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우연한 화살
(본문: 왕상 22:29~36)
1). 서론: 오래전 서점에 갔었는데 「되는 집안은 가지 나무에 수박 열린다.」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습니다. 서론 부분만 잠시 읽어보았습니다. 그 내용인즉 사람에게는 평생에 세 번 기회가 오는데 공부할 기회, 혼인할 기회, 직업을 가질 기회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회를 잘 선용해서 노력하면 잘되는 집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면, 안되는 집안이 되는데, 그래서 ‘수박 나무에도 가지가 열린다.' 식의 논리로 전개했습니다. 나는 이 결론적인 말을 ‘요행을 바라면, 안되는 집안이 된다.'라는 내용으로 명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우연한 화살'입니다. 성서 본문 말씀 34절을 보면 "한 사람이 우연히 활을 당기어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 병거 모든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우연한 화살'이란 영어 성경에는 "…at a venture…"(요행 삼아서)라는 뜻도 있고, "…at random…"(되는대로, 엉터리로,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라는 뜻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군인이 하물며 전쟁터에서 요행 삼아 되는대로, 엉터리로, 닥치는 대로, 마구잡이로 전쟁해서는 오히려 자기가 죽을 뻔할 일인데, 어떻게 이렇게 하였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행 삼아서, 되는대로 정확성도 없이 쏜 화살이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우연입니다. 이 세상 이치로 맞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차원을 달리해서 하나님 섭리의 세계에는 그와 같은 것이 요행과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 말씀을 더 상고해 보도록 합시다.
2). 본문의 이해(Text): 아합왕의 事必歸正- ⑴. 바알 우상숭배 ⑵. 나봇의 포도원 강탈을 위한 살인 ⑶. 미가야 선지자 투옥 박해 ⑷. 전쟁터에서 여호사밧 왕을 자기 모습으로 변장시켜 죽이려고 했음. 등의 악한 일이 임시로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았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마침내 우연히 쏜 화살이 사실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화살로써 아합왕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의 四字 成語로는 사불범정(邪不犯正;바르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것이 올바른 것을 침범치 못한다. ), 인과응보(因果應報;원인과 결과는 서로 물고 물린다.), 종두득두(種豆得豆;콩을 심으면 반드시 콩이 나온다.) 등입니다.
3). 본론(Context): 아합왕은 주전 876년~854년까지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재위하였습니다. 그는 초기 이스라엘 나라의 유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무역 국가인 베니게의 왕녀 이세벨과 결혼해서 고대 무역 민의 후원을 받고, 자기 딸을 유다 나라 여호사밧 왕의 아들 요담에게 시집보낸 것은 히브리 민족 분열의 흔적을 없이하려는 계산이었고, 그 후 이스라엘과 유다는 약 100년 가까이 화친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는 유일신 하나님 신앙을 등한시하고, 정략적인 의미에서 바알신과 아세라 농업 신을 신봉하는 혼합종교로 기울었고, 특히 왕후 이세벨의 바알 종교를 국교로 만들고자 선지자 엘리야를 박해하였음에도, 그녀 앞에서는 무력한 왕이었습니다. 더욱이 나봇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포도원을 탈취하고, 나봇을 죽여 개인의 권리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린 잔인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유로 인하여 민중의 반감을 샀으며, 결국 왕조가 멸망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있게 통찰해 봅시다. 본문의 말씀은 아합 왕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멸망했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람 왕 벤하닷이 아합에게 약속한, 이스라엘의 실지(失地) 반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을 아합왕은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러던 중, 아합왕은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방문을 계기로 함께 아람 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제안하여 그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는 이스라엘을 종주국으로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지 가운데는 '길르앗 라못'이란 곳이 포함되는데, 그 지대는 길르앗을 통과하는 동방 대상들의 요로였습니다. 곧 그 지방을 상실한다는 것은 국가 경제에 큰 손해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출전하기 전에 우선 선지자들을 불러서 전쟁에 대한 신탁을 듣기로 하였습니다. 아합은 400명의 어용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출전이 하나님의 뜻이며, 반드시 승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 선지자들의 진실성을 전폭적으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지자들에게 묻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아합은 싫어하면서도 부득이 미가야란 한 선지자를 불렀습니다. 미가야는 항상 집권층의 불의를 규탄하고 '불길한 예언만 하는 자'라고 덧붙였습니다. 미가야의 예언은 역시 왕의 전사와 백성의 흩어짐을 예언했습니다. 아합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출전을 하였습니다.
아합은 자기의 갑옷과 병거를 여호사밧 왕에게 주고, 자기는 보통 군인으로 변장한 뒤 병거를 타고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자기 갑옷과 병거를 여호사밧에게 준 것은 적이 볼 때, 여호사밧의 병거가 자기 아합왕의 병거처럼 보이게 하여 여호사밧이 죽게 하고 자기는 살겠다는 복심이었습니다. 적의 한 병사가 공격 목표도 없이 화살을 요행 삼아 허공을 향해 쏘았는데, 그 화살이 아합왕의 갑옷 솔기(갑옷 비늘조각을 붙인 틈새)에 명중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합왕의 사인은 피를 많이 흘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자, 우리의 관심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이 요행히도 아합왕을 명중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역사에서 <우연>이란 것이 가능한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연이란 의미는 라틴어 뜻은 '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철학적으로는 결정되지 않는 것의 속성이며, 확률법칙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것의 속성을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한 사건이란 것은 표면적으로만 목적적인 사건이고, 실질적으로는 의식적 무의식적 목적론의 결과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극한에 가서는 우연성은 불가능성에, 필연성은 가능성에 접근해간다는 사실에서 우연성과 필연성은 각각 서로 상관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연성은 필연성의 반대되는 개념이란 것입니다. 위의 말들은 쉽게 말한다면, 우연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때, 우연한 화살은 극한에 가서는 아합왕에게 화살이 명중되지 않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필연적인 사유와 그 근저에 존재자의 힘이 작용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폴 틸리히(P. TiIlich)는 철학과 신학을 연결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 또는 존재의 바탕(The Ground Being)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연한 화살이 떨어지는 힘의 작용을 한 분은 모든 존재의 根底인 하나님이 능력으로 말미암았다는 설명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지금도 우주와 천지 만물과 인간계를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신앙의 근간입니다. 하나님이 섭리하는 세계는 오직 필연성만 있고 우연성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은 필연입니다.
필연성이란 오직 존재의 근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섭리 안에서는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을 뜻합니다. 예컨대 자연적 필연성은 자연현상의 합법칙성이란 것입니다. 그 여름에 무성했던 녹음이 가을이 되면 낙엽으로 변하여 힘없이 대지에 떨어져 포도 위에 뒹굴어 다니는 것을 볼 때, 인생의 종말이 그와 같다는 생각에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나뭇가지에 하늬바람과 눈보라만 스쳐 지나가고, 따스한 봄빛이 대지를 어루만지면, 꽁꽁 얼어붙었던 땅을 밀치고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것이 자연의 필연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연의 필연적인 섭리의 질서입니다.
또한 도덕적인 필연성이란 것이 있습니다. 도덕적 필연성에는 원인 없이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인과관계 또는 법칙에 따라서 지속으로 일정한 방향으로 작용하는 필연적인 법칙이란 것입니다. 이 법칙에서 우리는 그 우연한 화살이 요행으로 아합왕을 명중시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필연적인 섭리에 의한 하나님이 아합의 도덕적 인과관계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으로 귀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잘 쓰는 ‘事必歸正’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간사 모든 것이 원인이 선하면 다소 지연되거나 억울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그 결과는 언제나 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이 세상, 자연의 질서 및 도덕 질서는 언제나 필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노동자가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데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16의 가치라고 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값이 최저 단위의 미미한 참새 두 마리도(참새 한 마리의 값은 한 데나리온의 1/32의 가치)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아끼거늘, 어찌 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생명을 우연한 화살에 맞아서 죽게 할 일은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필연코 죽어야 할 곡절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즉, 아합왕이 죽게 된 것은 그의 도덕적 인과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합의 그의 삶이 어떠했으며, 어떤 행위를 행하였는가를, 제가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이 아닙니까. 유일신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하는 것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절대명령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 "나 여호와는 너희가 애급에서 종노릇 할 때, 해방시킨 하나님인 것”을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하고, 나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수없이 반복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아합왕은 잊었습니다. 제1계명과 제2계명을 파괴한 것입니다.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인데, 나봇이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인 포도원을 탐냈습니다.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요사이 말로 표현한다면, ‘단식투쟁’을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시위를 하니, 왕후 이세벨은 음모를 꾸며서 나봇을 돌에 맞아 죽게 하고, 아합에게 포도원을 빼앗아 주었습니다. 이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빼앗아 달라는 일종의 데모였습니다. 결국 아합이 나봇을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을 빼앗았으니 제8계명을 어겼고, 종국에는 나봇을 죽였으니 제6계명을 파괴했습니다.
제1, 2, 10, 8, 6계명 순으로 그는 범죄를 하였습니다. 요즘 형법대로 말하면 아합은 국가 내란죄(이념 죄), 남의 소유를 강도질 한 죄와 살인죄로 공동 정범이었습니다. 경합범이지만 내란죄(이데올로기=우상 숭배)와 살인죄의 형량은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필연적인 인과법칙에 의해서 그 우연한 화살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화살이었기에 아합을 명중시킨 것입니다. 아합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내린 필연적인 죽음의 벌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 스스로 물어볼 말입니다. 나에게 우연한 화살이 쏘여 올 일은 없는가. 아합은 포도원을 탈취하고, 나봇을 죽인 뒤에 엘리야와 마주쳤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한 말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 21:19). 예고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나의 설교 말씀도, 엘리야가 아합에게 예고한 말 그대로입니다. 예고를 듣고도 교만했으니 죽었지요.
일이 무언가 잘 안되거든 일단 멈추어서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 없나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환란, 시험, 고난이 닥치거든 자기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범죄 한 것이 있으면 다윗처럼 회개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일단 회개할 기회를 부여했음에도 교만하면 우연한 화살, 아니 필연적인 하나님의 화살이 날아옵니다.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늦기 전에 회개합시다. 우리는 모두가 선고유예를 받은 인생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구하지 못한 주인이 과원 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기다려서 열매를 구였거늘 얻지 못하니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라고 했습니다. 과원 지기가 주인에게 이르되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눅 13:6~9) 금년도 2/3가 지나갑니다. 우리에게 열린 열매는 얼마나 됩니까. 열매 없으면 찍어버릴 도끼가 나무 옆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유예의 인생입니다. 또 우리는 이런 사람은 아닙니까.
가을 추수를 하여 소출이 너무 많아 곡간에 가득 쌓아두기에는 곡간이 좁아서 고민하던 차에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서,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문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하자', 하나님은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눅 12:16~21) 저축해 둔 재물은 생명의 보증수표는 못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연적인 화살 앞에는 그 재물도 그림의 떡입니다. 인도의 시성 타골(Tagore)의 시 가운데 '죽음의 사자'란 시가 있습니다.
"당신의 죽음의 使者가 나의 문전에 당도해 있습니다./그는 미지의 바다를 두루 가로질러서 나의 가정으로/당신의 호출 명령을 소지하고 왔습니다./그날 밤은 캄캄하고 나의 마음은 공포에 질렸습니다./나는 아직 등불을 밝혀서 나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그에게 어서 오라는 인사를 하렵니다./그것은 나의 문전에 서 있는 당신의 使者가 있기 때문입니다/나는 그에게 合掌을 해서 그리고 눈물로써 존경의 예를 올릴 것입니다/나는 나의 마음의 보물을 그의 발 앞에 두고서 존경을 표할 것입니다/ 그는 그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서 나의 새벽에 어두운 그림자를 두고서/그리고 적막이 감도는 나 자신의 집은 마지막 당신께 드리는 제물로써/단지 나의 버려진 屍身이 남겨진 채 당신께로 귀환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영혼(생명)을 찾아오란 사자 앞에는 무력한 우리 인생이 아닙니까. 이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필연적인 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한국교회 주님의 종들이여! 初心을 잃지 않도록 각성합시다. 권력과 부를 가진 아합은 마음속에 죄의 충동이 넘쳐나는 악인이었고 이세벨은 그런 남편의 악행을 부추기는 여자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권고하셨지만, 결국 이들의 행적은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했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 출전한 아합은 자신의 안위를 꼼꼼하게 대비하고 준비하지만, 어느 아람의 궁수가 우연히 쏜 화살에 치명상을 입어 죽게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우연한 그 일격이 운명의 일격이 된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엄숙한 진리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악한 욕심과 방종으로 고집대로 산다면 소망 없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교훈을 심각히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4). 결론: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의 연결고리"입니다. 교회의 처지에서 하나님교회의 성성(聖性)을 깨트리고 있는, 敎會와 個體는 각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남이 몰래 지은 죄는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우연한 화살, 아니 필연적인 화살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여! 회개의 문이 닫히기 전에 용서를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열려있는 회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회개의 문은 항상 열려있는 문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그 회개의 문은 닫혀버립니다. 그 회개의 문이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습니다.
진리를 향한 문도, 사랑의 문도, 정의를 실현할 문도 아직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늘 열려있지는 않습니다. 막연한 기대는 금물입니다. 그냥 얼버무려 이유와 변명을 하지 맙시다. 이제 생명의 문이 닫히려 합니다. 우연한 화살, 아니 필연의 화살을 하나님이 당기려고 합니다. 슬피 울며 통곡하기 전에 말입니다. 이 세상엔 우연이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이 세계에는 필연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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