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조선의 쇠락과 한민족의 개화
1. 실학과 서학: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1783년 조선의 남인계 실학자들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에서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서학 즉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과 형제들인 정약전, 정약종,그리고 이벽, 이승훈, 권신일 등의 사대부들이었다. 그중 이승훈은 1784년 청나라 서장관으로 가는 부친 이동욱을 따라 북경에 가서 남(南) 천주교당을 방문하였다.
이승훈은 자청하여 그곳의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음으로 조선 내부의 첫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귀국한 이승훈은 함께 서학을 연구한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승훈의 세례명은 베드로였고 정약용은 요한이었다. 이로써 조선에 최초의 자발적 천주교 공동체가 출현하게 되었다. 조선 천주교의 특징은 바로 그 출발이 외국 선교사가 아닌 내국인의 자원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한양의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 매주 제3일과 7일에 미사를 드렸다. 그러나 얼마후 모임은 발각되었고 서학을 금한 당시 정국 때문에 참석자 모두 하옥되었다. 모임을 폐하기로 서약하고 방면되었지만 집주인 김범우는 중인 신분이어서 풀려나지 못했다. 그는 충청도 단양으로 귀양 보내져 곤장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첫 순교자가 된 김범우의 집터에는 훗날 한국 가톨릭의 대표 건물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한편 김범우의 집에서 정약용의 외사촌인 윤지충도 세례를 받았다. 윤지충은 20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 벼슬을 받은 뛰어난 인재였다. 그러나 고향 전라도 진산에 낙향하여 지내다가 어머니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폐한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당시 그는 서학의 신앙에 근거해 제사 의식이 내포한 조상신의 개념을 부정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또한 목숨을 잃게 될 것을 알면서도 윤지충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사술에 빠진 죄목으로 전주시 동문에서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개혁적이었던 정조 임금 아래서 천주학은 점진적으로 성장하였다. 1800년 그가 급사하자 이어서 영조의 계비 정순 황후가 어린 순조를 두고 섭정을 하였다. 간교했던 그녀는 서헉에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당시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조선의 천재 황사영은 조선의 험난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정황을 조그마한 흰 비단에 13,300여 자로 기록하여 백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청나라로 비밀리에 보내려다 발각되어 그는 역도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사실 황사영은 벼슬길이 보장된 젊은이였으나 급제한 특권을 포기하고 조선을 다니며 선교하였다.
이 백서 사건으로 그는 멸문지화를 당하고 부인 정난정은 관노가 되어 제주도로 보내졌다. 처삼촌 정약용과 정약전도 이 사건의 여파로 유배에 처해졌다. 약용과 약전 형제는 전라도 영암까지 한데 묶여 내려갔으나 그곳에서 각자의 귀양지 강진과 신안으로 갈라지게 되어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다. 바로 그 마지막 밤에 정약용은 눈물을 흘리며 시를 읊었다.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두 눈만 말똥 둘다 할 말 잃어./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흑산도는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정약전은 흑산도에 보내졌으나 절망스런 환경에서 오히려 바다의 행동하는 물고기를 보았고 조선 최초의 어류 연구서인 <자산어보>를 저술하였다. 동생 정약용은 산세가 수려한 "남도의 1번지"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 하며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포함한 2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위대한 형제는 실학의 대가들답게 인간 세계에 실제적 효용성을 갖는 학문을 완성했고 극단의 고난에서도 좌절 않는 신앙과 도전을 보여주었다.
다산은 유배 중 몸에 작은 쇠사슬을 매고 다니는 고행을 했고, 수시로 금식하고 묵상에 전념했다. 하인이나 상민을 대하여도 자상하게 존대하여 인품으로도 최고의 인물이었다.1800년대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도들은 증가하였고 이에 비례하여 조정의 박해도 혹독해졌다. 조선의 기독교는 국가나 왕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제사 반대와 사회적인 평등 사상으로 "임금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사교"로 오해되었다.
그러나 이벽이 작사한 아래의 '천주공경가'는 기독교 실학자들의 사상을 잘 나타낸다. "어와 세상 벗님네야 이네 말 좀 들어보소./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네 몸에는 영혼 있고 하늘에는 천주 있네./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세,/삼강오륜 지켜가고 천주 공경 으뜸일세./이네 몸은 죽어져도 영혼 남아 무궁하리."
당시 전래된 서학은 동양의 문화를 모두 배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양의 윤리와 잘 어울린 세게관을 강조했다. 그러나 만민 평등과 내세 강조의 근본적인 기독교 메시지는 신분 제도와 체제 안정을 강조하는 유교의 조선에서 박해를 면할 수 없었다. 조정은 순조 때부터 '천주교도 박멸'을 내세웠고 쇄국 정책을 고수한 흥선 대원군의 심정에 이르기까지 천주교도들은 박해로 순교하거나 모진 고초를 겪었다.
2. 구한말의 정황과 기독교
1866년은 대원군 집권 3년째로 천주교의 병인박해가 한창일 때였다. 이 해에 영국 웨일즈 클라노바 출신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Ceneral Sherman)호를 타고 중국에서 출발하여 평양에 왔다. 그러나 평양성의 군병들은 방자히 행동한 셔먼호 선원들과 전투를벌렸고 이에 토마스는 체포되어 효수되었다. 그의 목을친조선 무관 박춘권은 훗날 신자가 되었다.
개신교의 본격적인 접촉은 1884년 9월 내한한 미국 의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해 12월 개화파가 수구파를 밀어내고 사흘 동안 정권을 잡은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은 청나라와의 충돌을 우려해 개화파를 배신하였고 수구파는 청의 군대를 동원하여 '3일 천하'를 누렸던 개화파를 진압하였다.
수구파 대표자 민병익은 개화파의 칼을 맞아 중태에 빠졌으나 주한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하던 의사 선교사 알렌이 치료하여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구했다. 이후 고종 임금은 알렌에게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해원을 열도록 허락하였다. 이는 제중원으로 개명되었다가 미국 기업가 루이스 세브란스(L. H. Severance)의 기부로 신축되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했다.
이로써 한민족에 대한 기독교의 본격적인 포교가 시작되었다. 살아난 민병익은 후에 알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백성들은 당신을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하오. 당신은 아메리카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갔소." 1885년 4월에는 장로 교회의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와 감리 교회의 아펜젤라(Henry Appenzeller) 선교사가 입국하여 기독교 전파가 본격화 되었다.
서양 선교사들은 신앙과 교육을 통해 서재필, 안창호, 감규식, 이상재, 이승만, 이승훈, 김정식, 이동녕, 이준 등의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하였고 한국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3. 윤치호의 꿈과 "샤론의 꽃"
충남 아산 출생으로 구한말 정치가요 계몽운동가 윤치호(1865~1945)는 1881년 신사유람단을 수행하여 일본에서 2년간 채류하였다. 이때 그는 한민족 최초로 영어를 배웠다. 귀국 후 초대 주한 미국 공사로 푸트의 통역으로 일했으며 부친이 갑신정변에 연루되자 중국 상해로 피신하였다. 윤치호는 그곳의 선교 학교인 중서서원에서 수학하였고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888년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밴더빌트 대학과 이모리 대학(Emory University)에서 공부하였다. 5년간의 수학 끝에 마침내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여 윤치호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의 졸업자가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미국에서 저축한 거금 200불을 한국 선교를 위해 에모리 대학의 총장 위렌 캔들러(Warren Candler) 박사에게 기부 전달했다.
당시 위렌 총장은 코카콜라 회사의 설립자인 아사 캔들러 회장의 동생이었다. 이 가문도 한국 선교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유학 기간 동안 윤치호는 민주주의와 과학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고 미몽의 조선 사회를 깨우는데 있어 교육과 선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귀국 후에는 서재필, 이상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국민 계몽 운동에 함썼다. 서론에 관직에 올라 천안의 군수로 근무한 후 외부협판까지 관직에 올랐다. 또 사회 개화를 위해 신분 첼패, 참정권 보장 등을 주장하였고 현대식 교육을 위해 안창호의 평양 대성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윤치호 본인이 직접 송도고등학교의 전신인 한영서원을 설립하여 가르쳤다.
특히 그는 미국의 유명한 농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에게 영향을 받아 실업 교육을 강조했다. 신앙인으로서 윤치호는 정동제일교회 장로로 또 세계 주일 학교 한국 지회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미국 선교사들에게 다방면 협력했으나 종종 민족주의적인 사고로써 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왜 마음을 열지 않느냐고 불평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교사 자신들이 먼저 자택 거실에서 한국인을 대접하지 않는 태도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윤치호 일기 1897년 6월 31일)
윤치호는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모국 조선도 거침없이 질타하였다. 그는 "저주받을 일본 놈들"이라고 일기에 썼고", "거만하고 무식한 러시아"라고 평하였다. 또 조선 민족도 자립 의식이 결핍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구한말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윤치호는 결국 현실주의자의 길을 택해 친일로 비판받기도하나 사실 아래와 같이 다면적 관점을 가진 인물이었다.
"땅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일본인 손에 땅이 넘어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 애국이다."라고 했다. 윤치호는 천대받던 장님 점쟁이 백사겸을 구도의 길로 이끌며 신분을 뛰어넘는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 또 1907년 나라 사랑의 노래 즉 '애국가'를 작사하여 '무궁화(Rose of Sharon)' , 즉 신앙적인 "샤론의 꽃"이 삼천리에 피기를 소망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윤치호는 데라우치 총독 살해 모의 사건으로 4년간 무고한 옥살이를 하였다. 분명 그가 추구했던 새로운 교육, 새로운 정부, 새로운 신앙의 꿈은 당시 시대상에서는 선구적인 것이었다.
4. "대한민국 건국 훈장의 외국인" 호머 헐버트
1883년 미국에 다녀온 보빙사의 인솔자 민영익은 서양식 교육기관 설립을 주장하였고 고종 임금은 미국 정부에 친서를 보내 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미국 국무부 교육 국장 이튼(J. Eaton)은 다트머스 대학 동창이며 미들베리 대학(Middlebury College) 학장이던 헐버트 목사에게 한국에 보낼 교사 선발을 부탁하였다.
이에 헐버트 목사는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재학하던 자신의 아들 호머 헐버트(Homer R. Hulbert, 1863~1949)를 포함하여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한 길모어(Gilmore), 그리고 오벌린대학에서 공부한 벙커(Bunker)등 세명을 추천하였다. 세 미국인은 교사로 내한하여 1886년 사대부 자제들을 교육하려고 조정이 세운 육영교원을 맡았다.
이들은 역사, 영어, 수학, 과학, 지리 등을 가르치며 최초의 현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육영공원은 운영의 어려움으로 곧 문을 닫았고 교사 헐버트는 미국에 갔다가 정식 선교사로서 다시 한국에 되돌아왔다. 헐버트는 이승만과 이상재 등 민족 지도자들을 가르쳤고 이준 열사를 도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 평화 회의에도 따라갔다. 이들은 함께 일본의 만행을 서구에 널리 알리고자 힘썼다.
이 일로 인해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된 호머 헐버트는 상해에서 목회를 하며 임시 정부를 도왔고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한국을 소개하고 일제를 비판하는데 힘썼다. 또한 그는 한국의 역사를 영어책으로 펴냈고 최초로 한국의 전래 동화를 서양에 소개하였다. 그는 한국 문화를 외국에 홍보하고 늘 존중한 외국인이었다.
헐버트 박사는 한국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큰 공로를 세웠기에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해에 박사는 한국 도착 수주 후 여독으로 세상을 떠났고 양화진에 묻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비석을 세웠고 후에 김대중 대통령은 헐버트의 마지막 어록을 비문에 친필로 썼다. 그것은 헐버트 박사가 미국에서 출발하기 직전 주위에 전한 아래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5. "최초의 은인과 최대의 은인"
한편 언더우드 선교사와 홍삼 장사 출신 서상륜은 한국의 장로교회를, 아펜젤라는 감리교회를, 펜윅(M. Fenwick)은 침례교회를, 카우만(C. Cowman)과 양반 출신 김상준은 성결교회를, 매리 램지(M. Ramsey)는 순복음교회를 세웠다. 구세군과 성굥회도 구한말에 점진적으로 확산되었다. 나라가 쇠망하자 조선 민중들은 새로운 신앙에 소망을 두었고 서구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졌다.
무엇보다 조선 전역에 점차 전파된 기독교는 구한말 사회를 개혁하였다. 한글 성경을 일반 대중에게 배포하여 수백 년 동안 천대받아온 한글의 위상을 고양시켰고, 문맹을 깨치는 데도 크게 기여 하였다. 신분을 타파하고 미신을 청산하였으며 농촌 계몽 운동과 사회사업을 시작하였다.병원들과 수백여 진료소들을 세워 병자들을 치료하였다.
최초의 결핵요양원이 '해주'에 세워졌고 버림받은 수만 명의 나병(한센씨 병)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요양원들이 세워졌다. 부산 상애원과 대구 애락원, 그리고 여수 애양원 등이다. 미국의 워싱턴 의과대학(Medical School of Washington)을 졸업한 로버트 윌슨(Robert M. Wilson)은 1905년부터 43년간 한국에서 헌신하였는데, 특히 애양원에서 나병 환자들을 일생 동안 돌보았다.
또 글래스고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10년 내한한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Mackenzie)도 일제의 의해 추방되기까지 나병 환자들을 위해 38년간을 사역했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유수의 의과 대학을 졸업한 의사들이 한국 선교에 자원하여 열성적으로 봉사하였고 수많은 국민들을 치료한 것은 물론 의학 지식을 전수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광혜원 의사 호레이스 알렌, 제주원 의사로 섬기다 조선에서 처음 사망한 서교사 존 헤론, 세브란스 병원장 올리버 에비슨, 민중 치료소를 세운 윌리엄 스크랜턴,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를 양육한 로제타 셔우드 홀, 간호 학교와 간호사 협회를 시작한 엘리자베스 쉐핑 등 구한말 한민족을 위해 일한 이들의 공적은 필설의 평가를 넘어선다.
개화기 기독교들은 독립운동에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16명의 인사도 또 독립운동으로 체포된 자들 중 1/3도, 그리고 상해 임시 정부의 주역들도 기독교인들이었다. 당시 총 인구의 2%에 불과하던 기독교의 교세를 고려하면 이런 다양한 활동들은 큰 위협이었다.
3.1 만세운동을 기획했던 손정도(1882~1931) 목사는 중국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3일 임시 정부 출범을 주도했다. 그는 의정원(국회) 임시 의장을 맡아 신석우와 함께 국호 "대한민국"을 정하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아펜젤러의 배재 학당에서 공부한 이승만(1975~1965)은 서재필을 도와 독립협회에서 일했다. 그러나 1899년 고종 폐위 음모의 무고한 죄목으로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승만은 옥사에서 성경을 읽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희망을 찾으며 변화되었고 함께 수감된 월남 이상재와 40여 명의 죄수들을 전도하였다. 6년의 옥살이 끝에 사면으로 풀려난 이승만은 1905년 미국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대학에서 한국인 첫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와이에서 거주하며 한인기독교회와 한국 학교를 설립히여 민족 독립운동에 힘썼다.
기독교는 구한말 신식 교육을 처음 시작하였다. 1885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 학당을 세웠고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 학당을, 언더우드 선교사는 구세 학당과 연희전문학교(후일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심지어 동대문의 백정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친 새뮤얼 무어(Samuel Moore)의 사랑도 있었다.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 수많은 교육 기관이 선교사들과 기독교도들에 의해 세워졌다. 1909년 통계로 팔도에 존재한 총 1500여 개의 학교 중 950여 곳이 기독교계의 학교였다. 이들 학교들은 영어, 수학, 지리, 천문, 과학, 성경을 가르치며 근현대 한국을 이끌어간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고 한국 사회 발전의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반상의 차별을 거부하고 평등의 가치를 고취시켰고 서구의 신학문을 접하는 주된 통로로도 가능했다. 현대 한국의 기독교는 배타주의, 물질주의,개인주의, 분열주의 등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상기한 모든 공로들 때문에 춘원 이광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 지적과 더불어 이렇게 평가했다.
"야소교(예수교)는 실로 암흑하던 조선에 신문명의 서광을 전하여 준 최초의 은인이며 겸하여 최대의 은인이다."(1917년 7월 "청춘지" 제11호) 끝.
2024년 11월 27일
山下연구소: 양 견 목사 ('기독교로 보는 세계역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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