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Sola에서 Martin Luther 사상을 설명할 수 있다.
1). 서언: 루터는 1483년 10월 10일 독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다레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투르(Tour)의 성자 '마르틴'의 날에 세례를 받아 당시 전통에 따라 이 성자 이름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한스는 농부에서 광업으로 전직한 후, 경제적 형편이 더 좋아졌습니다. 부모는 아들이 법학을 공부해 법률가나 관리가 되실 기대하고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Erfurt University) 입학을 시켰습니다,
이 도시는 "독일의 로마"라고 부르는 신문화 중심지이었습니다. 루터는 300명에서 2등을 차지할 만큼 열심히 공부한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이 우등생은 늘 죽음에 대한 공포, 구원에 대한 갈망, 그리고 실존적 불안(Anfechtungen)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중세는 전쟁의 천지였으나 루터는 총칼의 전쟁이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속에 일어난 내적 투쟁으로 번민하였습니다. 내면의 가득한 죄들은 그를 저주의 자녀로 정죄했고,하늘에는 분노한 심판자만 있다고 믿게 했습니다.
대학을 마친 후 고향을 방문하고 오는 길에 루터는 '슈토턴하임' 근처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경험을하였습니다. 푹우에 천둥번개가 치자, 루터의 심령에 공포의 폭탄이 발화되었고, 비 오는 들녘에서 무릎을 꿇고 떨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천둥이 아닌 천둥 같은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광부들의 수호 성자인 성 안나(St. Anne)에게 보호를 구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2). 루터의 사상: 1505년 7월 17일 루터는 법학을 포기하였고, 출세보다 구원을 먼저 얻기 위해 '에르푸르트 대학' 옆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채 매일 두 조각의 빵으로 생활하고 추운 겨울에도 불을 피우지 않은 조그마한 수도원 방에서 그는 기도와 묵상의 날들을 보냈습니다. 수도원 밖 외출은 1년이나 금지되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고된 영적 수련이 구원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수도원에 가입하면 1년간은 단순 서약(Simple Vow)을 하여 예비 수도사로 살고, 1년이 지나 중대 서약(Solemn Vows)을 하면 영구적인 수도사로 살아야 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 입문 1년 후 가족과 아무 상의도 없이 중대 서약을 했고, 더군다나 사제가 되는 안수까지 받았습니다. 사제로서 첫 미사를 집전하는 날 다른 이들도 그랬듯이 루터도 가족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아무 의논도 없이 사제가 된 아들 루터가 아버지 '한스'로서는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2년 만에 재회하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굳게 다문 잎을 떼며 아들을 이렇게 나무랐습니다. "너는 대체 '네 부모에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성경의 계명도 모르느냐?" 루터는 사제의 소명에 수종했고, 부모는 아들의 불순종에 실망한 채 발 걸음을 돌렸습니다.
1512년부터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신설 대학에서 강사로 또 사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1515년 후스가 화형당한 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 시기에 루터는 중세 천년의 구원 사상을 뒤집는 새로운 발견을 하였습니다. 그때에야 자신의 불안과 번민에서 자유를 경험했고 이제 그 뱔견을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 "오직 은혜" 와 "오직 선행으로": 중세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기초한 구원론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유사성을 이루어 같은 종류가 되는(Like is known by like.)" 방법론을 가진 사상이었습니다. 즉 완벽한 하나님과 유사한 일들을 행함으로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세 천년 동안 구원이란 인간이 선행을 통해 하나님과 유사해지는 노력이며 "성취"였습니다.
그럼에도 루터는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 갖는 내적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 영적 번민에 대한 대답을 그는 다음 성경 구절에서 찾았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루터는 위 구절을 새롭게 이해함으로 큰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는 중세 사람들에게 도달해야 할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의'의 기준에 스스로의 힘으로 이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루터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기준이 인간이 도달하기 하기 힘든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 즉 복음이겠는가! 루터는 이 구절을 역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의'를 얻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결국 인간이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역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선물'이 바로 '은헤'인 것입니다. 본래 이 두 단어는 고대 세계에서 같은 의미를 지녔습니다. 또한 '의로움'이 하늘의 선물이라면 그동안 이를 성취하려고 매진한 모든 중세적 선행들, 즉 금식, 자선, 독신, 순례, 유물, 십자군, 면제부, 교황에 대한 복종 등은 부차적인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루터의 사상은 한마디로 중세 천년의 전통을 뿌리 채 뒤흔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발견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인간들에게 소망의 메시지었습니다. 삶의 모든 의미와 참 안정은 인간이 쌓는 선행 탑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와 생명으로부터 출발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고 새 생명은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루터는 오직 은혜만이 우리를 죄와 악한 세상에서 구원한다는 강한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한 도덕 선생으로서 행함을 요구하는 이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사망을 십자가와 부활로 직접 짊어져 처리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복과 물질이 많아지는 것을 목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루터는 이를 소위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 이라 부루며 거부하였습니다. 오히려 세상 가치들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는 삶인 "십자가의 신학"(Theology of Cross)만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루터에게 교황들이나 중세 기독교의 모습이 거짓으로 보였던 것은 바로 외적인 요소에 대한 치중과 예수 이름을 이용한 상업적 신학, 십자가 없는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종교성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루터 사상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세상으로 회귀할 경향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기복을 위해 종교를 갖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은 이런 차원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십자가를 향한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루터의 사상은 "오직"을 뜻하는 5개의 라틴어 '솔라'(Sola)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의로워지며, 십자가에 대한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또한 교황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가 교회의 중심이며, 공의회의 전통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최고 규범입니다. 루터의 이 주장은 교황이 필요 없는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으로 이어졌습니다. 더 나아가 루터는 진정한 의미의 '오직 행함'(Sola Opera)을 강조하였습니다.
면죄부 구입이나 유물 수집 같은 "중세의 선행"들을 거부하고 '이웃 사랑'만이 참 선행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루터는 친구 '요나스'에게 보낸 1529년 편지에서 "cl."에서 이 "칭의" 교리를 발견했다고 적었습니다. 대체 이 "cl."이 어떤 곳이기에 이 위대한 발견이 나왔는가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나왔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cl. 아닌"오직"을 뜻하는 'sl.'(solus)의 약어라는 해석. 2. cl.은 "capitel(chapter) 1."의 준말로서 신약의 로마서 1장을 의미한다는 것. 3. cl.은 "cellar", 즉 수도사 방을 말한다는 것. 4. cl.이 cloister(수도원)라는 것. 5. cl.은 'cloaca(화장실)'의 약어라는 주장.
만약 5번째의 해석이 옳다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탑의 화상실에서 이를 발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루터의 그 편지에서 'cl.'을 지시하는 독일어 대명사가 중성(das)이므로 중성 명사인 수도원(C[K]loster)의 약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어쨌든 루터는 변비로 한 시간 이상을 화장실에 늘 있었기에 수도원이나 탑의 화장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불 붙은 면죄부 논쟁: 루터가 진정 우려한 것은 아무런 희생도 봉사도 헌신도 없이 면죄부 구입 같은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가짜 기독교'의 등장이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루터는 이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제32조: 사면장으로 구원을 판매한 이들은 그 가르친 이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제86조: 교황은 오늘날 어떤 대부호보다도 더 부유하다. 그런데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왜 자신의 돈을 쓰지 않고 가난한 신자들의 돈을 쓰려하는가?" "제95조: [면죄부라는] 거짓된 확신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다. '95개조 반박문 게시' 사건은 종교개혁의 시작이었고, 새 시대 개혁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로써 역사는 중세가 아닌 근대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글은 금속 활자로 인쇄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누군가가 95개조 반박문을 면죄부 판매 책임자였던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보냈습니다. 당황한 대주교는 95개조 문서를 즉시 교황에 보고했고, 이제 사태는 심각해 졌습니다.
면죄부 판매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 비용을 충당한 교황 레오 10세는 일개 수도사의 도전에 분노하였습니다. 1518년 교황은 루터를 누르고자 독일 비텐베르크 영주 프레더릭 현제(Frederick the Wise) 압력을 넣었으나 프레더릭은 루터 편을 들었습니다. 이듬해인 1519년 7월 교황청은 이름난 학자 엑크(Johann Eck)를 보내 라이프치히에서 루터와 공개 토론을 갖게 했으나, 그 자리에서 루터는 아예 교황까지 공격하였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교황은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에 불과하다." 토론 상대로 나온 달변가 '에크'는 루터 사상이 100년 전 화형당한 '얀후스'(Jan Hus)와 같다며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갔습니다. 후스의 사상을 파악하려고 루터는 잠간의 휴회를 요청하였고, 다시 토론장으로 돌아와 이렇게 외쳤습니다. "맞다. 나는 후스파이다!"(Ich bin ein Hussite!)
(3). 루터의 저술들:1520년 '에크'와의 토론회 직후 루터는 가장 대표적인 저술 4권을 내었습니다. 그는 평생 약 200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이는 사제와 개혁자로서의 임무를 고려할 때, 엄청난 분량이었습니다. 4권의 위대한 논문 중 첫째인 <독일 귀족에게 고함> 이탈리아 교황들과 종교 귀족들의 전횡을 고발하였습니다. 이 논문은 독일 국민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고양시키는데 기여하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위해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왜 독일인들이 이탈리아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가?"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2번째의 저술에서 루터는 교회가 교황의 포로가 되었다고 탄식하였습니다. 교황이 각종 그릇된 전례와 의식으로 가짜 기독교를 만들어 신자들을 노예처럼 묶어두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루터는 세례와 성만찬을 제외하고 다른 성례들은 거부하였습니다. 또 "모든 사람이 다 성직자"라는 '만인사제직' 사상도 펄치며 사제와 신도 간에 아무런 영적 차등이 없음을 주장하였습니다. 3 번째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에서 루터는 전반부에는 신자의 전적인 영적 자유를 외쳤고, 후반부에는 신자의 외적 의무인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논문은 많은 사람들이 후반부를 읽지 않거나 또는 제목을 '자유에 관하여'가 아닌 '자유'로만 읽어 루터 사상을 크게 오해하였습니다. 루터는 결코 이 책에서 기독교인의 전적 자유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웃에 대한 종으로 매인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4 번째 논문 <수도원 서약에 대한 심판>은 수도적 독신을 비판하고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주장하였습니다.
(4). 수도사 루터와 황제 카를 5세의 역사적 대면: 1520년 6월 멧돼지 사냥을 즐기며 놀던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최후 통첩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60일 이내에 이단성을 인정하고 그 동안 주장들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루터는 아예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며 철회를 거부하였고, 이에 교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파문장을 공포하였습니다. "주여 일어나소서! 멧돼지가 거룩한 포도원을 파괴하고 있나이다."
교황의 눈에는 루터가 멧돼지로 보였지만, 루터의 눈에는 교황이 교회라는 포도원을 허는 여우처럼 보였습니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에게 루터 재판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21살의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유명한 이사벨라 여왕의 외손자이었습니다. 이사벨라는 딸 '후안나'에게 자신의 왕국을 물려주었고 이는 다시 후안나의 아들 카를 5세에게 건네졌습니다.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 5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신성 로마 황제로부터 독일과 유럽의 여러 영지도 물려 받았던 것입니다. 1519년 카를 5세는 독일의 왕으로 '아헨'에서 즉위했고, 이듬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도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독일과 스페인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나폴리, 시실리, 사르디나, 북이탈리아, 크로아티아 등을 모두 지배하는 유럽의 최고 군주였습니다.
카를 5세는 루터 문제로 자신의 제국에 분란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제국 회의를 열어 상황을 종결하려 했습니다. 루터는 카를 5세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고 1521년 4월 16일 보름스(Worms)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이틀 후 카를 5세와 루터는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극적인 만남들 중 하나로서 중세를 상징하는 인물과 근대를 상징하는 인물의 대면이었습니다.
또 가톨릭의 수호자와 개신교 개혁자의 충돌이었고 강력한 군주와 가난한 수사의 만남이었습니다. 카를 5세는 루터의 해명을 듣기조차 거부했고 단지 딱 한 가지 질문만 던졌습니다. "문서에 나온 그대의 주장들을 철회하는 가?" 루터는 답변을 위해 하루의 시간을 요청하였고, 이튼날 다시 항제와 수백의 청중들 앞에서 결연한 의지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폐하! 제 대답은 이것입니다. 저는 수없이 오류를 범한 교황과 공의회를 신봉하지 않습니다. 제 양심과 성경에서 직접 가르쳐 주지않는 한, 저는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제가 여기 섰나이다." 카를 5세 항제는 예상치 못한 이 대답에 심히 불쾌해 했습니다. 다음날 황제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과 전통을 수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단 한 명의 수도사가 온 기독교 세계에 반대되는 거짓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가톨릭을 수호하는> 이 일에 나의 제국, 권력, 친구, 심지어 내 몸과 피, 목숨, 영혼까지 모두 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루터의 거짓 주장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 후 황제는 루터 문제에 대해 '보름스 칙령'(Edict of Worms)을 내렸는데, 이는 루터가 이단이므로 처벌되어야 하며 루터의 동조자들도 사형 선고와 재산 몰수로 벌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루터의 귀환을 이미 약속했기에 회의장에서 즉각 구속하지 않았지만, 루터는 돌아가는 길부터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는 도중에 루터는 갑자기 일군의 병사들에게 남치되었습니다. 이들은 루터를 지지한 영주 '프레더릭' 현제가 보낸 병사들이었습니다. 루터는 발트부루쿠(Wartburg) 성에 안전하게 연금되어 1521년 한해를 보냈는데 개혁의 급선무인 성경 확산을 위해 3개월 만에 독일어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이는 그해 9월에 출판되어 "9월 성경"(September Bible)이라고도 불렀습니다.
3). 결언: 루터는 자신이 비록 사라진다할지라도 목동도 상인도 자유롭게 성경을 읽는 세상만을 기대했습니다. 어려운 라틴어로 쓰여 천년동안 일반인들이 접근할 수 없었던 성경은 이제 대중 언어로 번역되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의 말을 듣는 기독교가 아닌 성경의 말을 듣는 기독교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루터의 성경은 독일어의 발전과 문자 교육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틴어의 천년 위상은 바로 이때부터 기울기 시작했고, 각국은 자국의 언어를 더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발트부르크' 성은 안전한 곳이지만, 루터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시다."(Eine feste burg ist unser Gott: Our God is mighty fortress.) 끝.
2024년 2월 12일
山下연구소: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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