
7). ‘목표’는 성서에서(예수님께서) 어떻게 ‘외로움을 홀로움’으로 승리하셨는가를 회중에게 꼭 보여주고 우리도 홀로움으로 승리하자는 것에만 집중해야 한다. 흔히 보면, 논조가 이렇게 나가다가 잠시 중요한 낱말이나 의미 있는 성서 구절을 보고(제목과 관계없는 것) 자기도 모르게 잘 나가다가도 그만 ‘삼천포’로 빠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 점을 항상 설교 디자인 자는 예의(銳意) 주시(注視)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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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범례(範例)
“외로움과 홀로움”(Loneliness and Solitude)
[마가복음 1장 12-13절]-
1. 서론: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광야에 외롭게 나서게 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십 주야 사단의 시험을 외롭게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0년의 사생활 속에서 15년 이상은 친히 목수 일을 하시면서 육신의 부모와 동생들의 생존을 위해서 일하셨고, 이제 공생애 3년간 메시아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주동적으로 쾌히 이 세상의 명예, 물질, 권력이란 우상과 더불어 결전하기 위해 '홀로'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담 이후의 인간의 '외로움'과 대면키 위해서 혈혈단신으로 '홀로움'으로 투쟁키 위해 전투에 임했던 것입니다.
2. 본론: 예수님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실존은 더더욱 외로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외로운 존재입니다. 밤하늘의 각 별들은 끝없는 공간의 흑암을 통해서 외롭게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나무들도 저마다의 규칙대로 외롭게 자라고 있습니다. 동물들은 살면서, 싸우면서 그들 스스로의 육체의 병이 들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존재는 다 육체 안에서 존재합니다. 그 육체는 다른 육체로부터 떨어진 외로운 존재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외로운 존재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피조물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뿐만 아니라, 외롭다는 것을 알고 느끼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왜 고독한 존재이며, 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없느냐고 질문을 해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외로운 존재로 그대로 서 있을 뿐입니다. 어디로 도망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며, 그런 고독한 존재인 것을 다만 지적, 정적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비록 하나님이라도 인간으로부터 그런 '외로움'의 운명을 멀리 쫓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사람의 독처(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육체로부터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육체로부터 서로 다른 육체인 것을 인식할지라도, 각자는 '외로움'으로 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남녀인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비록 서로를 동경하고 사모하면서도, 그들은 서로가 다른 존재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후에, 각자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것은 이브인 여자는 해산의 고통과 남편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남자인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며,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라고(죽음) 했습니다(창 3:16~24).
그리고 그들이 벗었으므로 부끄러움을 처음으로 알게 되어,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했습니다. 비록 그들은 부부가 되었으나 고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실존적으로 고독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질문들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인류의 시조를 이보다 더 좋게 만들 수는 없었던가요. 하나님! 인간의 고독, 즉 아담과 이브의 부부간의 성적(性的)인 만남 속에서 잠시 조금 그 외로움을 제거하는 것뿐이 아닙니까. 사랑의 그 순간과 교제의 시간은 단지 얼마뿐이 아닙니까."
사랑의 황홀경은 남편인 아담과 부인인 이브 자신들이 서로 결합한 가운데서, 자신들 서로를 흡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이 경지는 분리가 해소(극복)된 것입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의 이후엔 이전보다도 서로간의 고립(孤立)이 더 깊게 골이 파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서로 간에 너무 많은 자신을 서로에게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을 막기 위한 아담과 이브의 갈망의 표현은 수치스러운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만약 아담과 이브의 친밀한 자신을 비밀이 없이 개방하게 되었으니, 서로가 수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즉, 이것은 비밀을 홀로 간직하겠다는 뜻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아담과 이브 부부는 의식적, 양심적으로 돌아온 후에는 그들 스스로가 벌거벗은 수치를 덮으려고 했습니다. 가장 친밀한 결합 속에서도 결국엔 남자와 여자로 서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것이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서로를 돕지 않는 자로 머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류 공동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외롭지 않기 때문에 서로 도울 필요성도, 더불어 살 이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외로움'에서부터 해방시키지 않은 이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인 것입니다. 인간이 그 자신의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한편엔, 인간의 위대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계를 응시할 수 있고, 또한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리되어졌기에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땅을 정복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신 것은 세계와 분리된 자로, 인간 자신이 고독한 존재로 남겨 두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고, 인간끼리 더불어 대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질문할 수 있고, 그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있게 되고, 스스로 결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악(善惡)에 대해서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잘 알 수 없는 그 자신의 중심 속에 갇혀있는 둔한 인간이기에 자유로운 존재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 그 자신이 오직 '외로움'의 존재이기에 타자를 필요(必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위대성이요, 이것이 또한 인간의 무거운 짐입니다. 외로운 인간끼리 양편에 서로 대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言語)에 대한 지혜가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외롭게 존재하고 있다는 그 고통을 하소연하기 위해서 외로움의 말과 그 상황에 대한 언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홀로 존재하고 있다는 그 영광을 주장하기 위해서 홀로움의 말들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시편 25:16에 있는 것을 읽어보면,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합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고독의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고독이 어떤 성격의 고독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고독의 많은 단면(斷面)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고독의 단면 중에 우리는 많은 고독을 경험해왔습니다. 광범위하게 펼쳐진 고독은 죽음과의 분리와 외롭게 던져둔 우리 자신들을 돕지 않고 '너'라는 '당신'이 망각한 데서 오는 '외로움'입니다.
우리는 또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고, 사회활동을 하고, 영적으로 의사소통도 하고, 단체 활동을 하는 소위 군중으로부터 외로움을 느끼는 고독의 아픔도 있습니다. 이러한 고독은 깊은 불행과 우울감이 지속적으로나 영구적인 상태일 때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 사람의 귀가 사랑에 의해서 열려진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그런 고독입니다. 우리 주변의 친구들, 이웃들, 동역자들, 시민들, 가족 공동체, 그리고 성적으로 교제하는 부부, 이들이 우리 각자(self) 고독의 아픔을 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인간의 이 외로움을 많은 군중이 모여 들게 해서 그 고적함을 덮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이 외로움은 많은 사람들이 내 자신 옆에 있다고 해서 그 '외로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自我)는 외적인 곤궁과 내면적인 아픔이 하나로 뭉쳐진 존재입니다. 이런 것이 정신과 의사나 어떤 상담자로부터 자아의 외로움이 최소화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하게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군중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고독의 경험으로서 무서워 떨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자신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있어도 자신만은 단독자(單獨者)로서,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인간 실존입니다. 제가 말하는 고독은 도피할 수도 없는 고독이요, 어떤 것으로도 덮을 수 없는 고독입니다. 즉 죽음에 대한 고독과 죄에 대한 고독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우리들의 실존에 대해서 저항할 수도, 멀리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죄로부터 멀리 도망갈 수도 없고, 누구도 그것을 덮을 수도 없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무엇보담도 참된 고독은 인간이 홀로 고독히 모두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고독입니다. 이것은 죽는 순간은 전 우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요, 우주 속에 있는 모든 물건으로부터 절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이런 고독 앞에 마주 설 자가 있겠습니까. 외로움(고독)은 오직 홀로움이 배태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정복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아담이 에덴을 추방되는 시점과 더불어 던져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외로움이 피동적이라면, 홀로움은 둘째 아담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공생애 전에, 광야 40주야 동안에 홀로 땅과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주변의 맹수들이 우는소리를 소리를 들으면서, 그 자신은 신적(神的)인 전투마당에서 사단과 투쟁하여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 46~47절에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에는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군중과 제자들, 그리고 유대 교권자들과 헤롯왕의 박해도 피하고, 무분별한 군중의 환영에도 피하셔서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움을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홀로 해결하고 대처하기 위해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공생애 마지막을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홀로 피 땀흘려가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부터도 외면당한 채, 홀로움 속에서 인류의 죄와 투쟁해서 승리하시고, 부활 후에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홀로움은 적극적요, 주동적이요, 스스로 적막함에로 돌입함으로써 외로움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예수께서 아담의 원죄와 인간의 더러운 죄를 속량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의 영원한 적(敵)인 죽음과 투쟁해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외로움을 홀로움으로 치열한 영혼의 투쟁의 마당에서, 아니 하나님이 주신 전쟁터에서 인간의 '죄와 죽음' 및 '외로움'을 정복하신 그 첫 번째 승리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보면, 아직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순례자의 인생길이기에, 단독자인 인간 실존의 길이기에, 외로움과 싸워야 합니다.
이 초동(初冬)의 계절에 나무 잎이 포도 위에 뒹굴면 소름 돋는 외로움이 마음과 온몸에 엄습해 옵니다. 우리도 외로움을 도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면으로 외로움과 대결하여 싸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싸워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위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홀로움으로 외로움을 제압해야 합니다. 사실은 자연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말 없는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홀로움으로 떡 버티고 있습니다. 자연은 봄바람 가을비에도 그 여름날 폭풍우와 벼락 속에도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다만, 소리 없는 말이 온 땅에 통하고, 그 침묵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 길고 긴 장마와 폭풍우 속에도 산사태가 나고 길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죽어지는 그 때도, 이젠 찬이슬이 내리는 허전한 이 계절에도, 그리고 눈보라 치는 엄동설한에도 자연은 말없이 단지 홀로움으로 그 외로움을 극복하는 듯합니다. 외로움을 정복하기 위한 인간의 홀로움의 길은 다방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단 몇 줄 안 되는 시를 음미할 때, 지그시 눈을 감고 음악을 들을 때, 한 폭의 그림을 응시하면서 감상할 때, 중요한 사상을 묵상할 때, 우리는 외로움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홀로움이 이렇게 우리를 위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홀로움은 마치 우리 인간을 고립하지 못하도록 갑옷과 같이 외로움을 막아줍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 외로움과 공허성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이고 실존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연 속에 묻히어 자연을 한 폭의 그림으로, 뭇 새들 노래 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면서, 자연 속에서 인생을 관조(觀照)하면서, 살자는 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다음의 W. Wordsworth의 시 '인적 멀리 떨어져 산 그녀'를 감상해 봅시다. 이것은 현재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적 멀리 떨어진 '더브'의 물가에
아름다운 Lucy는 살고 있었다.
칭찬해 주는 사람 아무도 없었고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는 아가씨였다.
이끼 낀 바위틈에 반쯤은 숨은
한 떨기 소박한 오랑캐꽃이랄까!
아니면, 어두운 밤 서녘 하늘에
다만 홀로 반짝이는 별이라 할까.
아는 이 전혀 없이 혼자 살다가
아는 이 전혀 없이 홀로 죽었다.
이제는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그녀
아, 나만은 슬픔 안고 그녀를 안다!
창조주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나 자연을 동등하게 만드셨습니다. 서구문명이 근대시대에 자연을 정복하여 인간이기(利器)의 문명을 많이 재창조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꽤 문화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자연은 에너지 및 아름다운 환경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녹색운동'이 생겼고, 인간도 도시빌딩의 '정글' 속에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다가 이젠 공기가 탁하다, 인공가미 식물은 건강에 해롭다 하여 순수한 자연산을 좋아하고, 신선한 산소를 마시기 위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추세입니다.
인간은 또한 현대문명의 파생으로 더 고독하다고 합니다. 대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고, 실존신학자 및 실존철학자들은 원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독한 존재라고 하면서(Loneliness), 차라리 이럴 바엔 내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고독을 사랑해서 고독을 즐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Solitude). 이것이 확실한 사실일진데, 우리는 부단히 홀로움으로 그 외로움을 싸워 나가야 합니다. 사실이지 이 땅위의 정의니, 창조성이니 하는 것도 인간의 홀로움을 지불하고 투쟁한 소산이라고 하겠습니다.
정의는 정의에 목마른 사람들이 외쳐서 얻은 대가입니다. 거기에는 피와 땀과 어떤 경우에는 죽음도 엄습해 옵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외친 고(故) 전태일 군의 '홀로움'이 지금의 노동자의 권익을 낳게 했습니다. 지금도 밤잠을 설쳐가면서 연구실에서 많은 학자와 전문인들이 홀로움으로 인류국가의 번영을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한편의 설교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매일 교회 목양실, 나의 서재에서 오전 10시쯤 나와서, 점심은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하루 8시간 외로움을 홀로움의 방패삼아 약 3일간 정신없는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적어도 이런 순간들 속에는 외로움을 모르고 즐거움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나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 결론: 마지막으로 홀로움으로 가는 길은 우리도 주님처럼 홀로움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신인(神人)이 상봉하는 대화의 사간이라기보다는, 내가 나의 실존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거짓된 나에서 본래적인 나에게로 환원하는 것이 기도의 시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고, 자꾸 무엇을 배달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반사되는 밝은 광채에서 나의 흉물스런 참된 모습을 보고, 나를 변화시키는 시간이라고 봄이 더욱 정확한 정의(定義)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를 변화시켜 날마다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실존을 다 아시고,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홀로움을 사랑하고 홀로움으로 외로움을 제압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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