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본회퍼의 저서 [나를 따르라](Nachfolge)라는 그의 신학의 의미(2)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오늘 우리들의 설교가 어떤 스타일로 되어있는가. “교회의 설교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나, 순수치 못한 소리, 사람의 가혹한 율법, 잘못된 희망과 위로의 선포가 얼마나 많으며, 예수의 참된 말씀을 흐려 참된 결단을 곤란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우리의 설교가 무미건조한 형식과 개념 때문에 그들이 듣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에게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 되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책임만은 아닐 것이다.”([나를 따르라] 저서15쪽. 이하 책 페이지만 표시). 우리가 개혁(reform)이라고 할 때, re는 기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설교를 개혁한다면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다. 케리그마(kerygma) 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 ‘나를 따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가혹한 율법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오히려 무거운 짐이 풀어진다는 것을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설교의 과제는 결국 신학의 과제이다. 설교를 듣는 사람은 해야 한다와 그러나 할 수 없다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상황과 질문에 무언가 답을 주는 설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식의 설교는 폭력일 뿐이다.
그렇다고 도그마(Dogma)를 되풀이하는 설교도 안 된다. 또한 기독교 상담이라고 해서 회복과 위로 차원의 설교도 아니다. 여기에는 무거운 짐을 대신 진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종된다. 어쩌면 십자가를 진 분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것을 가지고 설교자가 무책임하게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만 설교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이다. 이런 경험이 있었다. 어느 설교자를 만나서 ‘설교 본문 분석한 것이 있는데 참고하겠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설교 못해서 쫓겨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데, 설교가 얼마나 무책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설교자에게 설교의 과제가 주어졌다면, 그 설교를 듣는 사람에게는 들은 것을 가서 전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물론 설교 때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아무렇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산 말씀의 부정이며 하나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에 대한 부정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려고 값비싼 댓가를 치렀다는 뜻이다. “따라갈 필요 없이 앉은 자리에서 위로를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의인을 뜻하는 값없는 은혜일 수는 있어도, 죄에서 떠나 돌아와 참회하는 죄인의 의인은 아니다.” “값없는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값싼 은혜는 받은 사람의 반응이 없는 것이다. 값비싼 댓가를 치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질문도 생길 수도 있다. ‘나는 값비싼 은혜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병 주고 약 주듯이 비싼 은혜를 주었으니 너도 그에 걸 맞는 댓가를 치르라는 것은 또 하나의 율법 아니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본회퍼의 설명은 명쾌하지는 않지만, 그는 나름의 답변을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서 내가 보이는 작은 반응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마 25:40) 우리가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그릇 떠준 것을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값으로 계산해 주겠다는 것이다. 일명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나무 십자가가 아니라, 종이로 만든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중으로 비싼 은혜다. 주어진 은혜도 비싼 것이고, 하나님이 100을 주셨는데, 나의 0.1이라도 100이라고 생각해 주시는 은혜이다. 그러나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 15:3) 그리고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그런데 우리는 0.1의 감사도 못한다.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표현할 길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이라도 보답한다고 했는데, 그것을 예수님은 보답했다고 생각해 주신다는 것이다. 멍에를 지라는 것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며, 이것은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실제로 사랑을 실천해보니 그것은 쉽다. 이게 쉬운 멍에 아니겠는가.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반응이 없는 사람은 결국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입으로는 은혜를 말하지만, 실제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설교자는 은혜를 깨달으라고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 은혜에 대한 반응에도 올바르지 못한 응답이 있다. 공적으로 계산하는 반응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이것은 값 비싼 은혜를 값 싼 은혜로 만드는 것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해야 한다. 루터가 ‘나는 복음을 외칠 시간이 없다. 그러므로 율법을 외칠 시간은 더욱 없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것, 그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중요하다. 이 깨달음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인격적 경험이지, 종교적,심리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보이는 부모를 섬기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섬길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다윗의 시편을 보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애타게 찾다가 ‘과연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고 고백한다. 스데반도 죽기 전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런데 본회퍼는 그렇게 살기를 원했고 감옥에서 나오고 싶었는데, 대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것이 어디에 있나. 그렇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마지막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외치고 죽었다.
예수님도 세 번씩이나 수난 예고를 했지만,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피할 길은 없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십자가를 지러 갔다. 십자가에 달린지 6시간이나 지났는데, 아무 변화도 없다. 그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온전한 순종을 원하셨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기계적 하나님이 아니시지 않은가.(Deus ex machina). 그러면 다윗이나 욥 같은 사람들은 결과를 본 사람들이고, 해피 엔딩을 맞은 사람들 아닌가.
우리가 본회퍼의 저서[나를 따르라]와 [옥중서신] 등을 더 읽어야 하겠지만, 본회퍼가 마지막에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라고 한다. 내가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면에서 끝까지 순종과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해하도록 끝까지 믿는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게 우리의 올바른 모습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믿으면서도 회의한다. 이게 매 순간 고민하는 부족한 우리의 모습이다. 본회퍼도 고민했을 것이다.
2011. 9. 4.
山下연구소장: 양 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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