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25. 강해설교는 어떻게 할까?

solomong 2024. 11. 30. 11:55
 

25. 강해설교는 어떻게 할까?

-성서는 질문하지 않으면 대답이 없다.(11)-

 

“강해설교란 주어진 성서 본문을 문자적·역사적 배경에 의해 일정한 조직 하에 현대의 청중에게 적용하는 설교”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강해설교에 대해서 비교적 목회자들이 자주 하는 설교 형식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 강의의 뒷부분에 가서 꼭 알아두어야 할 것만 이야기하기로 하고, 목회자나 강해설교자에게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한다.

 

(1). 성서를 읽는 마음의 자세: 강해설교 준비는 우선 성서를 펴고 본문의 말씀을 읽는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읽고 생각하며 이해하는지, 회중에게 전할 자신들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 나(自我), 강해설교 준비자는 지금 하나님 말씀 앞에 있는 나로서 ‘하나님 앞에 존재하고 있는 나’다. 즉 나의 실존을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이란 ‘공간적’ 개념이기보다 ‘관계적’ 개념에 실존한다.

 

강해설교를 준비해야 주일 밤 예배를 인도할 수 있고, 3일기도회를 진행할 수 있고, 그래야 목회자이고 내 가족과 내가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상투적이며 일상적·습관적 마음의 자세가 아니라, 언제나 나는(성직자) 이미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자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이 불러서 나를 택하고 이 일을 맡기신 섭리적(숙명적 관계)관계에 들어선 자인 것을 다시 한 번 자각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면서 그간 목회하는 중 고뇌도 고통도 억울한 일도 무시당한 일도 섭섭한 일도 많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옵고는 위로를 받을 수도, 이해 해줄 자도 없는 이 삭막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관계에서 연약하고 부족한 나 자신을 생각할 때, 진실로 나의 생명이시요. 내 영혼의 안식처이요. 나의 힘이신 것을 고백하며 성서를 읽을 때 “지금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경청하겠나이다.” 하는 심정으로 성서를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하나님이여 주는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고 말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목이 타도록 말씀을 사모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올바른 신앙과 사명을 가질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이 시편 기자는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신앙이 조롱을 받고, 야훼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는 정황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은 너무 태평무사 하고 안일해서, 너무나 신앙의 자유가 많아서, 이스라엘이 당하는 역사적 상황이 아니라서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고요 속에 들려오는 비명소리,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靜中動). 나는 지금 노력 끝에 큰 교회 목회자가 되어서 대접도 잘 받고 무풍지대에 사니, 나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가만히 대지에 귀를 기울이고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자꾸 불로소득으로 재산이 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굶어 죽는 아이들, 빚쟁이 독촉에 못 이겨 날마다 지하철 전동차에 자살하는 사람들, 목을 매 자살하는 사람들, 몹쓸 병이 들어 차라리 죽자고 하는 절규를 당신들은 듣지 못하는가. 당신네 친구 목사는 개척교회 한다고 이웃 부자 대형교회의 원조로 월 50-60만 원으로 한 달 허리를 쥐어 잡고 살아가는 군상을, 당신들은 그의 시꺼먼 가슴을 보지 못해서 모른다고 할 것이다.

 

흔히 세상이 말하는 성공적인 목회도 못하고 다만 시골교회, 산골교회 평생을 충성스럽게 목회한 뒤 이제 정년이 되어 병들어 약값은커녕 버스비도 없는 처지의, 시골 초막에서 신음하는 연세 많으신 목사님들의 아픔을 당신들은 그 소리가 천둥소리로 들리지 않느냐 말이다. 예레미야는 자기 존재의 기반이 흔들릴 정도로 몸부림치며 고백했다. 고통의 의인 욥도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비탄의 소리를 외쳤지만(욥 3:1), 예레미야는 그의 존재 밑바닥이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상대로 절규했다.(렘 20:14).

 

이 인간존재 밑바탕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그의 생일을 저주하며 자기가 나온 어머니 태를 ‘무덤이 되었더라면!’ 하면서 외쳤다. 또 그는 역설적으로(Paradoxically) 담대히 하나님께 불을 품었다.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하나님께 대들었다. 이 인간의 모순, 이 사회의 모순, 이 역사의 모순을 하나님이 용허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나님 당신은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이런 모순된 역사의 현실을 만들어 놓고도 하나님이라고 숭배나 받고 계십니까.

 

정의는 불의에 패하고, 양심적인 사람은 거짓을 꾸미는 사람에게 희생을 당하고 마는 이 모순된 세상을 언제까지 보고만 계시냐고 말이다.(렘 12:1).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하나의 이유 있는 독백이었다. 적어도 강해설교를 준비하는 성직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서를 대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교인들의 고뇌이기도 하며 우리가 선교할 21세기 인간 군상들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성직자가, 강해설교 준비자는 이런 고뇌에 찬 문제의식 없이 어찌 하나님의 참 음성을 듣기를 바라는가!

 

목회자·성직자는 우리들의 내적 고뇌와 하나님께 내 생일을 저주할 만큼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물어봐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릴 만큼 하나님과 더불어 쟁론을 펴고 하나님께 고발할 만큼 하나님께 ‘진실’하냐 말이다. 옛날 희랍의 에피큐리안(쾌락주의) 학파는 쾌락이 행복이라고 야단치던 그것이 지금도 한쪽은 굶어 죽는다고 하는데, 쾌락주의, 장밋빛 인생이 판을 치는 세상이니 하는 말이다.

 

옛날 야곱은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이 아니고는 못 삽니다.’고 말해 자신의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고 자기 환도 뼈가 부러질 정도로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을 했다. 그러한 고투가 지금 우리들에게 있는가. 성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강해설교자의 내적 투쟁,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별스런 문제도 없이 그저 무감각하게 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갈 뿐인가. 우리는 무슨 문제에 열을 내고 우리의 쟁론이 어디에서 불을 토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의식이 없고 고투가 없는 나날이며, 갈급한 심정이 아닌 한, 민초(교인 포함)들의 한(恨)을 자기 양 어깨에 메지 않는 한, 어찌 성서에서 자기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는 그 교인들의 독백적인 한과 아픔을 덜어줄 수 있는 강해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무엇 하고 계십니까.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는다고 하시면서 이런 것을 모르시나요.

 

내 뼈를 비수로 찌르는 뜻한 이 아픔, 하나님 너무 무능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나마 복에 겨워 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두 패로 갈라져서 치고 때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쟁이 잘들 논다.”면서 구경하는 그게 그리 재미있게 보입디까. “너무나 분통 터지는 세상이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타는 목마름으로 말씀의 은혜로운 해답을 사모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2). 본문성서를 읽는 법: ①. 전체에서 세부(細部)로 읽어야 한다. 전체와 부분은 항상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부분을 떠난 전체도 없고, 전체를 떠난 부분도 생각할 수 없다. ②. 다독(多讀)도 좋지만 정독(精讀)을 권장한다. 그러나 다독의 반대는 정독이 아니라, 과독(過讀)이고, 정독의 반대는 난독(難讀)이라고 하겠다. ③. 의미파악에 열중할 수 있는 주의집중, 정서적 문제로 공상이나 다른 생각이 없어야 한다.

 

④. 첫 번째 읽는 것은 개요파악에 중점을 두고, 재독할 때는 부분적으로 정밀히 검토하고, 삼독할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향· 의미 등을 생각하며 읽는다. 어떤 분은 10-20번을 읽을 것을 말하나, 최소한 3독은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⑤. 이젠 회중(교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 ⑥. 역사적 배경 연구 7). 단어 연구-특수 용어의 원어적 의미설명,주어·동사·목적어 파악, 문맥의 흐름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3). 원고작성의 유의사항: ①. 초고작성을 하고서 금방 바로 수정하려 하지 말고, 퇴고(推敲)는 하루 뒤에나 저녁에 초고를 작성했다면, 그 다음 아침에 다시 보는 것이 좋다. 그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작성자의 주관적 입장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위해서다. 그래서 전체구성, 서론, 본론, 결론의 안배 등도 살피는 것이 좋다.

 

②. 퇴고(推敲):논리나 문장에 무리가 없는지 살펴보는 것, 선입견과 주관에 얽매여 논리 전개가 비합리적으로 이루어지 않았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수적이다. ③. 문장표현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주어 술어의 연결, 수식어, 문체와 어조가 일관성이 있는지, 같은 낱말을 여러 번 쓰지나 않았는지, 사용된 어휘의 뜻이 명확한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4). 강해설교의 단점: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근래 전국적으로 대형교회 강단에서, 주일대예배 ‘메시지’(설교)로 '시리즈식'(式) 강해설교가 유행이다. 아래 지적되어진 강해설교의 단점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강해설교의 유행이 목사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는 것에 필자는 심각히 생각을 해 보았다. 강해설교를 제대로 한다면, 정성을 들여야 하고, 준비시간이 많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 유행되는 ‘시리즈식’ 강해설교는 골치 덜 썩히고, 준비하기 쉬워서 하는 것 같다.

 

본문설교나 제목설교는 한 가지 목적 하에, 논리적이고, 실존적이고, 예화를 곁들인 한편의 설교를 탄생시키는 데는 굉장한 고뇌가 있으니, 강해설교는 본문성경에서 쉽게 몇 가지 교훈을 말하면 되니 우선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재미없어 하고, 하품이 나오고, 삶에 적중하는 실존적 메시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억지로 실존적 상황으로 해석하려다가 성경을 곡해하는 오류를 범할 수가 많다. 그렇다면, 당장 주일대예배 시리즈식 강해설교는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위에서 먼저 말한 강해설교의 단점을 말해 보자. ①.정성을 많이 들어야 하기 때문에 준비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 ②.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지만 회중(교인)에게 그만큼 권태감을 주기 쉽다는 것, ③.그래서 메마르고 흥미가 결여될 수 있다는 것,

 

④.현재의 시사성(時事性)을 맞추기가 어렵다. 그러기에 칼 바르트는 “성서를 읽고, 신문을 읽으라.”고 했다. 오늘 강의의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형식의 설교든 다 그렇지만, 강해설교는 특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통찰력 있게(성서 이면에 말하는 의미를 꿰는 노력) 묵상하면서 “회중(교인)은 무엇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통 하는가.”를 예민하게 알아내야 한다. “성서는 절대로 고민하고 갈급히 보채지 않으면, 결코 그 해답을 들을 수 없다.”고 하신 필자의 스승 이상근 박사님의 말을 인용하며 이 강의를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