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Nachfolge)라는 그의 신학의 의미(1)
본회퍼는 당시 서민들의 고민과 어려움을 알았던 사람이다.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를 저항신학으로 분류할 수도 있으나, 오히려 당시 히틀러의 독재 앞에서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핀켈발데 신학교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목회자를 교육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된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했고,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고민했다. 따라서 본회퍼를 히틀러에 대해 투쟁했다고 해서 단순히 저항 신학자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삶과 학문을 올바르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본회퍼의 저서 "나를 따르라"(제자의 길)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복음 주석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얻지 못한다. 어쩌면 본회퍼처럼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처럼 나도 죽겠다고 하는 것, 베드로처럼 ‘당신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제자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나를 따르라'는 공부를 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면 이 책이 우리를 갈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야 하는데, 그게 이 세상에서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괴로워한다. 성경을 보면 여러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고민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 목회자의 고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고민 없이 철저하게 이중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본회퍼의 이름을 들을 때 어떤 것이 생각나는가. 한국교회가 본회퍼의 신학을 수용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 교인의 신앙이 어디에 있는가.몇년 전에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셨는데, 왜 사람들이 그토록 그분의 죽음을 애달파 했을까. 사회는 교회를 쳐다보고 있다. 예전에 민경배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 고종 황제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봐라 거기 야소교인 없느냐’.고 했다. 고종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야소교인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희망의 불꽃은 본회퍼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흔히 본회퍼의 신학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박봉랑 교수가 쓴 책 제목처럼, '기독교의 비종교화'라고 한다. ‘기독교의 비종교화’가 무엇일까. 기독교가 종교적이 되었다는 것이 이 말에 전제가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비종교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무엇일까. 지금 한국교회가 이미 종교화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종교화 된 기독교를 구해 낼 수 있을까. 성서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내가 참 목사가 되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설교도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현대교회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오늘 우리의 교회가 말씀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사실 이것은 신학과 설교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설교하는 사람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선포하고 있다. 그러니 설교의 의미가 있겠는가. 복음이 내 안으로 성육신 해야 한다. 본회퍼가 발견한 것은 복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이 세상 것을 다 버리고 살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 속으로 들어 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더니 고통스러웠고, 제자들도 예수님 뒤를 좇았더니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것이 고통에서 끝나지 않았다. 부활이 있다. 이것을 믿고 ‘너도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좇게 된다.
신학은 과거 사실을 기억하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인데 본회퍼는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가자고 한다. 본회퍼는 추상적인 것을 말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의 교회가 형제애를 실현하고 있는가. 배가 부른 오늘 한국교회가 옛날 가난했을 때 보다 더 못한 모습은 아닌가. 오히려 우리의 교회는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신학도로서 내 영혼에 유익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따르라"! 아니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히 말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우리의 삶에서 신앙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본회퍼는 행동 안에 있는 신앙(Faith in Act)을 얘기한다. 본회퍼를 연구한 학자들은 그의 신학을 ‘복음의 사회학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말씀이 나의 삶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것은 종교적이거나 심리적인 신앙이다. 본회퍼는 예수님이 주신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한다. 이것을 확신하고 예수가 준 멍에를 메고 그를 뒤좇는 것이 믿음이다. 철저하게 예수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 예화나 유명한 사람의 일화를 찾는다. 감동을 주려고 한다. 루터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복음을 외칠 시간이 없다. 그렇기에 율법을 외칠 시간은 더욱 없다."고 했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누구든 고민을 안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는가. 설교자는 또한 사회를 알아야 한다. 설교의 컨텍스트(Context)는 '오늘 여기'(Now and Here)인 것이다.
2011. 7. 24.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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