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22. 대중가요에 대한 신학적 명상​

solomong 2024. 11. 22. 13:47

 

22. 대중가요에 대한 신학적 명상

옛날 필자가 신학생 시절에 신학교 기숙사 內에서는 라디오를 통한 大衆歌謠(流行歌)를 트는 것이 금지 되었다. 유행을 거슬러서 살아야 할 신학생들이 경건치 못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교회 Recreation 시간에 대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그렇게 탐탐한 노래로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사실 필자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대중가요 노래를 가끔 올려 보지만, 방문자 중의 기독자를 생각할 때, 뒷맛이 그렇게 개운한 느낌이 아닐 때가 많았다. 그래서 오늘 首題之件에 대해서 時論 이라 할까, 隨筆이라고 할까 두리 뭉실하게 써 본다.

마침 '가요계의 큰 별'인 작곡가 박춘석씨가 지난 3월 14일 오전 자택에서 향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런 즈음에, 이런 글을 써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福音을 대중에게 전해야 할 기독교가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간단히 외면해 버리는 것이 과연 현명한 태도일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일직이 장로회신학대학 교수였던 김이태 박사가(장래가 촉망되던 김 목사가 일직이 소천 했음.) ‘대중가요에 비쳐진 종교심’에 대해서 論文을 발표한 바가 있었다.

오래 전에 읽은 것이라 다 생생하게 기억할 수는 없다. 김 박사의 논지에 준하고, 필자의 명상을 첨가해서, 여기를 방문하는 방문자들에게 다소나마 참고가 되는 것을 적어 볼가 한다. 대중가요 그 자체는 神學(聖書)과는 無關할지 모르나, 대중가요가 지배하는 대중에게는 신학(성서)은 무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학자 폴. 틸릭히(P.Tillich) 이론대로, 인간 실존상황을 질문하면, 신학(성서)은 그 해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 박사가 대중가요 가사 내용을(약 400곡) 분석한 결과, 약 70%가 ‘임(님)과 고향’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가사태마의 공통점들은 ①. “한 때 나는 그 누구를 진정 사랑했노라. 그 때는 참으로 행복했다. ②. 그러나 지금 나는 그이와 떠나있는 신세가 되었다. ③. 그래도 나는 결코 옛 사랑, 그이를 잊을 수가 없다. ④. 아아! 그립다. 보고 싶다. 그이는 지금 어디 계실까. 다시 만날 수는 없을까.”이다.

‘故鄕’에 대한 것도 그 내용 구조는 ‘임’의 가사테마와 비슷하다. 그런데 대중가요의 특성 중에는 문자 그대로 대중의 노래이다. 클래식은 작사자, 특히 작곡자, 작곡의 동기 및 곡의 흐름 등등의 것을 이해해야만 바로 감상할 수가 있지만, 대중가요는 작사자나 작곡자가 누구인지 별 문제 삼지 않는다. 정서 감정에 흠뻑 빠질 수만 있다면 노래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연령별로 유치원생부터 회갑이 넘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애창된다.

지식별로는 가정 도우미에서 중고학생, 대학생 이상에 이르기까지이며, 직업별로는 택시, 버스 운전기사, 이발사, 술좌석에 앉아 젖 가락을 두드리며 부르는 會社社長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대중가요가 각계각층에서 애창되고 있는가. 어째서 첫 사랑의 경험도 없고, 이별의 슬픔도 몸소 체험해 보지 않는 소년. 소녀들이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하면서 노래를 부르는가.

심리학자 C. Jung의 理論을 빌린다면, ‘인간의 개인적 경험에 앞서서, 그 보다 깊은 集團 無意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임’(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원초적 영상(Primordial Image)이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요에 나타나는 ‘임’을 그저 단순히 현실적 ‘임’이라고 생각하나, 심리학자 ‘융’은 그것을 극히 皮相的인 관찰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대중가요를 부르며 흐느끼는 것은 단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그 어느 특정한 인물에 대한 戀慕에서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인간 존재 깊이에서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의 本性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원초적 영상’으로서의 영원한 ‘임’에 대한 흐느낌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문학작품의 주제가 ‘사랑’이요, ‘임’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것이 영원불변하는 ‘임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대중가요에 나타난 ‘임’도 그런 것이다.

대중이 노래하는 대상은 가사의 액면 그대로 하룻밤 따뜻한 情을 주고 떠나간 그 어느 부질없는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인즉 참으로 자기가 영원히 자기의 전존재를 받쳐서 사랑하고 싶고, 또 그렇게 사랑받고 싶은 그 어느 이상적인 未知의 ‘임’에 대한 갈망의 부르짖음인 것이다. 이제 필자는 신약성서 요한복음 4장 5절에서 42절까지의 사마리아 수가 城 우물가의 여인의 기사를 한번 깊이 명상 해 본다. 그녀는 남편 5명이나 거쳐서 결혼했던 여인이요, 현재 6번째 남편이라고 하는 자와 살고 있지만, 정말로 참 그녀의 남편은 아니었다.

필자는 그녀의 흐느낌 속에서 볼 때, 어쩌면 그녀는 7번째 ‘임’을 기다리며 초췌한 모습을 그려 본다. 그녀는 벌써 사실적으로 情을 주고 간 사람이 5명이나 있었다. 그녀는 매번 새로운 ‘임’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그 ‘임’만은 영원히 사랑하고, 그 ‘임’도 자기만을 영원히 사랑해 주기를 열망했었다. 그러나 그 ‘임’이라는 사람들은 차례차례로 이 여인에게 아픈 상처만을 남겨 준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속고 또 속으면서도 그래도 마음에 그리는 理想的인 7번 째 ‘임’을 그날도 기다리며 ,외로이 우물가에 서 있었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대중가요 노래에 담은 한숨은, 바로 이 ‘수가’ 성 그녀의 한숨이요, 대중가요에서 울며 부르짖는 그 그리움은 바로 이 여인의 그리움이요, 대중가요에서 그처럼 애꿎게 기다리는 ‘임’은 바로 이 여인이 기다리던 그 7번째의 ‘임’인 것이다. 김자림 작사, ‘남자가 혼자 있을 때’의 가사를 보면, “혼자 있게 마세요. 남자란 혼자는 못살아 외로워 외로워서 못살아, 달랠 길 없어 방황하는 남자의 마음은 뜬 구름의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남자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혼자는 외로워서 못사는 동물이다. 인간은 원래가 ‘임’을 만나 서로가 사랑하며, 살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만나야 할 그 ‘임’을 만나지 못하는 인간은 항상 외로운 것이다. 이 외로움은 한숨이 되어, 슬픈 노래가 되어 흘러나오게 된다. 이것을 聖書的으로 말한다면, 일직이 인간은 모두 ‘아담’(Adam) 안에서 한 때, '에덴'(Eden) 동산에서 ‘임’과 함께 다정하게 지내었다.

그 때 '에덴'은 한 없이 아름다웠고, 그 때 '아담'은 전혀 슬픔과 괴로움도 없이 지내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한 후에, 그는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사랑하던 그 ‘임’과는 고별해야만 했다. 그 후 '아담'의 後裔들은 모두 '아담'과 함께 그 사랑하던 ‘임’, 하나밖에 없는 ‘임’, 그 ‘임’을 잃어버렸다. 이 ‘임’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오늘도 ‘他鄕’의 이 해 저문 듯한 歷史의 街道 위에 서서, 애타게 ‘그 옛날님’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인간은 스스로의 과오를 뉘우치며, 한탄해야 할 실존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신중현 작사, ‘임은 먼 곳에’의 가사를 보면,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임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임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임은 먼 곳에!”라고 했다.

'에덴'에서 헤어졌던 그 ‘임’을 만나기까지는 어떠한 代用品 ‘임’도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대용품 ‘임’은 오히려 인간의 서러움, 인간의 ‘그 옛날님’에 대한 그리움을 더해 줄 뿐이다. ‘그 옛날의 그 故鄕’을 되찾기까지는 어떠한 곳도 그곳은 인간에게는 他鄕일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임’을, ‘고향’을 그리워 흐느끼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사는 현대인들도 역시 7번째 ‘임’을 기다리는 群像들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 때는 ‘미신의 임’을, '물질의 임'을, ‘명예의 임’을, ‘권력의 임’을, ‘오락의 임’을, ‘쾌락의 임’을, 그리며, 갈급히 찾아 헤매고 있지만, 갈증은 더욱 심한 것이 ‘현대의 임’인 것이다. 그러나 떠나서 멀리 보이지 않는 듯하나, 사실은 결코 떠나지 않고, 바로 곁에 와 계셔 주시는 ‘임’, 인간은 늘 변해도, 실은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임’, 둘도 아닌 하나밖에 없는 ‘임’, ‘하나인 임’, 필자는 그 ‘임’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St. Augustine의 참회록에서, “내가 하나님께 돌아오기까지 진정 내 마음에 만족이 없었나이다.”라고 고백했다. 필자의 희망은 이 우수와 고독에 몸부림치는 이 질곡의 세상에서 그 영원한 ‘임과 고향’ 그리면서 우리들 역시 St. Augustine의 고백이 오늘의 우리들의 고백이기를 바란다. 동시에 기독신자들이 대중가요를 대할 때, 이런 신학적, 성서적 영원한 ‘임과 고향’에 대한 인간의 思慕의 情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독신자가 대중가요 노래를 불러도, 그리 어색하지 않는 것이라고 명상해 본다. 끝.

2 010. 3. 15.(2013. 7. 12. 재편집)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