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눈물 병(甁)
(본문: 시 56:1-13)
1). 서론: 영화‘쿼바디스’에 네로 황제가 충성스러운 신하가 죽었다는 소식과 심야에 로마가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 병을 가져오라고 해서, 눈물 병에 자기 눈물을 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자를 위하여 가족이나 친족들이 운 눈물을 담아서 장례식 때 병에 넣어서 그 시체와 함께 묻었다는 풍속 설이 있습니다만, 상상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눈물이라고 하면 진실과 사랑의 정서 감정을 담은 뜨거운 눈물입니다. 본문의 시인이 유리하는 중에 흘린 모든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만 시인이 그의 억울한 수난 중에서 흘린 눈물과 함께 그의 슬픔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연민해 주십사는 뜻입니다. 그의 슬픔을 보살피사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달라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생활을 일일이 기록해 두시는 책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을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 달라고 호소합시다. 또한 고달픈 나그네 인생살이 속에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의 책에 기록해 두시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신다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읍하면서 든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본문의 이해(Text): 본문의 시는 다음 57편과 더불어 “쌍둥이 시”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표제대로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가드 지방에 유랑하다가 잡혔을 때(삼상 21:10~15), 지은 시편으로 후일에 국민시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내용은 1. 잡힌 자의 기도(1~8), 2. 구원의 확신으로(9~13) 분류됩니다.
3). 본론(Context): 본문의 시는 성서 주석자들은 “개인 탄식 시”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원수의 위협 아래 살고 있고 원수들은 그의 생명을 찾아 없애려는 간악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라고 H. Gunkel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원수들은 “뭇 백성”이(7절) 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비이스라엘인 이방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서 해석자들은 이 사람들이 7편(7절), 59편(5절)의 시인처럼 본국을 떠나 외국 땅에 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시인 자신은 그의 곤경을 어떤 전쟁 상태에 놓인 사람인 것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켈이 이 시를 “탄식 시”라고 함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전체의 신학 사상은 시인이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 원문에는 “의지한다.”라는 말이 3번이나(3, 4, 11)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인과 함께함을 의지하고 믿기 때문에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인간은 자기를 대항할 수 없다는, 어떤 악조건 아래서도 자기가 하나님께서 주신 안전은 아무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2번이나(4, 11절)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처음 부분과 중간에서 시인이 얼마나 수난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그 탄식의 모습을 보지만 그 모든 수난상은 그가 굳게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증거 하는 것임을 쉽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난 중에 하나님 한 분밖에 구원자가 없다는 신앙에 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주기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나그네 인생에서 경험하는 고난 상의 설명입니다.
여기 “나그네의 삶”은(9절) 반드시 그가 궁켈 추측대로 외국 땅에 거한다는 지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인생은 곧 나그네이다.”, “인생은 나그네의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유행가요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39편에도 “나는 주 앞에 나그네가 되고 거류자가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12절) 우리 크리스천들도 나그네라고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벧전 1:17)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영구적인 삶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인생은 나그네’라고 하지요.
본문의 시인은 무슨 이유로 그 자신을 “나그네”라고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칼빈은 “그의 모든 삶이 다만 계속하여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음을 말한다.”라고 하여 “인생은 나그네”라는 동양적인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 시인의 경우 그의 삶이 어느 한 곳에 안정할 수 없을 만큼 부단히 움직여야 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1절에 기록한 대로 그의 쫓기는 삶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종일 그를 삼키려고 치며 압제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온종일 안정할 수 없는 수난 속에 살아갑니다. 마치 나그네가 안정 없이 불안한 날을 보내듯이 말입니다. 이러한 불안과 염려는 그의 대적의 공격, 특히 5절에 있는 바와 같이 본문의 시인이 하는 말을 곡해하여 해칠 생각으로 골똘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오해하여 심지어 숨어서까지 그의 목숨을 노려보고 있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들의 하는 짓은 죄 없는 시인을 모함하고 그 생명을 죽이는 일을 저질러야만 그들의 악의 찬 흉계를 중단할는지 모르니, 그들이 그러한 범죄적인 살인을 하지 못하게 하나님이 그들의 계획을 꺾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시인은 그의 슬픔 때문에 흐르는 눈물에 관심해 달라는 특수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눈물을 병에 담는다.”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일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주석하는 자들은 로마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가족이나 친족들이 운 눈물을 담아서 장례식 때 병에 넣어서 그 시체와 함께 묻었던 것이 발굴되었다고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이런 풍속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나, 이것은 지나친 상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 병이란 로마 사람들이 사용한 병이 아니라 가죽 부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술, 기름, 우유, 물 등을 넣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가 병이든 가죽 부대이든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함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만 시인이 그의 억울한 수난 중에서 흘린 눈물과 함께 그의 슬픔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연민해 주시라는 뜻입니다. 그의 슬픔을 보살피사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달라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의 일용품인 귀중한 것을 가죽 부대에 담듯이 시인 자신의 슬픈 그 눈물을 보배를 간직하듯 하나님의 병에 담아 불쌍히 여겨달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시인의 경우를 보면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신다.”(시6:6)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께 슬픔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을 하나님의 병에 담아달라는 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된다.”라는 다른 시인의 고백도(시 42:3) 이 56편 시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 다른 시인은 “내 영혼을 사망에,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다.”라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16:8) 이렇게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라는 기도를 드리는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철저히 믿고 있습니다. (9절)
이렇게 건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기에 사람이 아무리 자기를 해치려고 해도 자기는 겁낼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내가 두려워 아니하리라.”(4:11) 라고 4장에 시인의 강한 의지 신앙이 빛나고 있습니다. 모든 “의지 시”가 그 마지막에는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바치는 말로 끝나듯이 본문의 시도 하나님이 그를 돌보시고 모든 위험과 사망에서 건져 주신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본문의 시인은 이에 건져 주심을 받기 전부터 감사한 제사를 올리기로 서약을 한 것 같습니다. 그의 생명을 건져 주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구원 신청의 눈물은 이제 감사의 눈물로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지게 됩니다. “모든 슬픔 속에서 지나는 사람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라는 이 자랑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본문을 좀 더 쉽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본문의 시인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하여 가드 지방에 유랑하다가 잡혔을 때(삼상 21:10~15) 지은 시로써, 온종일 안정할 수 없는 수난 속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인은 자기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주기를 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시인이 그의 억울한 수난 중에서 흘린 눈물과 함께 그의 슬픔과 고통을 하나님께서 연민에 찬 보살핌을 호소하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괴로운 나그네 인생길에서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의 눈물이요. 둘째는 친구나 이웃이 불쌍하여 흘리는 눈물이며, 셋째는 우리 자신을 보면서 애달픔과 회오에 찬 눈물입니다. 눈물은 순수합니다. 기도할 때 거짓 되게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눈물은 물기 있는 영의 언어입니다. 눈물은 단순하나, 많은 진실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눈물은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은 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중에 우는 이유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 때문이요. 우리 자신의 사는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아플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눈물은 영의 언어입니다. 아픔에 울고, 슬픔에 울고, 기쁨에 울고, 감동해서 울고, 감사해서 웁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 병을 준비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생활을 일일이 기록해 두시는 책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을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고달픈 나그네 인생살이 속에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의 책에 기록해 두시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신다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읍하면서 든든한 삶을 살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신다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당신의 눈물 병에 담아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책에 기록해 두시면서 우리 아픔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아픔의 원인을 소멸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이런 심정으로 고난의 역정 속에서도 가슴 뿌듯하게 살도록 합시다. 이젠 슬퍼서 울 때, 문득 하나님께서 내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서 잊지 않는 것을 생각하고서 울지 맙시다.
4). 결론: 본문 시는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가드 지방에 유랑하다가 잡혔을 때(삼상 21:10~15), 지은 시편으로, 원수들은 그의 생명을 찾아 없애려는 간악한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난 중에 하나님 한 분밖에 구원자가 없다는 신앙에 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시인은 그의 슬픔 때문에 흐르는 눈물에 하나님께서 연민해 달라는 특수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8절)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슬픔을 보살피사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달라는 시적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건져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기에 원수가 아무리 자기를 해치려고 해도 자기는 겁낼 것이 없다고 합니다. 구원 신청의 눈물은 이제 감사의 눈물로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지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괴로운 나그네 인생길에서 우리가 흘리는 감사의 눈물, 친구나 이웃이 불쌍하여 흘리는 눈물, 우리 자신을 보면서 애달픔과 회오에 찬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눈물은 영의 언어입니다. 아픔에 울고, 슬픔에 울고, 기쁨에 울고, 감동해서 울고, 감사해서 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눈물 병을 준비하시고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생활을 일일이 기록해 두시는 책이 존재한다고 믿는 신앙을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역시 고달픈 인생살이 속에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의 책에 기록해 두시면서 우리를 보살펴 주신다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감읍하면서 든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신다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는다는 것은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책에 기록해 두시면서 우리 아픔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눈물의 원인을 소멸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젠 슬퍼서 울 때, 문득 하나님께서 내 눈물을 하나님의 눈물 병에 담아 두신 것을 생각하고서 울지 맙시다. 끝.