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신학이론마당(75)

14. R. Niebuhr의 기독교의 인간관(1)

solomong 2024. 11. 18. 09:57

 

 

14. R. Niebuhr의 기독교의 인간관(1)

1. 서언: 필자는 신학자 중에서 R. Niebuhr의 인간관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니버를 통한 기독교의 인간관을 탐색코자하는 이유는, 1). 그는 인간실존 문제를 추구하는 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실존주의는 실존주의 인간개념이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실존주의 특유의 인간해석을 하는 것이지, 실존주의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2). 동시에 그는 신학자 뿐만 아니라,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市에서 13년간 목사로서 목회경험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신학과 목회> 두 분야를 아는 자요, <이론과 실천>을 접목시켜 주기 때문이다.

2. 니버 사상 배태 배경: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는 원래 독일 서북부쪽에 있는 '하르디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거기서 상당한 토지도 가지게 되어 생활에는 걱정이 없었으나, 더 큰 꿈을 품고 1878년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구스타프는 농사를 그만두고 장차 교역자가 되기 위해, 그가 속해있는 신학교인 St. Louis에 있는 Eden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파송되어 목회하는 중, 그 교회 목사 딸과 결혼하여 아들 셋을 얻게 되었다.

맏아들인 홀다는 메코믹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둘째아들은 사업에 종사했으나 별로 성공치 못하다가 1946년에 죽었다. 셋째아들 역시 어려서 죽게 되었다. 그후 구스타프는 미조리주에 있는 라이트 市로 이사간지 얼마안되어 니버가 태어났다. 1892년 6월 21일이었다. 2년 후에 그의 동생인 리차드가 태어났다. 그도 역시 나중에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다. 니버는 루터교회의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니버는 엠허스트 대학과 Eden 신학교를 마친 후에 예일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하여, 석사(M.A.)를 취득하게 되었다. Ph.D. 과정을 밟을 것인가 목회를 할 것인가를 망설이다가, 결국 미시간주에 있는 자동차 도시 디트로트 市의 베델교회로 가서 목회를 했다. 그는 엠허스트 대학에서는 교양교육과 고전어 훈련을 받았고, 이든 신학교에서는 성서와 조직신학에 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예일대학교 신학부에서는 메킨토쉬, 포터, 베이콘 교수들로부터 자유주의적 사회철학과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목회 13년간의 경험 속에서 그의 신학사상은 깊은 회의와 고투 속에서 그의 기독교 현실주위적인 사상이 배태하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뉴욕에 있는 Union 신학교의 교수로 봉직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사상의 형성과 전환의 두가지 면인, 예일대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운 것과 디트로이트 베델교회에서 체험한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실존상황의 문제성이었다. 그는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자타가 공인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로 자처했었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독일에서 일어난 '쉴라이에르마허'의 제자들의 학파를 말하는 것이다. 저들 신학의 요점을 말한다면, 1). 종교(Religion)는 절대의존의 감정이란 것, 2). 윤리성을 강조하는 것, 3). 인간사회에 대한 큰 관심을 갖는 것, 4). 사랑을 강조하는 것, 5). 인간 理性에 대한 확신, 6).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 등이다. 니버는 신학에 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신학을 단지 학문 분야에만 묶어 두지 않고, 문화 전반과 관련시키려 했으며 인간실존 문제를 사회적으로 정치적인 힘까지 빌어서라도 해결해 보려는 실천가였다.

 

그는 1932년에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라는 저서를 했는데, 그 속에 담긴 사상은 안이한 이상주의나 자유주의 적 정치이념을 통박했다.(앞으로 이면을 탐색해 볼 것임) 또한 J. Dewey의 교육철학에 의해서 대표되는 세속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교육이나 과학적 지성이 더 좋은 사회를 형성할 수 없다고 도전했다. 사회를 위해서는 사랑의 윤리가 아니라, 正義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상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이나 정통주의 신학에서도 사랑의 윤리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정의의 윤리를 강조한 신학자는 별로 없었다. 니버는 사랑 대신에 正義를 강조했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의 사상의 대전환은 Marxism 사상에 심취했다가 다시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니버는 1930년대의 사회에 대한 그의 사상에서 Marxism 요소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1932년에 "Marxism은 사회가 움직이는 이상적 목표와 평등, 정의의 목표와 경제적 정의의 지반(地盤)을 이해하는데 오류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자유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분명히 맺지 못했는데, Marxism은 사회를 그 이념의 토대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니버가 Marxism에 심취한 것은 그 철학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치적 경제론에 있었다. 그러나 니버는 Marxism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함으로써, 지나친 낙관론에 빠지는 오류를 범했다고 했다.

 

현실에서 찾아볼 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근거와 혁면후, 낙원에 대한 논의는 소련에 의해서 명백히 부정된다고 지적하였다. "니버가 자본주의 부패상을 보고 Marxism이 필요하다고 믿게 되었다면, 그가 Marxism을 환상이라고 확신하게 된것은 <원죄>(原罪)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 때문이다."라고 머클레이는 말했다. 니버가 Marxism을 비판한 것은, 공산주의가 안고 있는 악의 근원은 공산주의가 수립한 '권력의 독점화'라고 했다. 또한 그는 Marxism의 허구성은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런 제 이유로 니버는 기독교 현실주의로 돌아서게 되었다.(다음 계속)

2012. 6. 24.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